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2권
=======================================
템빨 62권 - 01화
수십 개 학부를 둘러본 그리드가 건진 인재는 총 11명에 그쳤다. 그마저도 대기만성형 인재는 베델 1명이 유일했고 나머지 10명은 그저 그랬다. 각 분야에서 탑클래스까진 도달하지 못할 수준? 물론 그들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모든 사람이 최고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마법부에서 한 명도 못 건진 게 뼈아프지만 뭐.... 나쁘진 않아.’
그리드가 아쉬움을 달랬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충분히 큰 수확을 거뒀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템빨아카데미는 명문이 아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선별해서 입학시킨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심지어 글자를 읽지 못했던 까막눈조차 받아들여 기초부터 교육시켰다.
애초에 재능 있는 사람들은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각 분야의 실력자들에게 따로 찾아가 제자가 되고 고등 교육을 받는다.
이곳에서 그리드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인재가 11명이나 탄생했다는 건 실로 놀랍고 감사해야할 기적이었다.
“음.”
대강당.
평소 정령부가 실습 때 이용하는 장소이자 오늘 졸업식이 진행될 장소이다. 그곳에 시간을 맞춰서 도착한 그리드가 템빨왕관을 똑바로 고쳐 쓰고 군주의 망토를 몸에 둘렀다. 그리고 후로이가 정성들여 써준 연설문을 머릿속으로 다시 되뇌며 강당의 문을 열었다.
장내에는 족히 천 명의 인파가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드에게 향했다.
“그 옛날 타락한 교황을 징벌하여 본교를 위기로부터 구원하시고.”
“최초의 성검의 봉인을 풀어 본교의 권위를 되찾아주신.”
“수천만 레베카교인의 은인이며, 데미안 교황의 벗이고, 레베카 여신의 총애를 받는 템빨왕 그리드 전하를 뵙습니다.”
다소 들떠있던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오늘의 행사를 빛내주기 위해 참석한 레베카교의 사절단이 그리드가 나타나자마자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 게 아닌가. 마치 신께 기도를 올리는 광경과 닮아있었다.
사절단 중에는 명성 높은 레베카의 딸 이사벨도 있었는데 제국의 황제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녀가 그리드 앞에선 한없이 공손하고 경건했다.
“우와아....”
오직 여신에게만 충성하는 신의 사자를 무릎 꿇게 만들다니.
자신들의 왕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새삼 실감한 졸업생들이 눈을 빛내는 와중에 수인족 사절단과 어스름족 오크의 사절단이 서로 경쟁하듯 크게 외쳤다.
“세이렌의 구원자에게 축복을!!”
“최강의 전사에게 경외를!!”
쩌렁쩌렁!!
방음 마법이 무색하게도 밖으로 외침이 새어나갈 기세다.
돌덩이 같은 피부와 큰 키.
골렘을 연상시키는 두 종족의 전사들이 졸업생들을 압도했다. 그들의 단단한 근육에 새겨진 온갖 형태의 상처들을 엿본 졸업생들은 그들이 전장을 지배해온 역전의 용사들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한데 그들조차도 그리드 앞에선 순한 양이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크 왕국의 공작 켈파토가 대영웅 그리드 전하를 뵙습니다.”
무려 공작.
일국을 대표하는 권력가도 그리드 앞에선 한없이 겸손했다.
그리드 혼자서 13위 대악마 벨레드와 맞서 싸워 아크 왕국을 지켜냈다는 소문이 전혀 과장 없는 진실임이 증명되는 광경이었다.
그 외에도 한속봉 부녀를 비롯한 동대륙 출신 인물들과 울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이 묵묵히 그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드가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키가 낮아진다고 보면 됐다.
졸업생들은 더 이상 놀랄 일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다행이 늦지 않았나보군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템빨왕 전하.”
불사왕 그렌할.
제국의 공작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로, 다른 모든 국가의 왕들을 고개 숙이게 만든다는 절대 권력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뒤늦게 현장을 찾아와 그리드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졸업생들은 물론이고 템빨국의 고위 관계자들까지 놀라서 입을 뜨악하고 벌렸다.
그리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진즉부터 얼떨떨한 상태였다.
‘아니 무슨 아카데미 졸업식에 이런 거물들이 찾아오는 거야?’
수 년 전 건국식보다 귀빈들의 면면이 화려할 지경이니 황당하다.
라우엘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게 지난 수 년 동안 당신께서 이루신 업적입니다.’
라우엘이 매일 업무에 치이면서도 그리드에게 불만을 품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세월 동안 그리드는 시간을 허투루 보냈던 적이 없다. 그가 왕좌를 비울 때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전 세계를 떠돌며 활약해온 그리드 덕분에 템빨국의 위상이 드높아진 것이다.
“번헨 열도를 정화하신 영웅왕 그리드 전하께서 단상에 오르십니다.”
사태를 재미있게 지켜보던 스틱세이까지 합세해서 그리드의 지난 업적을 칭송했다.
그 탓에 더욱 더 민망해진 그리드였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어찌 동요를 보이겠는가.
자신은 왕이다. 저들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상기하며 단상에 오른 그리드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 7년 동안 고생이 많았다.”
스틱세이가 설치해놓은 확성마법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의 목소리는 넓은 강당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굵고 차분한 음성엔 사람을 집중시키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졸업생은 물론이고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참석한 귀빈들까지 엄숙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앞으로 사회로 나갈 그대들은 새로운 실패와 좌절을 매 순간 겪게 되겠지.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카데미에서 겪었던 7년의 세월을 떠올리며 버티고, 극복해라.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외면하는 순간 패배자가 되는 것이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해야할 것이다. 오늘날 그대들이 쟁취한 졸업이라는 영광처럼 새로운 영광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라.”
후로이가 써준 연설문은 그리드도 공감 되는 부분이 많았다.
사람은 누구나 시련을 겪는다. 그 시련을 견뎌내는 사람만이 영광을 차지하고 성공하는 것이다.
그리드가 그랬다.
그 사실을 이 자리의 귀빈들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졸업생들도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뜨거운 시선으로 그리드를 바라보았다.
***
‘놀랍군....’
내란과 전란을 겪고 황제가 바뀐 제국의 속사정은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특히 고위 귀족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어 불사왕 그렌할의 책임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해진 상태였다.
하루하루가 바쁜 와중에 그가 타국의 행사, 심지어 일개 아카데미 졸업식에 불과한 행사에 참석한 이유는 간단했다.
‘만인에게 평등하게 실시한 교육’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렌할이 조사하기로 템빨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하나 같이 평범한 재능을 지녔었는데 오늘 당장부터 현역으로 뛰어도 좋을만한 졸업생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신분보단 재능.’
이는 역대 황제들의 말씀이셨고,
‘재능보단 열정.’
이는 오늘 그렌할이 느낀 감상이었다.
그렌할은 평등한 배움의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실감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인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당장 내 영지에 있는 아카데미부터 백성들에게 개방해야겠군.’
물론 막대한 자원이 소모되겠지만 인색해선 안 되리라.
“제가 어릴 때부터 대현자 스틱세이님의 명성을 듣고 자랐는데 실제로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졸업생들의 면면이 훌륭하니 뿌듯하시겠습니다.”
졸업장을 들고 아카데미를 떠나는 학생들의 모습이 둥지를 떠나는 새를 떠올리게 했다. 앞으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졸업생들을 축복하던 스틱세이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미소 지었다.
“제가 뭘 한 게 있겠습니까. 그저 나라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겸손하기까지.
대현자 스틱세이의 실체가 천 년을 산 하이엘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렌할은 스틱세이가 꼬장꼬장한 학자들과 닮았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인자한 미소가 어울리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의외였다. 절로 더 큰 호감이 생겼다.
“언제 시간이 되실 때 제국에도 한 번 방문해주십시오. 제국 신민들은 물론이고 황제폐하께서도 대현자님의 방문을 환영하고 예를 다해 모실 것입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템빨국의 백성인 신분으로 어찌 함부로 황제폐하를 알현하겠습니까.”
“허허....”
이런 식으로 선을 그을 줄이야.
스틱세이가 자신을 템빨국의 백성이라고 말하자 놀란 그렌할이 잠시 말문을 닫았다.
많은 황제들이 재상, 혹은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청할 때마다 거절하고 자유를 향유했던 스틱세이가 설마 한 나라에 정착하게 될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렌할의 인식 속에서 그리드라는 인물이 더 큰 거인으로 거듭나는 그때였다.
“스틱세이!”
졸업생들과 귀빈들이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돌아온 그리드가 다급히 스틱세이를 찾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정령부 학생들요. 다들 정말 엄청나던데?”
흥분해서 떠드는 그리드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졸업식에서 보여줬던 위엄을 내려놓은 그는 보다 순수에 가까웠다.
그렌할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렌할은 그리드의 이런 평소 모습에도 큰 호감을 느꼈다.
“제 감상도 같습니다. 당장 현역으로 뛰어도 손색이 없겠더군요.”
그렌할 또한 높은 안목을 지닌 인물이다. 정령부 졸업생 31명 전원이 굉장한 실력을 쌓았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보고 감탄했었다.
스틱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정령과 계약하고 정령마법까지 습득했으니 훌륭하게 제몫을 해낼 수 있는 아이들이죠. 그들에겐 이미 템빨정령사단의 기틀이 되어달라고 부탁해놨습니다.”
“템빨정령사단?”
“편의상 만든 가명입니다. 전하의 작법과 취향을 고려해서 지은 이름인데 마음에 안 드시면 새로 명명하시죠.”
“바꿀 필요 없습니다. 너무 마음에 드는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라우엘이 거품을 물고 떠들었지만 무시하는 그리드였다.
그리드는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정령부 졸업생은 31명에 불과했지만 그들 전원이 <인재 탐색>에 걸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다. 스틱세이가 도대체 어떤 요술을 부렸기에 학생 전부를 그렇게 훌륭하게 육성한 건지 놀랍고 궁금할 따름이었다.
“제게 어떤 비법이 있던 게 아니라 당연한 결과입니다. 애초에 정령술은 정령과 감응하는 사람만 익힐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런 사람을 찾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7년 동안 정령부에 지원한 사람이 수만 명인데 그중 정령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59명에 불과했죠. 그중 31명이 올해 졸업한 거고요.”
“그렇군.... 재능을 탈 수밖에 없는 분야인 거군요.”
납득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자코 듣고 있던 그렌할이 조심스레 부연했다.
“정령과 감응한다고 해서 모두가 정령술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제국에서도 정령술사를 육성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매해 한두 명의 정령술사를 배출하는 게 고작이니. 스틱세이님께서 가르치시는 능력이 워낙 탁월하신 게지요.”
“과연 스틱세이....”
스틱세이의 실력을 새삼 깨닫는 그리드였다. 호감과 존경이 가득 담긴 눈으로 스틱세이를 바라보던 그가 문득 용건을 꺼냈다.
“회포를 나누고 싶지만 일정이 있어서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스틱세이, 메르세데스와 저를 코크로 섬으로 보내주세요.”
“.....”
오늘도 텔셔틀의 역할에 충실한 스틱세이였다.
두 사람을 멀리 떨어진 섬으로 보내느라 대량의 마나를 소모하고 숨을 헐떡이는 그를 교수들이 부축했다.
“이번에 만든 워프게이트로 안내해드리지 그러셨습니까?”
‘워프게이트?’
특정 지역과 지역을 왕복하게 해주는 마도구.
고대의 마도시대에나 존재했다는 그것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고?
경악하는 그렌할의 낌새를 읽은 스틱세이가 손사래 쳤다.
“그리 놀라실 거 없습니다. 아직 국내 일부 지역에만 적용되는 시험작에 불과하고 완성도가 무척 떨어지니까.”
“코크로 섬에 설치한 워프게이트는 정상 가동되지 않습니까?”
스틱세이는 우선 코크로 섬처럼 본토와 멀리 떨어진 장소에 워프게이트를 설치했는데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교수들은 스틱세이가 자신의 업적을 그리드에게 언제쯤 알릴지 궁금했는데 오늘도 끝내 비밀로 하자 아쉬웠다.
스틱세이는 단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워프게이트의 상용화에 성공하면 그리드가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을까봐 두렵다, 라는 말을 차마 사람들 앞에서 꺼내지 못했다.
그리드 덕분에 목숨을 구원받고 번헨 열도를 떠난 그는 금일 행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준 사람들 이상으로 그리드를 아끼고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