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2권 - 10화
얼굴에 뜬 홍조와 그윽한 눈길이 도발적이다.
과도할 정도로 노출한 보라색 피부엔 윤기가 좔좔 흘렀고 엉덩이에 달린 꼬리는 요염하게 살랑거렸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척 선정적이라 눈 둘 곳을 찾기 힘들 정도.
꿀꺽, 서큐버스의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키던 그리드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 이 오빠 너무 잘생겼다~”
B급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싸구려 대사.
몸을 비비 꼬며 교태를 부리는 서큐버스의 모습이 그리드에게 아쉬움을 선사했다.
‘얼굴이 아깝네.’
서큐버스는 얼굴과 몸매로 먹고 사는 종족이다. 인간의 정기를 빼먹기 위해선 인간을 유혹해야했으니 당연히 아름다운 생김새를 자랑했다.
하지만 선정적인 옷차림과 행동 탓에 싸구려 창부처럼 보였고 그리드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졌다.
‘얘네 데리고 다니면 안 될 것 같은데.’
기껏 쌓아올린 이미지가 훼손될 것이다.
‘대한민국 초중고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뽑힌 내가 헐벗은 여자들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염려하는 그리드에게 유라가 말했다.
“420레벨 이하의 마물 중에서 서큐버스 이상으로 강력하고 다재다능한 마물은 없어요.”
단언하는 말투다.
지옥의 생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의 말을 그리드는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얘네 데리고 다니면 미국 래퍼처럼 보이지 않을까?”
“차별적인 발언이네요.... 서큐버스의 옷차림을 걱정하는 거라면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외투라도 입히면 해결 될 문제니까.”
“옷을 입히는 게 가능해?”
“능력치가 붙은 아이템은 입히지 못하지만 단순 코스프레용 아이템은 입힐 수 있죠.”
“아....”
냥멍이가 노에에게 선물해줬던 나비넥타이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
납득하는 그리드였지만 이내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옷을 입고도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나? 애초에 사람들을 유혹하려고 노출하고 다니는 걸 텐데.”
“서큐버스의 매혹 효과는 음기로 발동하는 거예요. 시각 효과는 부수적으로 도움을 주는 개념에 불과하고요. 그러니까 대상이 인간이든 마물이든 가리지 않고 매혹할 수 있는 거죠.”
“그렇군.”
음기를 차단하라고 했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쓸데없는 고민이 해결됐으니 이젠 거칠 게 없었다.
마침 서큐버스들이 그리드를 도발해왔다.
“오빠 고자야?”
“우리를 보고도 왜 아무런 반응이 없어?”
“음....”
그리드는 같잖은 도발을 무시하며 생각해보았다.
‘테이밍의 기본은....’
테이밍 대상을 개피로 만들어야한다. 죽기 직전까지 패놔야 고분고분해져서 테이밍 확률이 높아졌다.
이젠 상식이 된 정보를 그리드가 모를 리 없었다.
‘수준도 가늠할 겸 어디 한 번 싸워볼까.’
열망의 무아검을 뽑아 쥔 그리드가 앞으로 나서자 유라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도와드려야하는 거 아닙니까?”
붉은 피부의 악마 글런트가 우려를 표했다.
지옥.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를 지닌 이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신체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 숨쉬기조차 벅찰 것이었다.
하물며 서큐버스는 강하다.
한데 그리드 혼자서 상대하게 내버려둔다고?
‘악마 같은 여자.’
유라가 그리드를 일부러 사지로 떠미는 거라고 생각한 글런트가 짙은 미소를 그리는 순간이었다.
“제(制).”
쿠웅!!
“....!!”
유혹의 춤사위를 펼치며 그리드에게 점차 다가오던 서큐버스들과,
“....!!”
음흉하게 미소 짓던 글런트 모두 갑작스런 위압감에 압도당해 굳어버렸다.
‘뭐?’
글런트의 두 눈이 미칠 듯이 떨렸다.
육체에 부자유가 찾아온 까닭.
천 년을 살며 목격해온 대악마들 중에서도 단 10명의 대악마에게만 느꼈던 ‘격’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까드득,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움직인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세우고 있는 그리드를 괴물 보듯 쳐다봤다.
‘뭐, 뭐냐, 저놈은?’
인간이 저만한 격을 지닌다고?
대악마들을 긴장시켰던 알렉스조차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글런트가 큰 의문에 휩싸인 사이.
“파(派).”
허리를 기울이며 한 발 앞으로 내딛은 그리드가 서큐버스들의 틈으로 파고들어 검기를 방출했다.
그러자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서큐버스들의 몸이 난도질당하며 선혈이 비산했는데 현장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서큐버스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까닭.
후두둑, 얼굴에 튀기는 피를 개의치 않은 인간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서큐버스에게 재차 검을 휘둘렀다.
“연(聯).”
피핏-!
피피피피피피피피핏!!
섬전과도 같은 검술이었다.
수십 회의 검격이 단 한 호흡 동안 이뤄졌다.
거미줄 같은 검흔에 뒤덮인 서큐버스가 이내 눈을 뒤집더니 산산조각 나 재로 소멸해버렸다.
글런트가 확실했다.
‘저 인간도 전설임이 분명하다.’
지옥에서 능력이 떨어지고도 저만한 실력을 발휘한다는 점. 게다가 고위 대악마에 버금가는 격을 지녔다는 점.
저런 인간이 전설이 아닐 리가 없다.
‘어떤 전설이지?’
글런트의 성격은 무척 신중하다.
다른 악마들과 달리 호전성을 억누를 줄 알았고 항상 최선의 기회를 엿봤다.
그래서 수백 년 전 번헨열도 침공전에도 참전하지 않았다.
굳이 약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인계에 감림할 필요성을 그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여 파그마의 검무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리드의 정체를 특정 짓지 못했다.
애초에 그리드의 검무는 파그마의 검무와 너무 많이 다르기도 했다.
훨씬 더 효율적인데다가 마법까지 깃든 상태니까.
그리드는 당황하고 있었다.
‘왜 죽어?’
현재 그리드는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하락한 상태다.
버프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큐버스의 레벨은 415.
단일 검무 2개를 쓰면 딱 적당히 양념이 될 줄 알았는데 연의 모션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죽을 줄이야.
‘아.... 연이 너무 세지긴 했지.’
연격이 모조리 적중할 경우 살(殺)보다 훨씬 더 강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게 작금의 연이다.
신중해진 그리드가 여전히 굳어있는 다른 서큐버스에게 살을 날렸다.
“키야아아아악!!”
또 한 마리의 서큐버스가 죽었다.
‘다재다능한 대신 몸빵이 약한 건가.’
그리드가 더욱 신중해졌다. 이제 막 억압에서 벗어나 도망치기 시작하는 서큐버스 중 하나를 뒤쫓아 평타를 날렸다.
[크리티컬!]
[칭호 <한 방에 한 놈!> 효과로 치명타 데미지가 극대화됩니다.]
[대상이 사망하였습니다.]
“꺄아악!!”
‘이런 젠장. 다시.’
다급해진 그리드가 또 다른 서큐버스를 추격해 평타를 날렸다.
[크리티컬!]
[칭호 <한 방에 한 놈!> 효과로....]
[대상이 사망하였습니다.]
“.....”
크리티컬 확률이 너무 높아서 이대론 안 된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회수하고 곡괭이를 꺼냈다.
“히익! 저리 가! 저리 가라고!!”
검은 베기 위주의 무기인 반면 곡괭이는 대상을 찍는 도구다.
입장에 따라서 더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저 흉측한 도구에 두개골이 꿰뚫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한 서큐버스들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펄럭!
급기야 날개를 펼친 서큐버스들이 하늘로 떠올랐다. 현혹 마법과 비행이 모두 가능한 그들은 생존력이 매우 높은 종족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드도 비행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현혹 마법에 저항하며 하늘로 떠오른 그가 뇌광에 휩싸이며 가속했다.
푹!
“캬악!”
곡괭이에 등을 찍힌 또 한 마리의 서큐버스가 비명횡사했다.
후두둑, 후두둑....
주변엔 어느덧 피웅덩이가 가득했다.
마력의 장막을 펼쳐 하늘에서 떨어지는 핏물을 차단시킨 글런트가 중얼거렸다.
“뭐지.... 여태까진 없던 전설인가?”
굳이 곡괭이로 찍어 죽이다니.
대악마들에게 깊은 원한을 지녔던 데빌슬레이어 알렉스조차 저 정도로 잔혹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전설이라는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성향이 선(善)하기 때문.
한데 그리드는 악마가 봐도 잔혹하고 기괴했다.
타고난 살육마 같은 느낌이랄까.
태생 자체가 일반적인 전설과는 달랐다.
물론 오해였다.
지금 그리드는 서큐버스들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오히려 죽이지 않기 위해서 곡괭이를 꺼내들었을 뿐이다.
‘피곤하네.’
알렉스의 신속 장갑을 비롯해 스탯이나 공격속도 등을 올려주는 방어구, 액세서리까지 모두 벗어버린 그리드가 간신히 한 마리의 서큐버스를 개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몸 곳곳에 곡괭이에 찍힌 상처를 남긴 채 몸을 덜덜 떠는 서큐버스의 멱살을 이끌고 지상에 내려온 그리드가 곧바로 탐식의 룬을 개방시켰다.
“헬가오의 힘.”
화르륵.
그리드의 이마 양쪽에 뿔처럼 불길이 솟구쳤다.
“헉!?”
글런트와 서큐버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드로부터 지옥불의 주인 헬가오의 기운을 느낀 까닭.
‘어떻게 헬가오의 힘을?’
“지배.”
화르륵!!
불꽃의 뿔이 더욱 커지고, 날카로워진다.
그리드에게 멱살이 붙잡힌 채 벌벌 떠는 서큐버스의 시선과 그리드의 흉흉한 안광이 서로를 마주보았고, 그리드의 정기가 서큐버스에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동시에.
[<지배>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지옥 서큐버스>에게 당신의 정기를 먹이로 제공합니다.]
[<지옥 서큐버스>의 지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드가 그토록 바랐던 알림창이 떠올랐다.
한 번이 아니라 4번 연속으로.
[<지옥 서큐버스>의 지배에 성공하였습니다!]
[<지옥 서큐버스>의 지배에 성공하였습니다!]
[<지옥 서큐버스>의 지배에 성공하였습니다!]
“....?”
당황한 그리드가 주위를 둘러봤다.
상공에서 새로운 서큐버스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인간의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마냥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놈들 모두 생명력이 가득 차있었다.
한데 놈들 중 선두에 있던 3마리의 서큐버스가 지배의 영향을 받아 <그리드를 따르는>이라는 수식언을 갖게 됐다.
‘패야 됐던 거 아니야?’
일반적인 테이밍 스킬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
지배의 위력이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히끅....”
상처가 아픈지 울기 시작하는 서큐버스의 팅팅 부은 얼굴을 보고 죄책감마저 느끼는 그리드였다.
짝, 짝, 짝.
박수 친 글런트가 감탄하며 말했다.
“인간에게 한 수 배우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요. 오늘 본 당신의 모습은 악마보다도 사악했습니다. 필시 야탄 신께서도 당신을 총애하시겠죠. 저도 당신을 본받고 정진해야겠습니다.”
[천 년 악마 ‘글런트’와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과연 영우씨는 대단해요. 저도 아직 글런트의 호감을 사진 못했는데.”
“.....”
분명히 칭찬일 텐데 기분이 썩 좋진 않다.
고작 잠시의 전투로 피로감을 느낀 그리드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멀뚱멀뚱 서있는 서큐버스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다 일로 와봐.”
“네, 주인님.”
“무슨 일이든 시켜주세요. 후후훗....”
서큐버스들이 요염하게 다가와 몸을 밀착시켰지만 그리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서큐버스들은 그리드에게 감히 음기를 뿌리지 못했으니까.
“어....?”
서큐버스들의 상태창을 확인한 그리드가 두 눈을 부릅떴다.
<매혹> 스킬의 설명 때문이었다.
<매혹>
최대 8명의 대상을 매혹시켜서 노예로 부립니다.
“사팔 삼십이....”
냥멍이보다 더 많은 펫을 거느리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