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25화 (1,215/1,794)

템빨 62권 - 12화

악마 안드라스.

그가 타고난 권능은 화염이다.

태생적으로 강력한 불길을 다룰 줄 알았던 그는 악마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하지만 대악마는 되지 못했다. 아니, 대악마가 될 자격 자체가 그에겐 없었다.

헬가오와 벨리알.

안드라스보다 능숙하게, 그리고 더욱 더 강력하게 불길을 다루는 대악마가 이미 둘씩이나 존재했던 까닭이다.

대악마가 되지 못하는 악마....

안드라스는 삶의 목적을 찾지 못했다. 자신에게 하필 불의 권능을 내린 야탄 신을 원망하며 끊임없이 방황했다. 때때로 폭주하여 큰 사고를 치기도 했다.

급기야 몇 명의 대악마에게 표적이 된 그를 구원한 존재가 다름 아닌 바알이다.

안드라스를 거두어 권속으로 삼은 바알은 그에게 무려 2개의 권능을 새로이 하사하였다.

강철과 바람.

덕분에 총 3개의 권능을 갖게 된 안드라스는 완전체로 거듭났다.

신체와 마력을 강철로 바꾸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력을 발휘하였고, 강철로 바꾼 신체와 마력을 불로 달궈 적에게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안길 수 있게 됐다. 굳이 직접 폭력을 행사할 필요도 없이 폭풍을 일으켜 주위를 압도하였으니 안드라스의 위용은 이미 대악마와 필적했다.

안드라스는 현재 공석으로 남아있는 32위 대악마의 자리를 자신이 언제라도 차지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다.

조금 더 발전하면 32위와 마찬가지로 공석인 22위까지 넘볼 수 있다고 믿었고, 악마도 아닌 하급마족 출신으로 검술을 연마해 13위 대악마에 올랐던 방랑자 제파르(현재는 순위가 다시 하락했다)처럼 자신이 언젠간 전설을 쓰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가 대악마가 되지 않고 여전히 바알의 권속으로 남아 충성하는 이유는 바알을 진심으로 존경했기 때문이다.

안드라스에게 있어서 신은 야탄이 아닌 바알이었다.

그는 앞으로 영원히 바알의 곁을 지키며 바알의 종노릇을 하고 싶었다.

얼마 전 감히 제1지옥에 숨어들어 바알의 행사를 방해했던 유라를 추격해온 것 또한 순전히 안드라스의 의지이자 충성이었다.

““큭.””

마(魔)를 멸하는 불길 속에서 안드라스가 신음을 토했다.

그는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신성한 불길.

어째서 지옥 한복판에 이런 불길이 치솟는단 말인가.

““역시 네놈은 천상에서 왔구나. 감히 맹약을 깨다니....””

자신을 천상의 신, 혹은 신의 사자쯤으로 착각 중인 안드라스가 맹약을 운운하자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빛의 여신 레베카와 악신 야탄의 관계가 증명하듯, 천상과 지옥은 역시 상호 협력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신이라는 놈들은 알면 알수록 뒤가 구리단 말이지.’

지금은 그리드와 인류에게 호의적인 헥세타이아조차도 한때 인계를 멸망시키려했던 장본인 아닌가.

헥세타이아 외의 모든 신을 의심하고, 경계해야한다고 그리드는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는 게 우선이다.

‘강한 놈이다.’

지옥에서 발생하는 페널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강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진짜로 강하다.

인계에 강림했던 22위 대악마 베리드와 비슷한 수준?

형태를 실시간으로 바꾸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강철의 쇠사슬과 육체를 짓눌러 행동에 제약을 주는 풍압 모두 위협적이었다.

‘속전속결.’

화신의 폭풍을 전개하여 무한의 검기가 유지 중인 지금 모든 공격을 쏟아부어 해치워야한다.

판단한 그리드가 벨리알의 힘을 꺼내 영구한 체력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불꽃 여왕> 패시브 효과가 활성화 됩니다. 패시브가 유지되는 동안 스태미나가 하락하지 않습니다.]

“연살화극락.”

새롭게 창조한 5융합 검무 중 하나를 선보였다.

쩌정-! 쩌저저저저정!!

붉게 달아오른 채 거미줄처럼 얽힌 쇠사슬 위를 달려 그리드를 덮치던 수십 마리의 강철 늑대가 모조리 격살 당했고,

쏴아아아아아아....

푸른 검기의 꽃잎이 그리드 주위로 가득히 번져나간 후.

꽈광! 꽈과과과과과과!!

이어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화신의 폭풍 속에서도 꾸역꾸역 범위를 확장시켜나가고 있던 쇠사슬을 모조리 끊어내는 대단위 검무의 위력은 ‘광역 스킬의 공격력은 낮다’는 필연을 부정할 정도였다.

““커흑, 컥!!””

강철의 권능은 안드라스의 마력뿐만 육신과도 연결 돼 있었다.

그러므로 안드라스는 마력과 육신 모두를 강철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쇠사슬과 늑대들이 베이고, 소멸할 때마다 안드라스는 자신의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시간, 시간이 필요하다.’’

안드라스는 엿보고 있었다.

신인지, 천사인지, 그도 아니면 인간인지 모를 눈앞의 흑발 놈이 벨리알의 힘을 빌려 간신히 체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조금만 더.

정말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저놈이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는 건 안드라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화신의 폭풍의 첫 번째 필드 효과인 <거룩한 불꽃>은 사악한 존재에게 지속적인 데미지를 입히기 때문.

현재 안드라스의 육신은 화로 속에 뛰어든 나방처럼 서서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놈은.... 아그너스는 어디냐?’’

초연살파극.

또 다시 이어지는 5융합 검무의 초격을 간신히 방어해 치명상을 면했지만, 그 대가로 한쪽 팔을 잃은 안드라스가 소용돌이치는 불꽃의 폭풍 너머를 애타게 쳐다보았다.

아그너스.

놈 또한 이곳에 함께 오지 않았던가.

비록 인간이지만 위대하신 바알과 계약을 맺은 놈은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한데 왜.

한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이번에 새로이 만든 사자(死者)를 앞세워 저 혐오스러운 불꽃을 꿰뚫고 나타나 저 흑발놈을 차단하지 않고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뭐하느냐....! 나를 도와 주인의 위엄을 바로 세우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냔 말이다!!””

악에 바친 안드라스가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은혜와 존경.

하늘 높은 곳으로부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불꽃의 폭풍이 일으키는 소음을 꿰뚫는 그 음성은 안드러스뿐만 아니라 그리드의 두 귀에도 똑똑히 내려와 박혔다.

-신뢰와 의지.

털썩!

안드라스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바알이시여!!””

강철 면갑 너머로 언뜻 엿보이는 절절한 눈빛을 보니 마치 구원자라도 만난 듯한 태도다.

반면 그리드는 커다란 절망에 빠지고 있었다.

‘바알....!’

그리드는 바알의 편린을 목격한 바 있다.

악마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는 인계에서, 바알의 수십 가지 의지 중 하나와 조우했었다. 그리고 싸워서 이겼지만 그 경험은 도리어 그리드에게 커다란 공포를 심어주었다.

바알의 지극히 일부. 심지어 약화될 대로 약화된 일부조차도 엄청난 힘을 품고 있었으니 진짜 바알의 힘은 어느 정도인지 감히 추량할 수 없었고,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게 됐던 것이다.

바알의 음성이 이어졌다.

-안드라스. 은혜를 배신하고, 존경을 짓밟고, 신뢰를 농락하고, 의지하는 자를 조롱해야할 악마여.

““....!!””

강철 면갑에 가려진 안드라스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눈치 챈 것이다.

신께서 자신을 비난하고 계심을.

-내게 은혜를 갚고자 인간을 추격하고, 내 음성을 듣자마자 무릎을 꿇어 존경을 표하고, 나의 다른 권속을 신뢰하며 힘든 순간엔 의지하려드는 네가 정녕 악마인가?

““...!!””

콰앙!!

검은 벼락이 내려쳤다.

단 한 번의 번쩍임으로 화신의 폭풍이 반으로 쪼개져 걷혀버렸다.

오로지 그리드의 의지를 따라 구축되고 유지됐던 그리드의 심상이 외력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윽....!”

[당신의 심상이 깨졌습니다.]

[마음이 꺾여 상태이상 ‘허탈’에 걸립니다.]

[모든 능력치가 대폭 하락하고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무슨, 이딴....!’

심상은 강력한 무기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마음이 꺾이는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는 법이니까.

타인에게 심상을 노출한다는 행위 자체가 사실은 커다란 위험을 동반하는 셈이다.

주저앉아 꼼짝도 못하는 그리드에게 바알은 아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안드라스. 야탄 신께서 네게 쓸모없는 재능을 내리시어 네놈을 절망시켰던 이유는 네놈에게 악마의 자격이 없음에 실망하셨음이고,

바알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29지옥 전체로 퍼져나간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던 이유는 언젠가 네놈이 또 다시 겪게 될 절망을 기쁘게 감상하고 싶어서였다.

악마란 만악의 근원이다.

선을 부정하는 존재이며, 죄를 범함에 있어서 특별한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악할 뿐이다.

바알이 그랬다.

놈의 모든 선택과 행동은 누군가를 타락시키고, 좌절시키고,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다.

-아아, 안드라스여. 사악함을 잃은 고결한 악마여. 네가 흘리는 피눈물은 그 어떤 천사의 피보다 더 달콤해 나를 기쁘게 만드는구나.

““바알....! 바아알!!””

그리드는 바알과 안드라스의 관계를 모른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유추됐다.

바알이 안드라스의 믿음에 조롱으로 화답한 상황 아닌가.

촤르르륵, 철컥!!

그리드에게 베여 끊겨나갔던 안드라스의 쇠사슬이 일점으로 모여 거대한 검의 형상을 갖췄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 검은 그리드가 아닌 바알에게 겨눠졌다.

““죽여 버리겠다! 네놈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퍼엉-!!

질풍을 일으킨 안드라스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새카만 하늘에 얼굴의 절반을 드러내고 있는 바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진다.

이어서.

콰아아앙!!

검은 벼락이 안드라스의 미간을 꿰뚫었다.

바알의 몸에 닿지 못한 검이 기세를 잃고 떨리다가 서서히 소멸했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 안드라스의 몸은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

슬픔과 분노로 점철 됐던 안드라스의 눈빛이 차츰 공허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바알은 너무나도 즐거운 표정으로 음미했다.

그리고 이 이벤트는 그리드가 아닌 유라를 위한 안배였다.

유라가 바알을 적대하고, 바알의 광신도 안드라스에게 추격당하고, 안드라스를 위기에 빠뜨린다는 조건을 모두 달성해야 비로소 발생하는 이벤트.

그리드가 없었다면 마지막 조건을 달성할 때까지 상당한 애를 먹었을 것이다.

유라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만악의 근원을 목격하였습니다.]

[세상이 겪어온 모든 다툼과 기근은 어쩌면 저 악마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당신의 과업은 바알의 처단일 것입니다.]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가 지옥 어딘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유라와 아모락트의 인연은 깊다.

과거, 아모락트는 유라에게 마족이 될 기회를 주었고 유라는 이를 거부함으로써 데빌 슬레이어로 전직한 바 있다.

이후로 아모락트와는 당연히 적이 됐다고 생각해왔는데....

바알의 새카만 시선이 유라를 훑는다.

-아직 무르익지 않았군. 너와의 재미는 뒤로 미뤄야겠지.

본래라면 여기서 끝났어야할 이벤트다.

바알은 현재의 유라에겐 큰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렴.

전대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를 도륙해 고기조각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바알 아닌가.

유라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모습조차 이미 죽여 없앤 바알의 입장에서 유라에게 흥미를 품는다는 건 사실 힘든 일이였다.

유라가 알렉스를 뛰어넘는 순간이 다가온다면 또 모를까.

-흐음....

바알이 훗날을 기약하며 물러나는 게 이번 이벤트의 종결이었다.

하지만 바알은 떠나지 않고 잠시 더 자리에 머물렀다.

여전히 쓰러진 채 꼼짝 못하는 그리드를 가만히 응시하던 놈이 이내 대소를 터뜨렸다.

-신이 될 자격을 갖추고도 인간에 머문 건가? 큭큭, 크하핫...! 너는, 너는 여전히 흥미롭구나.

따악!

바알이 피로 물든 것처럼 시뻘건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절규하는 듯한 형상의 영혼이 나타나 그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영혼을 움켜쥔 바알의 입 꼬리가 한없이 치켜져 올라간다.

-보아라. 끝내 내게 의지했던 네놈과 달리 저 녀석은 스스로 한계를 넘어섰구나. 어쩌면 네놈도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핫! 크하하하핫!!

미치도록 즐거워하는 바알의 폭소와 고통으로 덧칠 된 영혼의 절규가 뒤섞이며 그리드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그리드는 깨달았다.

신들의 속내는 아직 생각할 단계가 아니다.

당면한 주적(主敵)은 저놈, 바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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