템빨 62권 - 15화
제29위 대악마 마르코시아스.
그 또한 한때는 투쟁을 즐겼었다.
악마답게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고 더 깊은 지옥의 주인이 되어 더 많은 군단을 이끌겠다는 야욕을 품었었다.
하지만 방랑자 제파르에게 패배하고 잠시 29지옥을 빼앗기고 말았을 때.
그의 거친 본능과 정열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한계’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숨결에 닿는 것을 모조리 돌로 바꿔 그 위에 군림해온 마르코시아스는 돌로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런 놈들이 이곳 지옥에만 여럿 있다는 사실에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악마들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그들의 운명은 때때로 타고난 무언가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인간치고 외견은 나쁘지 않으니 석상으로 만들어서 침실에 장식해 놓을까.’
마르코시아스는 자신의 구역에 멋대로 침입한 인간을 몇 번이고 좌시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인간에게 위축될 정도로 타락하지도 않았다.
데빌 슬레이어?
무척 거창한 이름이지만 전대와 비교하면 아직 애송이다.
한두 번이야 귀찮아서 방치했을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
유라에게 살기를 보내며 다가가던 마르코시아스가 문득 당황했다.
자신의 눈앞에 서있던 유라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
유라가 사라진 게 아니라 자신이 보는 시야가 변한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그는 무려 1초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핏-!
피피피피피피피핏!!
등 뒤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이어지며 통증이 동반된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선혈이 자신의 것임을 깨달은 그가 황급히 호흡을 골랐다.
쩌적!
쩌저저적!!
마르코시아스의 피부와 근육이 단단한 돌로 변했다.
터텅!!
마르코시아스의 몸을 난도질하던 뜨겁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아마도 검으로 추정되는 그것이 더 이상 마르코시아스의 몸을 베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반쯤 베여 덜렁거리는 목을 더욱 석화시켜 고정시킨 마르코시아스가 힐끔, 뒤를 돌아보자 데빌 슬레이어가 아닌 다른 인간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빠르군....”
인간이 이렇게 빨라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
‘초월자인가?’
초월자가 왜 지옥에 있는지 의문이다.
‘초월자는 목숨에 꽤나 집착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수명은 영구하나 전설과 달리 물리적인 죽음엔 저항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초월자다.
단순히 발전하고 싶다는 열망을 실현시키고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놈들이니만큼 온종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살며, 그러므로 대외 활동도 거의 없다고 들었다.
한데 제 발로 지옥을 찾아오다니?
‘그것도 하필 내 지옥에.’
오늘은 여러모로 짜증나는 날이다.
다짜고짜 바알이 찾아와 난동을 부린 것으로 모자라 데빌 슬레이어와 초월자까지....
‘쯧, 불길하군.’
몇 년을 살아왔을지 모를 초월자를 만만히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신중해진 마르코시아스가 실험삼아 숨결을 토했다.
쩌저저저저적!!
부채꼴로 번져나가는 숨결이 스치는 자리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삽시간에 돌로 변해버렸다.
돌의 파도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
파도의 끝에 선 인간은....
“....쯧.”
석화되지 않았다.
혀를 찬 마르코시아스가 날개를 펼쳐서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의 앞길을 막고 선 데빌 슬레이어가 꽤 긴장한 기색인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네놈들이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이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이쯤 하지?”
악마들 사이엔 미신이 있다.
육체가 소멸하고 윤회전생할 때마다 더 강한, 혹은 새로운 권능을 손에 넣는다는 내용의 미신이었다.
물론 마르코시아스는 미신을 믿지 않았다.
헬가오, 드라시온, 모락스, 아스타로트, 푸르푸.
검성 뮐러에게 육신을 잃은 그 멍청이들의 추종자들이 주인의 위엄을 세우고자 퍼뜨린 헛소문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죽으면 시간 낭비지.’
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나야 다시 부활할지 모른다.
설령 다시 부활한다고 해봤자 삶은 전과 다르지 않을 테고.
마르코시아스는 단지 조용히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이대로 물러나겠다는 그의 말에 유라가 동요하고 있었다.
설마 이런 전개는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그리드를 쫓았다.
두 사람은 마르코시아스가 모르게 소통하고 있었다.
-글런트는 마르코시아스와 싸우는 걸 되도록 피하라고 조언했어요. 마르코시아스가 어떤 사건 탓에 시름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순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을 거라고 평가했죠. 눈에 보이는 순위를 믿기 힘든 상대이니만큼 변수가 많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싸워보고 싶은데.
예로부터 대악마를 칭할 땐 꼭 ‘지상에서의’라는 전제가 붙곤 했다.
똑같은 대악마라고 해도 지상에 있을 때와 지옥에 있을 때는 천지차이의 존재감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리드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지옥에서의 대악마가 과연 소문만큼 그렇게 대단한지 확인을 해놔야겠어.
앞으로 지옥을 주 활동무대로 삼을 예정인 그리드 입장에선 대악마의 전투력을 반드시 파악해놔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어느 지역의 대악마까지 감당 가능한지 알아둬야만 철저한 계획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드의 의중을 읽은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단, 계속 말씀드렸다시피 표면적인 순위만 보고 방심해선 안 돼요. 글런트의 평가가 무조건 정확하다고 할 순 없지만, 글런트는 마르코시아스가 22위까지 오를 자격이 있다고 했고 이는 즉 지상에서의 벨레드보다 강하다는 뜻이 되니까.
-벨레드보다?
유라는 그리드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게끔 벨레드의 이야기까지 꺼냈다.
자신의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로부터 여유가 느껴지자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성을 느낀 것이었다.
한데 웬걸.
-기대되는군.
그리드가 긴장하기는커녕 도리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호승심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을 엿본 유라는 깨닫고 말았다.
그리드에게 있어서 벨레드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불과 몇 달 전.
벨레드와 싸우는 내내 그리드의 얼굴엔 동요와 경악이 가득하지 않았던가.
어서 이 순간이 끝나길 바라는 그리드의 초조한 표정이 담긴 동영상은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한데 고작 몇 달 사이에 입장이 바뀌었다고?
‘아니, 지금 생각하면 고작 몇 달이 아니었어.’
시간의 가치는 매순간마다 다른 법이다.
벨레드전 이후 그리드는 벌써 3개의 서사시를 썼다.
살레오스와 싸우면서 일곱 번째 서사시를, 코크로 섬에서 여덟 번째 서사시를,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 지옥에서 아홉 번째 서사시를.
지난 몇 달 동안의 시간은 비록 짧지만 그리드에겐 각별한 가치로 다가왔을 것이다.
꾸욱....
그리드를 믿어보자.
설사 그리드의 자신감이 오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내가 지켜주자.
마음을 다잡은 유라가 지옥 도약을 전개, 생겨난 지 얼마 안 되는 구릉지대로 위치를 옮겼다. 그리고 엄폐물을 찾아 엎드려 저격 포인트로 삼았다.
그녀는 천년 악마 글런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르코시아스의 진짜 강점은 대상을 석화시키는 게 아니라 본인을 석화시키는 부분에 있습니다. 피부와 근육을 석화시키는 것만으로 어지간한 강철보다 훨씬 더 단단해지죠. 그런 놈이 골격까지 석화시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세상이 멸망해도 그놈 혼자서 살아남을 겁니다.”
“못 죽인다는 뜻인가요?”
“네, 그러니 놈과 싸우는 건 무의미합니다. 만약 놈과 싸우게 되면 눈꺼풀을 노리세요. 눈꺼풀 근육까지 석화시키면 불편하기라도 한 건지, 놈은 그나마 눈꺼풀 근육은 덜 단단하게 석화시키는 습관이 있거든요. 눈꺼풀을 쏘아 맞추면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쏴아아아아....
집중해서 조준점을 잡는 유라의 총신이 비취색 마력으로 물들어갔다.
명중률 상승, 탄환 강화, 투사체 가속, 멸악과 관통 부여 등.
상황에 적합한 온갖 버프스킬이 알렉스의 마법공학총에 덧씌워지기를 반복했다.
물론 어떤 기세가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저격은 은밀해야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상대는 대악마다.
“....나는 싸울 생각이 없다.”
자신을 위협하는 기운을 감각적으로 느낀 마르코시아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더욱 석화시켰다.
뿌득! 뿌드득!!
피부와 근육에 이어서 골격까지 석화된 마르코시아스는 외견만으로도 충분히 단단함이 느껴졌다. 체격도 워낙 큰 탓에 대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태산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유라는 놈의 약점을 알고 있다.
끼릭.
조준점을 잡은 유라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혼자서 싸워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아.
-....!
새로운 귓속말이 도착함과 동시에 스코프 너머 세상에 장막이 드리웠다.
그리드의 망토였다.
그리드가 유라의 저격 궤도를 의도적으로 훼방 놓은 것이다.
-이해해줘.
벨레드전 이후 지금까지 그리드는 정확히 얼마나 성장했을까.
가장 궁금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드 장본인이었다.
유라에게 양해를 구한 그가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드물게 몇 번이나 보폭을 밟았다.
스스로를 석상으로 만든 마르코시아스가 꼼짝도 안 하고 선 지금을 기회로 여기고 검무의 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극(極).”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출몰하는 보스 몬스터를 꾸준히 레이드하고 수익을 남기는 일반적인 랭커들과 달리 ‘템빨국’이라는 수익원을 지닌 그리드는 레이드에 집착할 필요가 전혀 없다. 레이드할 시간에 차라리 아이템을 만드는 게 그에겐 훨씬 더 이득일 정도다.
아무래도 사정이 그렇다 보니 그리드의 레이드 횟수는 의외로 적은 편에 들었다. 그것도 상당히 적은 편.
하지만 ‘아직 공략법이 밝혀지지 않은 보스’를 레이드한 횟수를 따지자면 그리드가 1, 2위를 다툴 것이다.
레이드의 고수라는 뜻이다.
마르코시아스가 방어에 특화 된 보스라는 사실쯤 이미 진즉부터 파악했고,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음에도 불구하고 눈의 초점은 흐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토대로 약점이 어딘지도 눈치 채고 있었다.
서걱-!
대상의 방어력을 상당량 무시하는 검무가 마르코시아스의 두 눈을 사선으로 긋는다.
대량의 출혈과 함께 29지옥이 진동했다.
예기치 못한 고통이 마르코시아스의 비명을 유발한 까닭.
온몸을 자신의 피로 적신 마르코시아스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가만히....! 날 좀 가만히 놔두라니까아아앗!!”
마르코시아스 스스로 거세시켰던 본능이 부활한다.
거대한 분노가 악마의 흉포함을 일깨우고 있었다.
굳이 그리드가 건드리지 않았어도 언젠간 반드시 일어났을 일이다.
평안을 추구하는 악마란 본디 존재할 수 없으니까.
꽈과과과과과과광!!
마르코시아스가 포효할 때마다 생성되는 거암이 그리드를 계속해서 덮쳤다.
그리드는 산사태를 일으키는 산 중턱에 노출 된 기분마저 느꼈다. 거암의 세례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급기야 겹겹이 쌓여 우물의 형태를 갖추는 암석 사이에 갇힌 그리드의 안면을 거대한 주먹이 덮쳐왔다.
꽈아아앙!!
산산조각 난 암석의 파편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른다.
하지만 그리드의 피와 살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드를 시야에서 놓친 마르코시아스가 급히 스스로를 석화시켰고,
-확실히, 벨레드보다 레벨하고 능력치가 높네.
용(龍).
강력한 돌진기로 마르코시아스의 등을 꿰뚫으며 나타난 그리드는 유라에게 자신의 감상을 전했다.
-근데 약해.
레벨과 스탯은 강함의 척도가 아니다.
지상에 올라온 벨레드의 레벨과 스탯이 비록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곤 해도 놈의 권능과 안목은 마르코시아스보다 몇 수나 위였고 종합적으론 훨씬 더 강하게 느껴졌었다.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지상에서의 벨레드가 지옥에서의 마르코시아스보다 더 강하다.
물론 마르코시아스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마르코시아스를 압도했다.
“잠재력 개방. 용.”
[파그마의 검무 <용(龍)>이 일시적으로 그리드의 검무로 진화합니다.]
“검무 창조. 초용살극(超龍殺極).”
하나의 돌진 검무(龍)가 그리드의 검무에 무한한 잠재력을 심어준다.
이론 상 수십 개의 돌진기를 만들 수 있게 된 그리드의 신형이 마르코시아스의 몸을 꿰뚫고, 또 다시 꿰뚫으며 전장을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