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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16화 (1,206/1,794)

템빨 62권 - 03화

미간으로 꽂혀오던 검이 갑자기 낫처럼 휘어 쇄골을 찍는다.

당황할 법도 하건만, 크라우젤은 침착하게 칼집을 세워서 막아냈다. 연검의 형태를 봤을 때부터 변칙적인 공격을 예상했으니 대응하기 쉬웠다.

쩌엉!!

칼집에 가로막힌 연검이 반탄력에 물결치며 튕겨나갔고,

스릉━

크라우젤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동시에 칼집을 한 바퀴 돌려 역수로 쥔 뒤 그대로 밀어 넣었다.

“....어머?”

양반 예음의 맑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검이 인간의 칼집에 결착된 까닭이다.

황급히 검을 회수하는 그녀의 허리를 크라우젤의 검이 크게 베었다. 깊숙이 파고든 공격이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평타는 무의미한가.’

평타로는 딜이 안 들어간다.

예음의 방어력을 가늠한 그가 발을 올려찼다.

뻐엉!!

자진모리.

초근접 상태에서도 시전 가능한 발차기다.

간격의 개념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것은 ‘차징’ 효과를 발휘했다.

촤르르르륵!!

지면에 발을 붙인 채 몇 미터나 뒤로 밀려난 예음이 곧바로 돌격태세를 갖췄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이미 저 멀리 도망치는 인간의 뒷모습이 보였다.

보통은 놓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예음은 양반이다.

반신인 그녀 앞에서 거리의 개념은 큰 의미가 없었다.

“순보.”

스팟!

예음의 몸이 수십 미터 전방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리고 금나수를 펼쳐 인간의 장포를 낚아채는 그때였다.

촤르르르륵!!

날카로운 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면서 예음의 백옥 같은 손을 난도질했다.

무형지기의 발현이었다.

‘심(心)을 깨우쳤구나.’

절대다수의 양반은 무형지기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형지기란 타고난 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가람조차도 무형지기를 양반의 권능쯤으로 인식했었다.

하지만 예음은 심과 무형지기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타고난 힘에 안주하지 않고 미르 곁에서 무도를 연구해온 결과다.

텅!

터터터터터터터텅!!

예음이 맞수를 뒀다. 크라우젤의 무형지기에 무형지기로 응수했다.

보이지 않는 타격이 보이지 않는 검기와 맞부딪치며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크라우젤과 예음의 공방은 계속됐다.

권, 각, 장, 검을 모두 아우르는 예음의 기술은 다채롭고 복잡했다.

잔상을 남기며 쏟아지는 그녀의 온갖 공격은 마치 공작새의 꼬리처럼 화려했고 크라우젤은 막아내기 급급할 따름이었다.

그래, 어떻게든 막아냈다.

예음이 크게 감탄했다.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다.

초월의 격조차 쌓지 못한.

한데 심(心)과 기(技)가 예사롭지 않았다. 기 중에서도 특히 검술의 경지가 놀라울 정도였다.

‘검술만큼은 미르와 비슷한 수준.... 아니, 어쩌면 조금 더 뛰어날 수도.’

양반 중에서도 최강인 미르와 비견되는 검술을 구사하는 인간이라니.

만약 이자가 초월의 격을 쌓고 체(體)까지 완성시키면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지 않을까?

“대단하네.”

인간이 펼친 검막에 모든 투로가 가로막힌 예음이 어쩔 수 없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호흡을 고르는 인간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품고 질문했다.

“초월자도 아니면서 무슨 수로 허초를 구분하는 거니? 단지 눈이 좋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닐 텐데 말이야.”

“.....”

크라우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눈길이 향하는 방향, 상대방이 자각하지 못하는 습관 등을 읽고 공격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거라고 일일이 설명해줄 이유가 그에겐 없었다.

‘상황이 안 좋다.’

크라우젤은 가야에 도착한지 고작 이틀밖에 안 됐다.

한데 벌써 양반과 조우했다.

단지 운이 나빴다고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정보를 모으려고 주민들과 대화를 나눴던 게 화근이었나.’

뮐러의 비급이 묻혀있다는 폭포.

단서라고는 ‘볕이 듣지 않는 장소’라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라우젤은 주민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던 중 뒤를 밟혀 눈앞의 양반과 마주친 것이다.

이게 단순한 우연일 가능성은 공교롭게도 매우 낮았다.

‘내 생각이 짧았군.’

양반들은 외부인(그리드)에게 주작과 현무를 잃고 동료까지 살해당한 상태다. 제아무리 오만한 그들이라도 경각심을 품었을 터. 백호와 청룡만큼은 기필코 지키고자 철저히 방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가야와 파국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정도로 말이다.

‘이곳에서 NPC와 교류할 생각은 접어야겠는걸.’

철저히 혼자서, 은밀하게 활동해야한다.

퀘스트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셈이지만 크라우젤은 괘념치 않았다. 미궁에 빠진 사건을 홀로 밝혀내고 해결해온 경험이 그에겐 무수히 많았으니까.

지금의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눈앞의 양반을 따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따돌릴 수 있을까?

상대방의 수준이 너무 높다.

예음.

웃는 낯에 태도도 나긋나긋하지만 손속엔 자비가 없다. 적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줄 안다. 다른 양반들과 달리 오만하지 않아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실력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갓 쓴 양반의 실력조차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과거, 크라우젤은 그리드에게 양반의 위험성을 경고해줬었다.

당시에는 양반들 사이에도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판게아에서 목격한 가람 등 3명을 양반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이젠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많은 퀘스트를 진행하며 양반의 정보를 수집했다.

치우의 시험을 상위 성적으로 합격한 7명의 양반만이 갓을 벗을 수 있으며, 그들이야말로 진짜 강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데 예음은 갓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 이상의 실력을 보유했다.

그나마 약하다는 갓 쓴 양반조차 이 정도라니....

양반을 몇 명이나 살해한 그리드가 새삼 대단하게 다가왔다.

‘격차가 더 벌어졌나.’

그리드와의 실력 차이를 실감한 크라우젤의 심장이 두근 뛰었다.

언젠간 다시 그리드와 멋진 승부를 겨뤄보겠다는 목표를 상기하자 온 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애써 억눌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리드와의 승부에 집착했다간 뮐러의 비급을 펼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필패하겠지.’

타인의 힘까지 빌려놓고 지는 건 절대 사절이다.

그리드를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다.

작년 국대전에 참가하지 않은 그리드를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드와의 재승부를 단기적인 목표로 설정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지금의 나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게임은 재밌게. 즐겁게. 길게.’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크라우젤에게 예음이 말했다.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네. 굳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 내가 너를 습격한 이유도, 네가 나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도 생각해봤자 넌 끝까지 이해 못할 테니까.”

“관심도 없다.”

그리드를 떠올리던 와중에 예음이 끼어들자 하찮게 느끼는 크라우젤이었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예음이 이내 실소했다.

“겁에 질려 정신을 놓았구나.”

쩌엉!

예음이 연검에 기를 불어넣어 단단하게 세웠다.

연검의 변칙성이 통용되지 않는 상대이니 강검으로 찍어 누르는 편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요즘 윗분들이 좀 예민해. 이곳에서 외부인이 활동하는 건 금지니까 죽어줘.”

‘아무래도 퇴로가 없군.’

예음이 굳이 이 장소를 선택해서 나타난 이유가 쉬이 납득될 정도로 사방이 꽉 막혔다.

애초에 순보가 문제다.

뿌리치기 힘들다.

주위를 재차 살펴본 뒤 퇴각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크라우젤이 기수식을 취했다.

‘반 피 정돈 뺄 수 있을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인해봐야겠군.’

“....!?”

“우주 검.”

콰르르르르릉!!

검성의 검이 태산을 갈랐고 반신은 경의를 표했다.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요동치는 숲에서 날아오른 새들이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다.

***

[지옥불의 주인 헬가오가 출현합니다.]

[헬가오의 포효로 인해 공포, 혼란, 쇠약 효과가 적용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헬가오의 열기로 인해 화염 저항력이 50퍼센트 하락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많은 힘을 되찾은 헬가오가 권능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대에 지옥불 강이 소환됩니다.]

[지옥불 강의 영향으로 생명력 회복 효과가 절반으로 감소하고 지속적인 화상 데미지를 입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지옥불 강이 흐르는 동안 헬가오의 능력치가 크게 상승합니다.]

[솟아오른 불기둥이 당신을 덮칩니다.]

헬가오가 출현함과 동시에 던전을 가로지르는 불의 강이 생성됐고,

“....!”

7개의 화석으로부터 솟아오른 불기둥이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를 덮쳤다.

화석의 생성 위치가 워낙 제각각이었던 탓에 사방팔방에서 불길이 덮쳐오는 느낌이었다.

섣불리 퇴로를 찾지 못하는 그리드에게 메르세데스가 소리쳤다.

“이쪽으로 오세요!”

“....!?”

제자리에 서서 외치는 메르세데스였다.

그리드는 그녀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신뢰했기에 일단 몸을 날렸다.

쿠와아아아아앙!!

역오각성을 그린 불줄기가 던전을 활활 불태웠다.

하지만 불길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일부 존재했고, 그리드와 메르세데스가 선 지점이 그중 하나였다.

“와우.”

감탄하는 그리드의 얼굴을 푸른 머리카락이 스친다.

섬광처럼 움직인 메르세데스가 허공을 향해서 방패를 세우고 있었다.

쩌어어엉!!

메테오 스트라이크.

브라함의 메테오를 목도하기 전까진 최강의 마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불길이 미치지 않는 지점마다 떨어져내렸다. 메르세데스의 방패가 그중 하나를 막아낸 것이다.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이게 혜안의 위력인가.’

보스의 공격 패턴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공략하다니, 과연 신조차도 경계할만한 힘이다.

예뻐 죽겠다는 시선을 보내는 그리드에게 메르세데스가 말했다.

“강에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게.”

초월자의 감각도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지옥불 강의 ‘열기’가 일으키는 화상 데미지와 회복 감소 효과는 저항이 가능했지만 지옥불 강에 직접적으로 몸이 닿게 되면 그대로 살과 뼈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헬가오가 완전히 힘을 회복하면 저 강물처럼 강력한 화염을 쏘는 건가?’

헬가오의 이명이 ‘지옥불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때였다.

“네놈들 뭐냐?”

불길 너머에서 헬가오의 음성이 들려왔다.

“뭔데 멀쩡하지?”

인계를 제집처럼 드나들다 보니 인간과의 대화에 매우 익숙해진 헬가오였다. 몇 년 전 그리드와 싸웠을 때보다 말이 많아졌다. 이질감의 정체를 알기 위해 바로 질문을 꺼낼 정도로 말이다.

“네놈들.... 전대의 전설인가?”

헬가오는 인간들에게 몇 번이나 토벌당하는 수모를 겪은 끝에 상당량의 힘을 되찾았다. 비록 육신은 마물의 것을 빌렸을 뿐이지만 마력만큼은 전성기의 절반 가까이 도달한 상태였다.

헬가오는 이번 강림 기간 동안 살육의 축제를 벌일 예정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에게 수모를 안겼던 인간들의 수준으론 작금의 자신을 결코 감당할 수 없다고 확신했었다.

한데 뭐란 말인가.

당대의 인간들은 보여주지 못했던 실력을 갖춘 저 두 인간의 정체는?

내심 당황하던 헬가오가 문득 그리드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

“네놈! 설마 그때 그놈인가!!”

[지옥불의 주인 헬가오가 당신을 알아봅니다.]

[칭호 <제9위 대악마도 알아보는>을 획득하였습니다.]

<제9위 대악마도 알아보는>

지옥의 유명 인사입니다.

지옥 명성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지옥 명성을 쌓을수록 지옥에서 겪는 페널티가 감소합니다.

[당신이 토벌한 대악마가 다수 존재합니다.]

[화려한 전적의 영향으로 5,000의 명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페널티가 10퍼센트 감소합니다.]

“선물부터 주는 거 보니까 나름 반가운가보네.”

이게 웬 떡인가 싶다.

Satisfy 최고의 사냥터라고 단언할 수 있는 지옥에서의 활동이 보장되다니 말이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리드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헬가오가 급기야 대소를 터뜨렸다.

“큭큭....! 크하하하핫!! 암! 반갑고 말고! 정말로 반갑구나!! 네놈에게 복수할 날만을 꿈꿔왔거늘! 야탄 신께서 드디어 나의 바람을 들어주셨구나!!”

검성도 아닌 ‘광부 겸 검사’들과 싸워서 졌던 경험은 헬가오 일생의 가장 큰 치욕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헬가오가 부지런히 인계에 강림했던 이유는 사실 그날의 원수를 갚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헬가오는 진심으로 기뻤다.

“운 좋게나마 나를 쓰러뜨린 인간답게 과연 강해졌구나! 쓰러뜨릴 보람이 있겠어! 크하하하핫!!”

“....뭔가 엄청 수다스러워졌는데.”

여태껏 보아온 대악마 중에 가장 가벼운 느낌이다.

하지만 발산하는 힘만큼은 굉장했으니.

초월자의 감각이 끊임없이 보내오는 경고 때문에라도 그리드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자, 메르세데스.”

“따르겠습니다.”

“....네가 앞장 서줄래?”

혜안의 진가를 목격한 그리드가 메르세데스에게 철저히 의지했다.

최초였다.

목숨이 유한한 이를 ‘지켜야할 대상’이 아닌 ‘의지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은.

[템빨왕 그리드가 여덟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치솟는 불길 너머에서 포효하는 거악(巨惡)과의 대치로부터 비롯합니다.]

“기꺼이.”

[악마의 욕망으로 들끓는 용광로를 그의 기사가 앞장 서 걷는다.]

[한 걸음. 지옥의 불길을 충심으로 견디고,]

[두 걸음. 사악한 마기에 절의로 맞서는 그녀의 등이 여태껏 그 홀로 짊어져온 짐을 나누어 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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