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2권 - 08화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드의 서사시를 해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전대 전설과 당대 전설의 격차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니....』
사람들의 충격은 매우 컸다.
당대의 전설들이 전대의 전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대가 도래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
당연하다.
전대 전설들이 세운 위업은 말 그대로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혼자서 제9위 대악마 헬가오를 봉인시킨 뮐러의 업적이 대표적인 예다.
플레이어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영역인 셈이다.
한데 그리드의 서사시는 분명히 말했다.
전대와 당대의 구분은 사라졌다고.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놀랍습니다! 대단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이제야말로 Satisfy의 주체가 NPC에서 플레이어로 거듭나게 되었군요!!』
당대 전설의 숫자는 일곱.
그중 다섯이 플레이어다.
앞으로 그들 다섯은 세계관 최강자로써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터.
사람들은 앞으로 그들이 바꿔나갈 Satisfy에 큰 기대감을 품었다.
대악마가 출현할 때마다 겁에 질리는 일도, NPC들이 만든 답답한 규칙에 억압당하는 일도 이젠 지긋지긋했기에.
이제부터는 전설들이 평화를 지켜줄 것이며, 중세의 관념을 지닌 NPC가 아닌 플레이어가 주체가 된 Satisfy는 이전과 달리 훨씬 더 자유로워지리라.
아무래도 사람들은 전설들의 성장을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상황을 섣불리 기대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전대와 당대의 구분을 없앤 건 그리드입니다. 당대의 전설‘들’이 아니라 그리드 한 사람만 독보적으로 성장했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죠. 실제로 전설의 어쌔신과 궁성은 이제 막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전설이 완전한 성장을 이뤘다고 해석하는 건 순 억지입니다.』
『아직 세계는 대악마를 비롯한 온갖 재앙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며, 세계의 주체가 플레이어가 됐다고 자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대중이 기대하는 급격한 변화는 사실상 없겠죠. 괜한 기대는 금물입니다. 실망만 커질 것입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추구하는 것은 재미와 이윤이다.
그들은 자신의 활동무대를 위협하는 대악마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고 싫었다.
당대 전설들이 전대 전설들만큼 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대악마를 손쉽게 물리쳐줄 거라고 믿어서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비관적인 분석을 내놓자 여론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다.
각국 방송사의 진행자들이 시청자를 대변해서 반박했다.
『그리드 혼자나마 강해졌다면 그걸로 충분히 기대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그리드 혼자서도 대악마를 레이드하는 그림이 심심찮게 나올 것 같은데요?』
『뭐, 하위 대악마야 그리드 혼자서도 충분히 레이드하겠죠.』
『전대 전설 뮐러가 제9위 대악마 헬가오을 봉인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이젠 고위 대악마라고 해도 그리드의 상대가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예를 들면 얼마 전 그리드에게 패배를 안겼던 벨레드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하하하, 뮐러는 전설 중에서도 최강을 논했던 인물이고요. 뮐러 외의 그 누가 홀로 대악마를 봉인했답니까? 데빌슬레이어 알렉스조차 고위 대악마와 싸워 이겼다는 업적을 남기지 못한 마당에 그리드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거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여태껏 몇 번이나 상식을 깨부순 전력이 있....』
『물론 그리드는 대단하죠. 어쩌면 파그마보다 그리드가 더 강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만큼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 왔습니다. 정말로 존경스러울 지경이죠. 하지만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는 법입니다. 그리드는 슈퍼맨이 아니에요. 당신들의 기대가 그리드에게 큰 부담이 될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습니까? 애초에 대악마는 Satisfy에 절대 없어선 안 될 악역입니다. 플레이어가 응당 마주하고 극복해야하는 시련이죠. 그것을 마냥 타인이 해결해주길 바라는 심보부터가 글러 먹은 거 아닙니까?』
그리드는 강하다. 최고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듯 파그마의 후예라는 직업에도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드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은근히 독박을 씌우려는 심보가 괘씸하다.
몇 년 동안 그리드를 분석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드의 팬이 된 전문가들이 사람들을 힐난했다.
***
산들바람에 물결치는 초원과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시야를 확 트이게 만든다.
공기 맑은 여느 시골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놀랍게도 지옥이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지옥의 풍경과는 달리 인계와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지옥을 방문해본 경험이 있고, 그때 이 풍경을 목격했었다.
‘그때는 흑화가 풀리자마자 쫓겨났었지.’
평범한 인간은 지옥 출입이 불가능하다며 지옥에서 추방당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제9위 대악마도 알아보는> 당신을 지옥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적용되는 지옥의 억제력이 당신에겐 온전히 적용되지 않습니다.]
[현재 당신의 지옥 명성은 7,000입니다. 지옥에서 발생하는 페널티가 15퍼센트 감소합니다.]
[이곳은 지옥입니다. 인간이 밟아선 안 되는 땅입니다. 이 세계엔 인간을 지켜줄 그 어떤 호의도, 장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자원 회복 속도가 85퍼센트, 모든 치유 효과가 70퍼센트 감소하고 스태미나 하락 속도가 3배 빨라집니다. 신성 속성 계열의 스킬과 마법의 위력이 90퍼센트 감소하고 보호, 이동 관련 스킬과 마법의 위력과 발동확률이 50퍼센트 감소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하락합니다.]
“....”
몸이 무겁다.
알림창에 뜬 내용 외에도 별도의 페널티가 몸에 작용하는 느낌이었다.
‘과연 최종 사냥터라는 건가.’
결코 공략하지 못하게끔 만들겠다.
플레이어에게 엔딩을 볼 기회 자체를 제공하지 않겠다.
Satisfy를 평생토록 운영하겠다는 S.A그룹의 의지가 엿보이는 지옥의 위엄에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곁에 선 유라에게 물었다.
“여긴 몇 번째 지옥이야?”
“중립 지역이에요. 평범한 마족들이 살아가는 도시와 마을이 존재하는 땅이죠.”
“평범한 마족?”
마족이면 마족이지 평범한 마족은 또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문득,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어귀에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외눈박이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숨어버리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드가 옛 기억을 반추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도 마족들이 겁을 먹었었지....’
그리드가 처음 우연히 지옥을 방문했을 당시.
그 찰나 동안 마주쳤던 지옥의 주민들은 그리드를 괴물 보듯 했었다.
히익! 인간이다! 소리치던 그들의 비명소리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메아리쳤다.
“여러 인종이 있듯이 마족의 종족 또한 다양해요. 그중에서도 이곳 중립 지역에서 살아가는 마족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본능보단 이성을 중시하고 자신들만의 법규와 도덕성을 지키며 살아가죠.”
“마족이라고 해서 다 포악하고 야만적인 건 아닌 거였나.”
“네, 이들에게도 문화가 있어요. 인간처럼 화폐를 만들어서 시장을 구축하기도 했죠. 다만 지옥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인간과 똑같아요.”
“몬스터가 아니라 NPC로 분류되고?”
“네, 중립 마족들과의 관계는 경계, 중립, 우호 총 3단계로 나뉘는데 우호 관계를 쌓게 되면 각종 상점이나 숙소도 이용할 수 있게 되요. 다만 사용하는 화폐가 다르기 때문에 인계에선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이곳에선 무용지물이죠.”
“뭐? 가난뱅이에서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거야?”
“네.... 황금의 가치도 인정되지 않더라구요.”
대답하는 표정이 떨떠름한 걸 보니 유라도 꽤나 고생을 했던 것 같다.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하여튼 S.A 놈들.’
여태껏 노력해서 모은 화폐를 모조리 쓸모없게 만들다니.
사람을 개털로 만드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능력치 관련 페널티도 그렇고, 지옥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선 다시 초보자의 심정으로 시작해야할 것 같다.
‘한국 기업 아니랄까봐 사골 한 번 잘 우려내네.’
게임을 앞으로 수백 년은 더 운영하고 싶은 건가?
뭐, 완성도를 고려하면 영원토록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이런 게임, 두 번 다신 나오지 못할 테니까.
‘나야 좋지.’
그리드는 이미 많은 컨텐츠를 선점하고 독과점을 누리는 입장이다. Satisfy의 가치가 오래 보존될수록 그에겐 무조건 이득이었다.
“근데 대악마들은 이 구역을 왜 그대로 방치하는 거야?”
지옥은 총 33개로 나뉘어있고 모든 대악마는 스스로 군주임을 자처하고 있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때때로 분쟁을 일으킨다고 들었다.
주인 없는 중립 구역이 존재한다는 게 의외였다.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유라가 잘 모른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글쎄요. 대악마 사이에 어떤 불문율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내용이 정확히 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어요.”
“음....”
뭐, 중요한 일도 아닐 테지.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그대로 마을을 향해 걸어가자 유라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이 상태로 마을에 갔다간 주민들의 경계를 살 뿐이에요.”
“그럼 무시하고 지나가?”
“아니요. 인근의 마물을 처치하고 증거품을 확보하면 주민들의 경계심이 조금은 누그러질 거예요. 일단 마물을 사냥하고 마을로 가서 퀘스트를 몇 개 얻어가는 게 좋아요. 앞으로 지옥에서 활동하려면 마을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호감도는 꼭 쌓아놔야 하거든요.”
경험에서 우러나는 귀중한 조언이었다.
새겨들은 그리드가 발걸음을 옮기며 질문했다.
“마족과 마물은 한 편이 아닌 거야?”
“인간과 산짐승이 같은 지역에서 산다고 해서 꼭 동료는 아니잖아요?”
“아하, 이해했어.”
마족에게도 마물은 위협인 거구나.
물론 특정 마족은 마물과 가깝게 지낼 수도 있을 테고.
“서큐버스는 32번 지옥에 서식하는 몬스터에요. 32번 지옥을 방문하기 위해선 음기와 양기를 차단하는 향수를 뿌리는 게 좋고요. 우선 퀘스트를 받고 클리어해서 향수를 구하죠.”
“응.”
1렙짜리 뉴비한테 400레벨 하이랭커가 가이드로 붙은 셈이다.
지옥에서 몇 년을 활동하며 경험을 쌓아올린 유라 덕분에 그리드는 수월하게 마물을 찾아서 사냥하고 마을에서 퀘스트를 얻을 수 있었다.
유라가 겪었던 실패와 좌절들을 그리드는 모조리 피해가는 것이다.
제대로 된 버스였다.
거의 항상 버스 기사 노릇을 해왔던 그리드가 버스의 승객이 되어 편의를 누리는 건 정말로 오래간만이었다.
‘이래서 인맥이 중요하지.’
유라의 안내를 받아 헤매지 않고 32지옥에 도착한 그리드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갑자기 어두워진 풍경 중앙으로 용암처럼 들끓는 지옥불 강이 가로지르는 게 보인다. 진득한 수증기가 호흡을 조금씩 방해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면서 왠지 정신이 아찔해졌다.
“향수 뿌리세요.”
“응.”
칙칙.
그리드가 퀘스트를 깨고 얻었던 향수를 몸에 뿌렸다.
할아버지댁을 찾을 때면 맡을 수 있는 소똥 냄새가 몸에 번졌다.
썩 불쾌했지만 대신 호흡이 편해졌다. 상쾌할 지경.
“소똥 뿌린 느낌인데 왜 이렇게 상쾌하지?”
“음기를 차단한 거예요.”
“좋아. 그럼 가볼까.”
그리드가 노에와 템빨골들을 소환했다.
약해진 마당에 하나라도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늘어나면 좋은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지옥.
노에의 주무대다.
“냐아흥!”
평소의 귀여운 고양이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가 싶던 노에의 음성이 끝에 가서 굵어진다.
노에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