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27화 (1,217/1,794)

템빨 62권 - 14화

“.....”

템빨국, 라인하르트.

부활 포인트에서 눈을 뜬 그리드가 새삼 의문을 품었다.

평범한 플레이어는 한 해 평균 몇 번을 죽을까?

역시 나는 적게 죽는 편이겠지?

굳이 능력에 비하면 많이 죽는 편일 수도....

‘나보다 센 놈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는 문제군.’

“영우씨!”

떨어진 경험치와 아이템 목록을 확인하는 그리드에게 유라가 달려와 와락 안겼다.

그녀는 그리드의 뒤를 잇는 랭커다.

그리드가 걸어온 길을 바짝 뒤쫓아 걷고 있는 만큼 그리드가 치른 희생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제 탓에 당신이....”

하필 바알이 그곳에 나타난 이유는 순전히 자신 때문이다.

자신이 안드라스의 추격을 간과하지 않았다면 바알이 등장했을 일도, 그리드가 죽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에 짓눌린 유라의 떨리는 등을 그리드가 다독여주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리드가 봤을 땐 유라가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가 안드라스의 추격을 받게 된 이유는 그리드를 돕고자 바알의 행사를 방해했기 때문이며, 이후 바알이 등장한 이유는 그리드가 안드라스와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니까.

무엇보다도....

“내가 바알에게 죽은 건 내가 약하기 때문이야.”

나에겐 유라를 원망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단언하는 그리드에게 유라가 동조했다.

“당신을 지키지 못한 건 제가 약하기 때문이고요.”

“....피차 더 강해져야겠군.”

“맞아요.”

과연 408레벨 하이랭커의 향상심은 대단했다.

오래간만에 랭킹창을 열어 그녀가 통합랭킹 3위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리드가 크리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지옥에서 사냥하는 유라보다 높은 레벨을 유지 중인 크리스에게 새삼 관심이 생긴 것이다.

-렙 몇이야?

-410.

-엄청 빠른데?

-카오스 산맥에서 솔플 가능한 명당을 발견했거든. 그런데 빨라봤자 너보다 빠르겠냐? 그리드 넌 지금쯤 430레벨 근처겠지?

-.....

417레벨이었다가 방금 막 416레벨이 된 차입니다만.

슬그머니 입을 다문 그리드가 현실 감각을 깨우쳤다.

‘마의 구간을 넘은 사람들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유라와 크리스가 대표적인 예다.

아무래도 제약이 풀렸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듯하다.

아무렴, 플레이어들도 성장해야지.

세상 천지에 강적들이 득실거리는데.

‘반면 나는 한동안 성장이 멈췄다시피 했고.’

그리드에겐 온전히 사냥에 집중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템을 제작하느라, 국왕의 업무를 돌보느라, 노에와 템빨골을 성장시키느라 등의 애로 사항들은 부차적인 문제다.

그리드가 남들보다 시간 활용에 애를 먹은 이유는 그가 항상 커다란 에피소드에 휩쓸려왔기 때문이었다.

가장 최근의 사건들만 되짚어 봐도 알 수 있다.

그리드는 백린목과 황금호두나무의 재배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동대륙을 방문했었다.

근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랜드마스터와 함께 환국에 있었다.

절대신 한울을 만난 것으로 모자라 치우의 시험을 치렀다.

‘....생각하니까 황당하네.’

지옥에서 겪은 일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드는 단지 서큐버스를 테이밍하기 위해서 지옥을 방문했을 뿐이다.

근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1위 대악마 바알과 싸웠고, 죽었다.

“.....”

이쯤 되니 무섭다.

어이없는 우연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걸 보면 세상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라고, 우연을 가정하는 그리드였지만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리드가 겪어온 모든 사건들은 전부 그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 즉, 필연이었으니까.

‘그보다 용(龍)이라....’

<용(龍)>

용의 기세를 재현하는 검무입니다.

효과:???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그리드에겐 이미 용의 검무가 있었다.

정확히는 ‘잠재력’이다.

반용족의 공주 헬레나가 몇 번이나 보여준 용의 기세를 무한의 검기가 학습해서 새로운 검무의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근데 파그마의 검무에도 용이 있었을 줄이야.’

<용(龍)>Lv.1

절대신 한울의 가슴을 꿰뚫었던 청룡의 마지막 숨결을 재현하는 검무입니다.

10미터 이내의 대상에게 돌진하여 물리 공격력 3,0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히고 높은 확률로 관통합니다. 관통 시 데미지가 2배로 상승하며 대상을 5초 동안 ‘회복 불가’에 빠뜨립니다.

스킬 검기 소모:5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의 검무다.

일단 돌진기라는 점이 엄청난 강점이었다.

대상과의 거리를 순간적으로 좁히며 파고드는 돌진기의 위력과 효용성은 이미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입증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파그마의 검무와 그리드의 검무엔 돌진기가 전무했고 그리드는 업적을 쌓아 얻은 <종횡무진> 스킬에만 의존해왔다.

‘물론 순보도 있지만 순보는 스태미나를 터무니없이 깎아먹으니까 자주 사용하기엔 부담이 컸지.’

체력이 아닌 검기를 소모하는 돌진기를 확보한 건 크게 기뻐할만한 일이다.

파그마가 치우의 일격을 보고 깨우쳤던 극(極)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신을 보고 깨우친 검무....

무려 절대신 한울에게 상처 입힌 순간의 청룡을 재현한 검무이니만큼 계수가 높은 것도 마음에 들고.

‘굳이 따지면 연(聯)보단 못하지만 연은 한계가 너무 명확해.’

바알이 보여주었듯이, 수차례의 공격을 연계해서 대상을 공격하는 연(聯)의 경우 상대방의 수준이 높을수록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모든 공격을 연계하기도 전에 차단당해서 흐름이 끊겨 버리므로 종합 공격력 계수가 아무리 높아봤자 무용지물인 셈.

일회성 공격으로 높은 계수를 자랑하는 극, 살, 용 같은 검무의 중요성이 앞으론 더욱 부각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눈여겨 봐야할 점은 관통 효과.’

대상을 물리적으로 관통한다는 것은 즉 대상과의 위치를 바꾼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기도 했다.

실제로 바알에게 용을 썼을 때 그리드는 바알의 가슴을 꿰뚫었다. 바알의 발밑에 서있던 그의 위치가 바알의 등 뒤로 바뀌었다.

덕분에 잠시나마 활로가 열린 것이다.

체력이 달려서 움직이지 못했고, 그래서 도망치지 못했을 뿐이지.

‘기다렸던 휘(輝)나 참(斬)이 아니라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는 걸로.’

더군다나 아직 잠재력으로 남아있는 용(龍)의 경우 ‘용의 기세’를 재현하는 검무다.

버프류 스킬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파그마의 용과 자신의 용을 함께 융합해서 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본 그리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중얼거렸다.

“두 마리의 용.... 쌍용인가.”

조만간 새로운 광고 문의가 들어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영우씨?”

“흠흠, 일단 나를 다시 지옥으로 보내주지 않을래?”

“진심이에요?”

방금 전 지옥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놓고 또 다시 지옥에 가겠다고?

당황하는 유라에게 그리드가 나름 추론해보였다.

“바알이 지옥 한복판에 나타나서 난동을 부렸으니 악마며, 마족들이며 전부 위축돼 있지 않겠어? 바로 지금이 지옥을 탐사하며 익숙해질 기회 같은데.”

“그럴 수도 있지만 바알이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은요?”

“아니, 그놈은 내가 곧장 또 다시 지옥에 나타날 거라곤 생각 안 할 거야. 방금 죽은 놈이 또 죽겠다고 찾아올 거라고 어떻게 예상하겠어?”

설령 그리드가 다시 지옥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더라도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태까지 그리드가 만나왔던 절대적인 존재들은 성격이 대체적으로 무심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오만일 테지.

절대적 존재의 유일한 약점일 것이다.

이쪽에선 그 오만한 성격을 파고 들어야하는 거고.

“....알겠어요.”

그리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은 단순 사냥인 거죠?”

“응, 나도 한동안 열렙 좀 해야겠어.”

물론 카오스 산맥도 훌륭한 사냥터다. 크리스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드는 단일 공격에 특화된 크리스와 달리 강력한 광역 딜링이 가능했다. 카오스 산맥보다 마물의 개체수가 많은 지옥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럼 30번대 지옥으로 안내해드릴게요. 20번대 지옥에는 아직 마르바스가 머물고 있을 테니까.”

그리드의 실력을 고려했을 때 그리드에게 가장 적합한 사냥터는 23번~25번 지옥일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지옥에서 페널티를 얻는 입장이었고 현재 20번대 지옥은 마르바스에 의해서 폭젠 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곳에서 사냥 유지력을 발휘하는 건 엄연히 불가능한 일.

아쉽지만 일단 30번대 지옥으로 보내는 게 맞다.

게이트를 생성하며 좌표를 입력하는 유라에게 그리드가 말했다.

“아니, 29번 지옥으로 부탁해.”

“거긴 효율이 안 나오잖아요?”

3분 사냥하고 10분, 15분 쉬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물론 유라가 파티를 맺고 함께 사냥하면 시간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을 테지만 유라는 그리드의 성격을 알고 있다.

그는 분명히 솔로 플레이를 고수할 테지.

“효율은 충분히 나와.”

“.....”

고작 몇 분 전에 겪었던 일들을 잊은 걸까?

유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잠시나마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라는 그리드를 의심하기보다 믿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알았어요.”

결국 그리드의 고집을 꺾지 못한 유라가 게이트에 29번 지옥의 좌표를 입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용(龍).”

콰아아아앙!!

유라는 29번 지옥에 도착하자마자 몰려오는 마물 무리에게 돌진하는 그리드 때문에 매우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황은 이내 경악으로, 경악은 신뢰로 바뀌었다.

그리드가 지치지도 않고 마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기 때문.

지옥에서 겪어야할 온갖 페널티를 이제 그는 더 이상 겪지 않고 있었다.

물론 데빌 슬레이어처럼 버프를 받지는 못했지만, 단순히 페널티를 겪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리드의 실력은 유라의 실력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더 아래 지옥으로 이동해도 될 것 같은데?”

“.....”

마르바스가 일으키는 폭젠 현상이 무색하게도 마물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유라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한참 아래로 내려가도 좋을 것 같아요.”

10번대 지옥.

데빌 슬레이어 유라조차도 현재는 사냥터로 취급하지 못하는 구획.

유라도 가끔 퀘스트를 깰 때나 방문하는 그곳으로 향하는 문이 그리드를 위해서 활짝 열렸다.

“아시다시피 지옥에선 귀환 주문서의 사용이 금지돼요.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곧바로 저를 부르세요. 알았죠?”

“응, 고마워.”

정말이지 참 든든한 여자다.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유라에게 손을 흔들어준 그리드가 게이트를 넘어 19번 지옥으로 이동했다.

곧 혼자가 된 유라가 심호흡하며 뒤를 돌아봤다.

쿠구구구구....

마물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든 대지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급기야 발생하는 균열 사이에서 새카만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데빌 슬레이어. 네가 기어코 선을 넘는구나.”

마르코시아스.

제29위 대악마다.

현재 유라가 밟고 선 땅의 주인이었다.

실력은.... ‘지상에서의’ 13위 대악마 벨레드보다 강했다.

“내 구역에 바알을 끌어들인 것으로 모자라서 곧바로 다시 찾아와 횡포를 부리다니. 일부러 내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면 축하한다. 성공했구나.”

‘마르코시아스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어.’

29번 지옥에 다시 가고 싶다는 그리드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유라는 작금의 사태를 염두에 뒀었다. 하지만 매우 낮은 확률로 발생할 사태라고 분석했었다.

마르코시아스는 대악마들 사이에서 겁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중한 성격이었으니까.

하지만 도발의 강도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결국 마주치고 말았으니 살아남는 건 사실상 힘들다고 봐도 무방해 보인다.

‘이렇게 된 이상 싸우는 수밖에.’

뭐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어차피 언젠간 싸워야할 상대야. 나중을 대비해서 실력을 가늠해볼 기회라고 생각하자.’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하긴 하겠지만.

각오를 다지는 유라의 귓전에 예상치 못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유라 너, 근심거리를 숨기면서 웃을 땐 눈매가 더 휘더라?”

“....!”

깜짝 놀란 유라가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화르르르륵....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게이트의 틈새를 비집고 화염에 불타는 검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서걱!!

유라의 피부를 달아오르게 만든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 마르코시아스가 서있던 자리로부터 소름 돋는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유라가 뒤늦게 인지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상에서의 벨레드’에게조차 제대로 닿지 않았던 그리드의 검이 마르코시아스의 목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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