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2권 - 07화
“.....”
크라우젤과 예음의 대결은 예음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정작 예음의 표정은 어두웠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대궐로 돌아온 그녀가 눈 쌓인 소나무 앞에 멈춰 섰다.
뚝, 뚝 떨어지는 핏방울에 설원이 붉게 물든다.
‘기술에서 단 한 번의 우위도 점하지 못했어.’
전투를 복기하는 예음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모든 기술이 간파당하고 검 한 자루에 파훼 당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자신 또한 미르처럼 되고자 지난 수백 년을 연구하고, 단련해왔건만 어째서 백 년조차 살지 못한 인간에게....
‘차라리 초월자였다면.’
평범한 인간과 달리 영생을 누리는 초월자에게 기술에서 밀렸다면 납득이라도 됐을 것이다.
양반과 인간이라는 종의 차이가 뭐가 대수겠는가.
상대방 또한 수백 년을 연마한 이상 나보다 뛰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오늘 만난 인간은 초월자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도무지.... 도무지 모르겠어.’
인간의 검술을 분석하기 위해 떠올려보던 예음이 이내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그녀의 지식과 오성으로는 인간의 검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니 그려지지 않고, 그려지지 않으니 이치를 깨우치지 못한다.
노력이, 상식이, 세계가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조용히 서있는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인간을 해치는 건 슬픈 일이지.”
“미르....”
미르는 신이 되기 위해 태어난 양반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다.
탄생 후 고작 20년도 되지 않아 치우의 시련에 참가해 결코 깨어지지 않을 기록을 달성한 그는 양반들 사이에서도 신격화 된 존재였다.
그 콧대 높은 가람조차도 미르 앞에선 겸손해질 정도로 미르는 특별했다.
“고생했다.”
미르가 예음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전파되는 백호와 주작의 기운이 예음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
다른 양반들은 백호와 주작의 기운으로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는 게 고작인 반면 미르는 타인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지에 있는 것이다.
“미르, 지금 내가 우울한 이유는 인간을 해쳐서가 아니야.”
“허면?”
“기술과 수 싸움에서 졌어. 초월자도 아닌 인간에게. 그게 화나고 억울한 거야.”
물론 싸움에선 이겼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육체능력과 순보가 있었기에 쟁취할 수 있던 승리다.
“그런가.”
예음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눈치 챈 미르가 솔잎에 붙은 얼음을 떼어내며 말했다.
“억울하게 여기지 마라. 뛰어남과 부족함은 상대적인 법이니 늘 이길 순 없어. 설령 상대가 인간이라 하여도 양반보다 나을 수 있음을 가람과 다른 형제들이 죽음으로써 가르쳐주지 않았더냐.”
“응, 물론 알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예음이 갓을 매만졌다.
그녀에게 갓이란 언제라도 벗을 수 있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신격을 얻을 능력과 자격이 그녀에겐 충분했다.
그녀가 여전히 갓을 쓴 이유는 단지 치우의 시련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르의 곁에 있고 싶었으니까.
사실 예음은 자신이 양반 중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편에 속한다고 자부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상황을 더욱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도포와 몸 곳곳에 남은 검흔(劍痕)을 살펴본 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나빴을 뿐이다. 아직 네겐 검성의 검술을 이길 기술이 없으니.”
“....검성? 내가 검성이랑 싸웠던 거야?”
“그래, 새로운 검성이 전대의 비급을 찾고자 방문한 거였군.”
이방인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냈다.
상황을 파악하며 새하얀 목가를 더듬는 미르의 목에는 지우지 않은 검흔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를 통해 옛 기억을 떠올린 예음은 깨달았다.
운이 좋았음을.
당대의 검성이 지금이 아닌 수년 후에 이곳을 찾았고, 그때 자신이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면....
‘난 죽었을 거야.’
예음은 똑똑히 기억한다.
검 한 자루로 미르의 권능을 모조리 베어버리며 미르와 호각을 겨뤘던 괴물의 모습을.
뮐러.
오늘 내가 싸웠던 인간은 그의 검술과 정신을 계승하는 자였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의외다.
아직은 너무 약해 검성일 거라곤 꿈에도 몰랐었다.
예음의 마음이 급해졌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뮐러의 비급을 찾아내서 불태워야겠지?”
전설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검성의 잠재력은 가히 폭발적이다.
오늘 만났던 인간이 뮐러의 비급을 찾아내고 성장할 것을 생각하면 방관하고 싶지 않다.
두려움마저 느끼는 예음의 떨리는 등을 미르가 다독여주었다.
“아니, 놔둬라. 어차피 찾지도 못할뿐더러 검성과는 반드시 또 다시 겨뤄보고 싶었으니.”
검성과의 결투는 미르를 크게 발전시켰었다.
미르는 검성의 검술에 담긴 묘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그를 해석할 때마다 자신이 성장하는 걸 실시간으로 느꼈었다.
그는 또 한 번 같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 경험을 양분 삼아 기필코 무도의 극의를 엿보고 치우에게 안식을 선사하리라.
‘내가 새로운 무신이 되겠다.’
다짐한 미르가 새로운 검성을 응원한다.
‘하니 넌 기필코 뮐러의 비급을 찾아내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당신을 격려합니다.]
[비반에게 선물 받은 <드래곤 코트>가 한 순간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끓어오르는 피를 느낍니다.]
[모든 검술의 명중률과 위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이건 혹시.’
갑자기 발생하는 이벤트를 통해서 크라우젤은 어렴풋이 눈치 챘다.
이 순간 자신을 격려하는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뮐러가 ‘시련’이라고 표현했던 누군가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염원했던 죽음이 드디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뮐러는 우연히 방문했던 동방에서의 혈투를 떠올렸다.
즐거웠더랬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평생토록 검술을 연마해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뮐러는 그리움을 느꼈다.
다시 한 번 그자를 만나 검을 나누고 싶어졌더랬다.
하여 다음날 바로 가야로 떠난 뮐러는 이것이 미련임을 알았다.
미련을 버리지 않는 한 자신은 죽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발걸음을 돌린 그는 가야를 떠나기 전 한 권의 책을 써내려갔다.
언젠가 이곳에서 그자를 만나 시련을 겪게 될 어느 검사를 위해 자신의 시작이자 궁극이었던 비기를 족자에 담았다.
절대무적의 강자였던 뮐러가 미련을 품게 만들었던 인물.
“당신은 누구지?”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크라우젤이 질문했으나,
“.....”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앞으로 헬가오 레이드는 나도 무조건 참여할 것이다.
그러다 헬가오가 8번째 화석마저 소환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루비의 힘으로 헬가오를 완전히 소멸시키겠다.
그리드가 앞으로의 방침을 설명하자 폰은 새삼 헬가오가 얼마나 강한지 실감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 질문했다.
“근데 메르세데스랑 둘이서도 잡는 걸 굳이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서 잡을 필요가 있을까? 앞으로 그냥 계속 헬가오는 너 혼자서 잡는 게 어때?”
귀찮고 위험해서 떠넘기는 게 아니다.
“혼자 잡을 수 있는 보스는 무조건 혼자서 잡는 게 좋잖아.”
네임드 보스의 가치는 무척 높다.
훌륭한 아이템을 드롭하는 건 부차적인 보상에 불과했고 대량의 경험치를 준다는 게 관건이었다.
기왕이면 혼자 잡고 보상을 독식하는 편이 좋았다.
진심으로 그리드를 생각해서 말하는 폰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같이 잡아.”
이제 레벨이야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올린다.
깨달음 효과가 어디 장난인가.
카오스 산맥이나 귀선이 서식하는 저수지에 자리 잡고 사냥에 열중하면 일주일 단위로 레벨이 오를 것이었다.
지금의 그리드가 원하는 건 개인의 이득이 아닌 길드의 성장이다.
“아무래도 너네들을 좀 빡세게 굴려야할 것 같아.”
“아....”
난이도 높은 레이드를 지속적으로 체험시킴으로써 여러모로 성장시키려는 건가.
그리드의 의도를 눈치 챈 템빨단원들이 지레 겁먹은 표정을 짓는 반면 십공신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지존이 직접 나서서 단련시켜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등신 천치다.
‘기대된다.’
큰일이다.
당분간 잠을 제대로 못 잘 것 같다.
그리드에게 배우며 헬가오를 레이드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
십공신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지난 며칠 동안 그리드는 유라와 잦은 만남을 가졌다.
지옥에 한해서는 스틱세이보다 훨씬 더 많은 전문지식을 보유한 유라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게 많았기 때문이다.
지옥에서도 가장 좋은 사냥터는 어디인지, 지옥에서 꼭 필요한 소모품은 무엇인지, 반드시 숙지해야할 주의사항이나 별도의 꿀팁은 없는지 등등.
무엇보다 그리드가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건 마물의 종류와 특성이었다.
430레벨 전후의 마물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마물, 혹은 까다로운 능력을 지닌 마물이 무엇인지 그리드는 유라에게 아주 세세하게 캐물었다.
그리고 유라는 그 모든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해주었다.
과연 데빌슬레이어답게 레벨 차이가 많이 나는 마물도 손쉽게 잡아온 그녀는 최고의 마물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서큐버스가 가장 강하고 까다롭죠.”
대상을 매혹시키는 능력과 블링크를 활용하는 전투기술이 수준급이라고 한다.
특히 대상의 마법 저항력을 감소시키는 패시브 스킬의 활용도가 엄청나게 높아서 다수의 서큐버스가 한꺼번에 출현할 땐 유라도 피할 정도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전설도 저항 못한다라....’
마법 저항력 감소 패시브라.
확실히 탐나긴 한다.
‘그래, 서큐버스로 하자.’
서큐버스를 테이밍하겠다.
마음을 정한 그리드는 채비를 갖추는 며칠 동안 라인하르트에 머물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미처 생각 못했다.
서큐버스가 어떤 종족인지.
단체로 거느리고 다니기엔 다소 민망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제1지옥.
“사자(死者) 창조.”
지난날의 실패와 후회를 토대로 각성한 아그너스가 무적의 존재를 창조하고 있었다.
과거에의 집착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난 그의 금안엔 더 이상 광기가 없었다.
“슬슬 시작되는 건가.”
바알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어두운 대전에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