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2권 - 04화
[대상이 매우 바빠 귓속말을 확인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메시지와 함께 귓속말이 전송되지 않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대상이 던전 보스를 레이드 중일 때.
“제길, 벌써 시작해버렸군.”
라우엘은 그리드를 믿어보라고 했지만 폰은 영 불안했다.
폰도 당연히 그리드의 실력을 믿었다. 그리드가 최강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템빨단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엔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만약 헬가오가 7번째 화석을 손에 넣은 상태라면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감당하기 힘들 것이었다.
‘메르세데스보다 강해졌다고 해도 어렵다. 보스 구조상 2인 레이드가 불가능해.’
폰은 그리드에게 몇 가지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귓속말조차 되지 않자 초조했다. 결국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그의 곁으로 라우엘이 따라붙었다.
“지원 가시게요?”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를 죽게 놔둘 순 없잖아.”
헬가오가 등장과 함께 소환하는 불기둥은 화석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강해졌다. 6개의 화석을 갖고 나타났을 때부턴 던전 전체가 타들어간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피해 범위가 광범위해졌다.
더군다나 불기둥의 소환 위치는 매번 랜덤이다.
불기둥의 피해가 미치지 않는 지점을 찾는 방법은 순전히 운에 기대는 것뿐이며, 운 좋게 불기둥을 피해봤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이어 볼>에 노출되고 만다.
헬가오가 등장하는 순간 데미지를 입는 건 필연인 셈.
‘물론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는 화염 내성 저하 디버프를 저항하겠지만 그래도 안 돼.’
설령 화염 내성이 100퍼센트라고 해도 굉장히 아플 거다.
속성 내성이 100퍼센트라고 해서 속성 데미지가 아예 안 들어오는 건 아니니까.
모든 속성 공격에는 기본 데미지가 존재하기 때문.
방어력과 저항력이 데미지를 차감시키긴 하지만 헬가오의 화염속성 공격력은 정말이지 무지막지하다. 내성으로 차단하고 방어력과 저항력으로 차감해도 상상 이상의 데미지가 들어왔다.
심지어 헬가오의 모든 공격엔 일정량의 트루 데미지가 적용된다.
방어력과 저항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헬가오에게 한 번 데미지를 입기 시작하면 곧바로 지옥행이다.’
헬가오의 가장 무서운 패턴은 ‘레이드 참가 인원의 절반 이상이 생명력을 일정량 잃을 때마다’ 발생하는 마력의 촉수다.
5명의 대상에게 100퍼센트 트루 데미지를 입히고 무조건 치명타가 발생하며 필중하는 스킬 말이다.
‘생명력이 20퍼센트 떨어질 때마다 발동하는 그 스킬이 가장 위험해. 그러니까 무엇보다 피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생명력을 잃기 시작하면 악순환이 반복된다.
헬가오가 최초 등장할 때 입히는 데미지를 즉시 회복해야만 패턴에 견딜 수 있다.
물약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헬가오 레이드에는 반드시 힐러나 버퍼가 필요했다.
폰이 1팀을 소집하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템빨왕 그리드가 여덟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시가 발동했다.
그리고 서사시의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리드가 아닌 그리드의 기사 즉, 메르세데스가 지옥의 불길에 맞서고 있음을 서술했다. 그리드가 여태껏 혼자 짊어져온 짐을 그녀가 나눠 짊어졌음을 부연했다.
NPC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보다 수백, 수천 배 더 귀중하게 여기는 그리드가 메르세데스에게 의지한다고?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메르세데스를....?
그리드가 벅차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칫!”
복도 한가운데서 폰이 백마를 소환했다. 창을 내질러 유리창을 깨부수고 말 위에 올라타는 그에게 라우엘이 소리쳤다.
“스틱세이님을 찾아가세요. 워프 게이트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
서사시는 그리드의 족적이다.
그리드가 세우는 위업보단 그리드라는 인물 그 자체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번에 시스템은 동료에게 의지하기 시작한 그리드의 변화에 주목했다.
혼자의 한계를 잘 알기에 인류를 인도하는 등불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타인을 위태롭게 보았던.
그러므로 끝내 홀로 싸워왔던 그리드가 드디어 타인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
인류의 발전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세대의 교체를 암시하는 순간이었다.
신화가 될 서사에 기록함이 옳았다.
퍼펑! 퍼퍼퍼펑!!
머리 위로 방패를 세운 메르세데스가 비처럼 쏟아지는 불길을 막아내며 전진한다.
그리드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기사의 걸음을 쫓을 때마다 그를 억압했던 책임이 한 꺼풀씩 벗겨진다.]
“이쪽이에요!”
[온갖 불의와 위협에 앞장서 맞서겠다던 용기와,]
“이 방향에 흐르는 강은 가짜에요.”
[자신이 모두를 지키겠다던 결의가]
“지금이에요!”
[어리석은 아집이며 지독한 오만이었음을,]
“가소로운 놈들!!”
콰쾅! 쿠콰콰콰쾅!!
[그는 방패의 비호 속에서 실감했다.]
“천(天).”
[지옥의 불길을 물리치는 기사의 방패가 그의 검을 가속시켰다.]
“크으윽!! 강이여, 범람하라!!”
[새로운 서사시 효과로 파티 플레이 시 공격력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기사의 가호.”
[그가 보지 못하는 곳을 보는 기사의 시선이 그의 등을 지켰다.]
“뭣....! 네놈의 그 눈은 설마!!”
[새로운 서사시 효과로 파티 플레이 시 방어력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순보.”
“은익.”
[나무를 꿈꾸는 가지가 되어 세계를 지탱하고,]
[등불이 되어 인류를 이끌어온 그의 노력과 투쟁이]
“초연살파극.”
“은하 파동.”
[전대와 당대의 구분을 없앤다.]
“네놈들....! 전....설! 크아아아악!!”
[템빨왕 그리드가 서사시의 여덟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서사시의 영향으로 당대 모든 전설의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
[서사시의 여덟 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사시의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스킬 데미지에 대한 내성이 소폭 증가합니다.]
[무기 데미지에 대한 내성이 소폭 증가합니다.]
[<초월자의 피부>가 더욱 더 단단해집니다.]
[칭호 <전설의 주역>이 생성되었습니다.]
[당신의 기사 ‘메르세데스’가 당신을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신위 스탯이 1 올랐습니다.]
<초월자의 피부>Lv.2
패시브
*3,000 이하의 물리 데미지 일정 확률로 저항
초월자의 피부는 무척 질기고 단단합니다.
도검불침의 영역을 엿보는 과정입니다.
<전설의 주역>
다른 전설들을 선도하는 인물입니다.
전설 클래스와 파티 사냥 시, 파티원보다 더 많은 경험치를 얻습니다.
전설 클래스와 파티 사냥 시, 파티원보다 더 좋은 아이템을 획득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좋아.’
서사시는 큰 성장을 동반한다.
파티 사냥 시 공격력과 방어력이 상승한 걸로 모자라 스킬 데미지 내성과 무기 데미지 내성 증가, 초월자의 피부 강화, 그리고 칭호까지 얻은 그리드는 당장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질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환호할 여유가 없었다.
“전하!”
“순보!”
헬가오가 몸에 두른 불길의 기세가 훨씬 더 커졌다.
그리드와 메르세데스의 계속되는 맹공을 허용하고 생명력이 소진되면서 2페이즈에 돌입한 것이다.
새빨갛게 타들어가는 헬가오의 안광이 쥐새끼처럼 도망친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를 차례대로 훑는다.
“당대의 인간은 죄다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놀랍구나.”
낭패다.
말투를 보니 광분 직전까지 갔던 놈이 냉정을 되찾았다.
공격 명중률이 정상 수치로 회복됐다는 뜻이다.
“뮐러와 같은 시대를 살았어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대악마에게 칭찬 받아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었을까?
헬가오는 자신을 봉인한 뮐러를 언급하면서까지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를 극찬했다.
여유가 느껴졌다.
촤르륵!
여태껏 장식품마냥 쥐고 있던 지팡이를 선회시킨 헬가오가 자신의 주위로 수십 개의 역오각성을 생성시켰다.
“하지만 아직 너희는 젊지. 나를 봉인했던 건 말년의 뮐러였고.”
제9위 대악마.
헬가오는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도 매우 강한 존재지만 의외로 무력감에 익숙했다.
부술 수 없는 검, 막을 수 없는 검, 피할 수 없는 검을 체험해본 까닭이다.
불합리의 극치를 달리는 메르세데스의 혜안을 보고도 금세 냉정을 되찾은 이유다.
지난 수백 년.
영혼 상태로 지옥을 떠돌며 헬가오는 궁리를 거듭했다.
불합리에 대항하는 방법을 말이다.
그가 찾은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불합리엔 똑같은 불합리로 맞서는 것이었다.
콰륵! 콰르르르르륵!!
수십 개의 역오각성 위로 불길이 교차한다 싶더니 이내 활활 타오른다.
“아직 미완의 마법이다만, 존재 자체가 미완인 너희가 과연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
무려 그 뮐러를 죽이기 위해 만든 마법이다.
혜안으로 마법진의 정체를 엿본 메르세데스가 그리드를 밀쳐냈다.
“도망치세요!”
“뭐?”
그리드는 2페이즈에 돌입할 때까지 제대로 된 타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메르세데스가 혜안으로 예측해주면 즉시 반응할 수 있는 민첩성이 있는 덕분이었다.
비록 메르세데스는 지속적인 데미지를 입긴 했지만 그건 탱커 포지션을 맡은지라 어쩔 수 없는 부분.
그녀조차도 경미한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두 사람 모두 생명력이 90퍼센트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
이렇게 멀쩡한데 다짜고짜 도망치라고?
‘저 마법이 뭔데?’
새카만 화염을 생성하고, 응축하기를 반복하는 33개의 마법진.
끽해야 ‘전 방위’ 폭격이 가능해 보인다.
“둘이 같이 막으면 충분히....”
“불가능합니다. 유도 마법을 귀속한 상태로 가속 마법을 무한 중첩시키고 있어요.”
“뭐....?”
그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순간이었다.
“너희들을 상대론 이쯤이면 되겠지.”
산양 대가리에 커다란 미소가 걸렸고,
━━
누군가가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일대에 고요가 도래했다.
마법진에서 이글이글 불타던 화염들이 불시에 종적을 감췄다.
“....!”
메르세데스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뭐라고 외치려는지 입을 벌리며 그리드를 감싸 안으려고 했다.
그녀의 커다란 방패가 가리는 건 오직 그리드의 육신이었다.
자신의 몸조차 방패로 삼아 그리드에게 바치는 그녀였다.
멈춘 세상 속에서,
[당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드의 모든 감각이 쭈뼛 섰다.
‘초월자가 보는 세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종적을 감췄던 33개의 불꽃이 보인다.
메르세데스와 나의 급소들을 포악하게 노리며 다가온다.
살랑.
바로 곁에 다가오고 있는 메르세데스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어떤 형태로 움직이는지 죄다 보인다.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표정이 안타깝다.
‘괜찮다.’
네가 나를 지키는 게 당연하듯, 내가 너를 지키는 것 또한 당연하므로.
그리드의 손등이 메르세데스의 눈가를 훔친다.
“화회(花回).”
33개의 불꽃을 모조리 시야에 담은 그리드가 검기의 꽃잎을 흩뿌렸고,
펄럭━!
메르세데스의 시야에 그리드 대신 그리드의 붉은 망토가 스쳐갈 무렵엔 이미.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헬가오가 마법의 폭격을 당하고 있었다.
“....!!”
“....?”
경악하는 메르세데스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인지하지 못하는 대악마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쿠우우웅!!
맥없이 쓰러진 헬가오가 불길 사이에 나부끼는 푸른 꽃잎들을 보았다.
꽃잎마다 수백 년 전의 악몽이 투영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