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2권 - 13화
파그마.
세상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 대장장이였노라고 회자한다.
그가 남긴 불멸의 작품들은 영원토록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파그마.
가끔 누군가는 그를 천하의 몹쓸 놈이라고 비난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벗을 배신하고, 죽인 것으로 모자라 여러 사람들을 희생시켰으니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었다.
파그마.
세계가 위기를 눈앞에 둔 순간 신들의 실체를 엿본 그는 고립되고 말았다.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이미 혼자였다.
파그마.
그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 영웅들의 묘비를 파헤쳤다. 오직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으으.... 우으워어....>>
그리드.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하고 새로운 삶을 거머쥔 그는 파그마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리드.
파그마가 남긴 작품들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그는 파그마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품었다.
그리드.
벗에게 살해당한 브라함의 내막을 알게 된 그는 파그마에게 실망했다.
그리드.
번헨 열도에서 전대 전설들의 데스나이트와 조우한 그는 파그마에게 혐오감마저 느꼈다.
-보아라. 끝내 내게 의지했던 네놈과 달리 저 녀석은 스스로 한계를 넘어섰구나. 어쩌면 네놈도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핫! 크하하하핫!!
<<으아아.... 우우우....>>
파그마.
번헨 열도에서 그는 홀로 싸웠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지옥의 군세와 며칠 밤낮을 싸우며 스러져갔다.
그리드.
양반(반신)으로 태어났음에도 아니, 양반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을 위해서, 약자를 위해서 싸웠던 파그마의 심정을 그는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의를 핑계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파그마의 선택들엔 여전히 반감을 품었고 자신은 그처럼 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파그마.
지옥의 군세를 모조리 격퇴하고 세계를 지켜낸 그는 지난날 자신의 모든 선택이 합리적이었다고 믿었다. 정확히는 믿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후회를 숨기지 못했다. 고독 속에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세계에 혼란이 도래하는 순간 마(魔)의 종족인 벗이 본능에 매몰될까 두려워 배신했던 자신의 나약함을, 불신을 마음 깊이 원망했다.
그리드.
빙벽 속에 소중히 보관돼있는 브라함의 육신을 마주한 그는 파그마의 후회를 읽고 동정했다.
파그마.
죽음에 이르러 지옥에 떨어진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영겁의 시간 동안 되풀이될 고통과 슬픔을 당연히 치러야할 대가로 받아들였다.
그리드.
그는....
-파그마! 너의 삶은 철저히 실패했다! 저 녀석의 존재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구나! 큭큭! 크하하하핫!! 흐느껴라! 절규해라! 더욱 더 울부짖어라!! 끊임없이 후회하며, 고통의 굴레에서 영원토록 몸부림쳐라!!
세상에 둘도 없는 쾌락을 맛보기라도 하는 걸까.
절규하는 영혼을 움켜쥔 손에 힘을 싣는 바알의 표정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치이이익....
바알이 배출하는 마기 탓에 영혼이 검게 타들어갔다. 연기가 피어오를 때마다 영혼의 형태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똑바로 형태를 붙잡았다.
영혼은.
파그마의 것으로 추정되는 저 영혼은, 자신의 죄를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엄습할지언정 이성을 붙잡으며 고통을 감내했다.
-하핫!! 크하하하하핫!!!
끝끝내 형태를 유지하는 파그마의 영혼이 바알의 웃음소리를 더욱 크게 키웠다.
이성을 놓고 자기 자신을 잃으면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해방될 진데, 고통을 외면하기는커녕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영혼의 숭고함이 그를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바알은 불변의 진리를 새삼 실감했다.
결국 선(善)한 놈들을 괴롭히는 게 가장 즐겁다.
-미련하구나! 정녕 미련해! 그래서 더욱 더 가엽고 즐겁구나!!
<<우우.... 우으어....>>
바알의 웃음소리와 비례해서 영혼의 고통이 커진다.
그때였다.
“지금 누구를 비웃는 거지?”
주저앉은 채 잠자코 있던 그리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서슬퍼런 눈으로 노려보는 그를 힐끔 쳐다본 바알이 거짓말처럼 웃음을 그쳤다.
흰자위와 눈동자를 구분하지 않고 온통 새카만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여태껏 두려워 한 마디도 못하고 있던 겁쟁이 따위, 그는 단지 눈빛만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리드가 잠자코 있었던 이유는 두려워서가 아니다.
심상이 깨진 여파로 엄습해온 무력감에 짓눌렸던 것일 뿐.
“너 따위 병신새끼가 감히....”
[템빨왕 그리드가 아홉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감히 영웅을 비웃어?”
[파그마.]
[불멸의 전설로 남은 대장장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단지 작품으로 회자할 뿐이며,]
-영웅? 너희 인간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도덕과 신의를 등진 변절자가 영웅이라고?
[누군가는 비난하고 원망할 따름이다.]
[하지만]
“비록 과정에는 실수가 많았지만 결국 세상을 구했으니까.”
[템빨왕 그리드만큼은 그를 영웅이라 칭송했다.]
[여러 사람을 희생시켰을지언정 그가 세상을 구한 건 사실이기에.]
“파그마.”
마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파그마의 영혼을 슬며시 부른 그리드가 왕관을, 탈리마의 수치를 벗었다. 그리고 땀과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꾸벅,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당신에게는 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
-....?!
바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영원히 이어져야할 영혼의 절규가 잠시나마 멈췄기 때문.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리드와 영혼을 번갈아보는 사이 그리드는 영혼에게 약속했다.
“꾹 참고 기다려. 내가 반드시 브라함에게 사죄할 기회를 줄 테니까.”
<<.....요, 용(龍).>>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세상을 위해 싸웠던 파그마의 과거가]
[사람들과 함께 싸워가는 그리드의 현재와 교차한다.]
[그리드의 근원이 그리드의 일부로 흡수됐다]
-네놈이 어떻게?
단지 이성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어야할 파그마의 영혼으로부터 어떤 의지가 샘솟자 놀란 바알이 잠시 넋을 잃었고,
[파그마의 검무, <용(龍)>을 습득하였습니다.]
[그리드의 검무의 하위 범주에 속하는 스킬입니다. 사용에 완전히 능숙해지면 그리드의 검무로 진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드는 파그마의 의지를 확실하게 전달 받았다.
[템빨왕 그리드가 서사의 아홉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알려지지 않았던 비화가 공개된 여파로 파그마의 전설이 확장됩니다.]
[파그마가 제작했던 모든 아이템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영겁의 지옥에 갇힌 채 후회를 곱씹는 그의 영혼을 구원의 빛이 비추었나니, 빛의 정체는 템빨왕 그리드였다.>
[파그마의 전설의 종장이 템빨왕 그리드의 서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그리드를 바라보는 바알의 눈빛에 불신이 가득했다.
파그마의 영혼이 갑자기 의지를 품은 것은 둘째 치고 그리드의 존재감이 한층 더 강력해진 까닭이었다.
지옥을 가득 채운 마기와 열기가 그리드를 더 이상 억압하지 못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유라.”
“네.”
그리드와 파그마가 처음으로 마주친 현장.
어쩌면 두 번 다신 보지 못할 역사적인 순간을 두 눈에, 머리에, 가슴에 똑똑히 새기고 있던 유라가 권총을 저격총의 형태로 바꾸며 대답한다.
당장이라도 싸울 태세인 그녀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
“.....”
“어차피 나는 피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쓸데없이 같이 죽지 말자고.”
확실히.
바알의 관심은 오직 그리드에게 집중돼 있었다.
특히 파그마의 영혼이 절규를 멈춘 뒤부턴 분노에 가까운 감정마저 표출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나갈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유라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싫은데요? 혹시 모르잖아요. 함께 싸우며 기회를 만들다 보면 활로를 모색할 수 있을지.”
그리드를 혼자 죽게 놔두기가 미안하답시고 근거 없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회를 만들어볼 작정이었고, 기대를 걸어볼만한 실력이 그녀에겐 있었다.
그리드가 씨익 웃었다.
“든든하네.”
이젠 그리드도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생각은 없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너무 많은 사건을 통해서 경험했으니까.
칠악성의 화신인 그랜드마스터조차 그리드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실정 아닌가.
하물며 눈앞의 상대는 제1위 대악마 바알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할 마당에 유라의 손길을 뿌리칠 이유가 추호도 없었다.
“미안한데 3분이야. 난 최대 3분밖에 못 움직여.”
불꽃 여왕의 힘은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있고 스태미나는 바닥난 상태다.
화신의 폭풍을 소환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또 다시 붕괴됐다간 그땐 정말로 정신력이 견디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 아직 템빨이 남았다.
각오를 다지듯 이를 악 물며 기수식을 취하는 그리드의 곁에 유라가 나란히 섰다.
“3분이면 충분하죠. 지옥 규제.”
쩌어어어어어엉!!
악을 부정하는 데빌 슬레이어의 권능에 29지옥 전체가 짓눌린다.
대기 중에 혼재하던 마기가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졌고 바알이 내뿜던 무한한 마력도 아주 약간 위축 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착각이라도 좋았다.
그리드와 유라는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전광.”
파직!
뇌전을 튀긴 청룡의 부츠가 이내 백열한다.
어느새 하늘 높이 날아오른 그리드는 최고 속도에 도달함과 동시에 뇌신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천(天).”
재사용 대기 시간을 공유하지 않고 ‘모든 단일 검무를 전개한다.’는 말도 안 되는 사기성을 띄는 검무.
이 검무의 위력을 그리드는 몇 번이나 확인한 바 있다.
천의 유일한 단점은 ‘융합 불가’라는 점밖에 없다.
쩌정!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정!!
그리드는 체력을 안배하지 않았다.
비행 상태에서 스태미나 하락을 방지하는 <번개의 화신>의 효과를 등에 업고 전력을 다해서 날뛰었다.
천의 검무가 특정 검무를 재현할 때마다 순보를 써서 위치를 바꾸며 바알을 전 방위 습격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검무가 바알이 둘러치는 실드에 가로막혔다.
파의 검무는 단 한 겹의 실드에, 살과 극의 검무는 세 겹의 실드에.
심지어 연의 검무는 검로를 쫓아 생성되는 실드에 차단당해 끝까지 연계되지도 않았다.
“크윽, 허억....! 허억!!”
물처럼 흐르는 실드의 운용이 먼 옛날 싸웠던 말락서스를 연상시킨다. 물론 말락서스의 실드보다 바알의 실드가 훨씬 더 빠르게 생성됐으며 수십 배 더 단단했다.
‘설마 약점을 읽는 건가?’
마기를 하늘 전역에 펼쳐 벼락처럼 떨어뜨리는 바알의 광역 스킬 탓에 부득이 지상으로 착지한 그리드가 의심을 품었다. 지상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번개의 화신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됐고 스태미나가 다시 소모되기 시작했다.
<화염에 휩싸인 백호 자세>를 펼침과 동시에 지신으로 방벽을 세운 그리드가 어떻게든 마기의 벼락 세례를 견디는 사이.
“번뇌 차단. 복수의 탄환. 멸악의 빛.”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데빌 슬레이어 고유의 버프 스킬을 중첩시킨 유라가 저격총을 발사했다.
콰창! 콰창!! 콰차차차차차차차차차창!!!
어둠을 가로지르는 비취색 섬광이 바알이 연거푸 펼치는 실드를 부수고, 부수고, 또 다시 부순 끝에 바알의 심장까지 도달한다.
벌써부터 라스트 보스에게 유효타를 먹이다니, 과연 악마의 천적인 데빌 슬레이어답다..... 라고 생각하던 그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악을 부정하는 온갖 기운이 담긴 섬광에 적중 당하고도 바알의 생명력이 미동조차 안 한 까닭.
실제로 바알은 작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여러 개로 분산시켰던 마기의 벼락을 일점으로 모아 창을 빚은 놈이 그것을 투척하자 대지의 방벽이 무너지며 그리드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제길, 피한다고 피한 건데.’
순간적으로 초월경에 진입했지만 체력이 뒤따라주지 않아 완벽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정말 하찮군. 파그마의 영혼엔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모르겠다만, 지금 너희들의 실력으론 내게 여흥거리조차 못 된다. 하니 썩 꺼져라.
정말로 지루한 눈치다.
바알이 손을 치켜들자 그 손이 마치 슈트리오의 손처럼 비대해졌고 이내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드와 유라를 지상과 함께 통째로 짓뭉갤 기세였다.
‘회(回)를 써서 한 번쯤은 버틸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무의미하다.
그리드에게 남은 체력은 이제 정말 조금밖에 없었다. 다음 검무가 마지막 검무가 될 공산이 컸다.
회로 기껏 공격을 맞받아 쳐봤자 제자리에서 몇 발자국 움직이지 못하면 활로를 찾아봤자 소용이 없었다.
‘살이나 극은 닿지 않고....’
역시 초밖에 없나.
유라를 데리고 순보로 자리를 이탈한 뒤, 이후의 일은 유라에게 맡기는 수밖에.
생각하던 그리드가 문득 용의 검무를 떠올렸다.
스킬의 설명을 읽을 겨를이 없어 용의 정확한 기능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하필 지금 용을 얻었다는 건 작금의 위기를 타개할 힌트가 용에 담겨있다는 뜻이 아닐까?
Satisfy는 늘 그래왔으니까.
“파그마의 검무.”
파그마.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외쳤던 이름을 오래간만에 입 밖에 꺼내자 느낌이 새롭다.
“용(龍).”
콰앙─!!
감회에 젖어 피식 웃는 그리드의 몸이 말 그대로 발사됐다.
용의 승천이었다.
쫓겨난 신들에게 최후까지 저항했던 동방의 용이 한울의 가슴을 꿰뚫는 장면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이곳 지옥에서 재연됐다.
-뭣....
바알의 몸이 살짝 기운다.
가슴이 꿰뚫린 그가 등진 하늘 위에 그리드가 올라서 있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그리드를 뒤쫓은 유라가 지상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용의 자원 소모량이 융합 검무와 비견될 정도로 높단 반증이다.
잘려나간 팔에서 지속되는 대량의 출혈이 체력 소모를 촉진시킨 결과일 수도 있다.
“영우씨!!”
“먼저 가.”
꽈앙!!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바알의 손이 그리드의 머리를 후려쳤다.
쓰러지며 유라를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은 그리드가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했다.
감겨가는 그의 시선이 파그마의 영혼을 좇는다.
‘기다려.’
약속은 지킬 테니까.
쿠르르르르릉....
29지옥에 거대한 구릉지가 생성됐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이 고작 한 명의 인간을 없애느라 만든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