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20화
마나를 운용하는 방식은 마법의 술식으로 갈린다. 적용하는 술식에 따라서 마나의 흐름이 바뀌고, 마나핵이 호응함으로써 마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한데 그리드의 신체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 회로에는 투기가 엉겨붙어있었다. 마치 기름때처럼 진득하게. 그 탓에 마나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다.
투기와 마나의 상성이 나쁘다는 뜻은 결단코 아니다.
그리드의 투기가 검기와의 조화를 이뤘기 때문에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검기가 아닌 마나와 투기의 조화를 이뤘다면 반대의 사태가 발생했으리라.
‘어떤 놈이 이딴 짓을.’
그리드의 기 순환을 바꿔놓은 놈이 대체 누굴까?
마법사인 브라함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체모를 놈을 때려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그놈 덕분에 그리드의 잠재력이 올랐다는 사실을 뻔히 눈치 챘으니까.
브라함에겐 원수지만 그리드에겐 기연인 셈이었다.
‘보통 고수가 아닐 텐데.’
바다처럼 광대한 브라함의 지식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추측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드에게 직접 누구냐고 물어보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과연 세상은 넓다고 받아들일 뿐.
“잘 골랐군.”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그리드를 지켜보던 브라함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그리드가 고른 마법서의 내용이 흡족했던 까닭.
반면 그리드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잘 골랐다니? 진심입니까?”
디코이.
그리드가 고른 마법의 정체였다.
마나로 새를 만들어서 바람잡이로 삼는, 일종의 더미 마법.
강력한 파괴 마법, 혹은 템빨을 극대화시키는 인챈트 웨폰 계열의 마법을 원했던 그리드의 입장에선 맥 빠지는 결과였다.
‘메테오라도 배웠으면 대박이었는데.’
목표는 크게 잡아야하는 법.
실패작을 설계했을 때부터 메테오를 열망했던 그리드이다.
실망을 금치 못하는 그에게 브라함이 질문했다.
“네게 부족한 것이 파괴력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군요.”
“몸을 지키는 능력이 부족하던가?”
“그것도 아니고요.”
그리드가 솔직히 대답하자 브라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네게 가장 부족한 것은 경험이며 디코이는 너의 부족한 경험을 채워줄 귀중한 마법이다.”
“디코이가 부족한 경험을 채워줄 거라고요?”
선뜻 감이 잡히질 않았다.
디코이는 그리드도 써본 적 있는 마법이다.
세컨드 클래스가 <전설의 대마법사>였을 당시, 지력 상승의 효과로 일시적으로 활성화됐던 마법 중 하나가 바로 디코이였다.
분명 그때도 유용하게 써먹긴 했다.
디코이를 써서 날리면 상대방이 순간 기척을 혼동해서 빈틈을 드러냈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그리드가 싸워야할 상대들은 눈앞의 브라함처럼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에게 하찮은 속임수가 먹히겠는가?
불신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지팡이를 까딱거렸다.
“순보를 써봐라.”
“네.”
그리드가 즉시 순보를 전개했다.
[순보의 발동에 실패하였습니다.]
“크흠....”
“....”
민망하게도 몇 번의 실패가 있었다.
하지만 끝내 성공한 그리드가 브라함의 후위를 장악하는 순간 브라함이 텔레포트를 써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전투 내내 겪었던 결과다.
‘순보로 공간을 도약해 허를 찌르는’ 초월자의 전투 방식이 브라함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텔레포트가 블링크보다 빨리 써지는 게 말이 되냐고.’
마법사가 전투에서 활용하는 이동 마법은 텔레포트가 아닌 블링크다.
긴 캐스팅 시간이 필요한 텔레포트와 달리 단 1초의 캐스팅으로 공간을 도약할 수 있기 때문.
이동 거리가 무척 짧고, 이동할 지점을 특정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블링크가 있기에 마법사들은 기사들과 싸워올 수 있었다. 접근해서 칼을 휘두르는 기사들의 공격을 그나마 블링크로 모면했다.
하지만 브라함은 보통의 마법사와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텔레포트를 1초도 아닌 즉시 발동해서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해버렸으니.
도대체 누가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미친 사기 캐릭터다.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는 그리드의 바로 뒤에서 브라함의 기척이 느껴졌다.
‘잡았다!’
한 번의 대련이 나를 성장시킨 것일까.
앞선 대련에서와 달리 순식간에 브라함의 위치를 포착하는데 성공한 그리드가 환희에 찬 얼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잡히는 건 브라함이 아닌 마력의 덩어리.
바로 디코이로 만들어진 새였다.
“....!?”
초월자의 감각이 속았다고?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그리드의 눈앞으로 브라함이 떨어져 내렸다.
“네가 디코이를 불신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고위 마법도 아닌데 분신술과 비교해서 어떤 효용이 있나 싶겠지.”
정확한 지적이었다.
룬에 각인 된 대악마의 힘 덕분에 그리드는 분신술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분신술을 써봤자 실력자들은 본체를 금세 간파하곤 했다.
하물며 마력 덩어리를 분산시키는 것에 불과한 디코이는 어떨까.
그래도 잠시나마 상대방을 혼란시키는 분신술과 달리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브라함식 텔레포트가 그렇듯이 브라함식 디코이는 평범한 디코이와 차원이 달랐다.
“디코이는 하위 마법이라는 점이 도리어 장점이다.”
스륵.
소량의 마력을 뽑아낸 브라함이 한 마리의 새를 빚었다.
피처럼 붉고 덩치가 큰 것이 맹금처럼 사나워보였다.
“시전자가 지닌 마나의 성질을 고스란히 계승하거든.”
“아!”
초월자의 감각이 속아 넘어간 이유를 깨달은 그리드가 탄성을 토했다.
디코이는 분신술과 달리 상대방의 눈을 속이진 못할지언정 기척만큼은 완벽하게 속이는 게 가능한 것이다.
물론 평범한 디코이가 아니라 브라함식 강화 디코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디코이의 활용법을 떠올려본 그리드가 안절부절 못하자 피식 웃은 브라함이 두 팔을 벌렸다. 거장을 떠올리게 만드는 경건한 몸짓이었다.
“소화해봐라.”
동시였다.
[<디코이(강화)>를 습득하였습니다.]
<디코이(강화)>Lv.1
마나를 분리하여 한 마리의 새를 소환합니다.
새의 활동 범위는 소환자의 반경 5미터이며 지속 시간은 10초입니다.
소환 지정 가능 범위:반경 1미터
재사용 대기 시간:3분
마나 소모:1,000
‘초.’
변수 없이 타이밍을 맞추려면 순보의 확률을 100퍼센트로 만들어야한다.
판단하고 초를 전개한 그리드가 순보를 전개한 후 즉시 디코이를 전개했다.
순보로 이동한 지점은 브라함의 측면이었고, 디코이를 소환한 지점은 브라함의 등 뒤였다.
그리드의 새는 까마귀처럼 검었다.
브라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런 식으로 응용하면 상대방이 감각만으로 너의 위치를 특정 짓는 게 어려워지지.”
뭐 그래봤자.
“둘 다 동시에 불태워버리면 별 의미 없지만 말이야.”
화르륵!!
“으아악!!”
***
“하여튼 무식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불사의 쿨타임이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브라함이 설마 공격할 줄 몰랐던 그리드가 물약을 마시며 투덜거리자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방심한 네 잘못이지. 어쨌든 디코이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니 보다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게끔 궁리하고 정진하도록 해라.”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브라함한테 방심하지 말란 말을 듣다니.
방심했다가 친구한테 뒤통수 맞아 죽은 브라함의 과거를 떠올린 그리드가 속으로 혀를 차는 그때였다.
촤르르르르륵!!
지식의 방이 겹겹이 접힌다 싶더니 점이 되어 사라졌다.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온 그리드와 브라함을 메르세데스가 정중히 맞이해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응.”
그리드는 별 생각 없이 대답하는 반면,
‘뭘 알고 고생했다는 거지?’
브라함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지공 브라함조차도 메르세데스는 꽤나 거북했다. 저 고요한 눈동자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잠재력을 섣불리 가늠하지 못했다.
“흥.”
괜히 불쾌해진 브라함이 콧방귀를 뀌며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
새로운 기척이 다가옴을 느낀 브라함이 제자리에 멈춰 섰고,
“보고할 사안이 있다.”
곧이어 그림자에서 페이커가 튀어나왔다.
그리드가 매우 놀랐다.
페이커가 지척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그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
“란스티어가 됐다더니 대단한데....?”
그리드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우는 존재.
란스티어의 은신술이 차원이 다른 경지에 있음을 이미 옛날에 체험해봤다지만 페이커가 벌써 이 정도로 소화해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전직하고 몇 주 채 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하게 될까.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그리드에게 페이커가 말했다.
“로스차일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우리를 견제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방면에서 손을 쓰고 있다는군.”
“우리를 왜 견제해?”
이진명 회장이 말하길,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가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Satisfy에 투자를 시작했다고 한다. 빠를 경우 오픈 베타 테스트 기간부터 시작됐다고 하는데 로스차일드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의 선견지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부의 축적에 초점이 맞춰져있다고 들었다.
템빨국과 거래를 하면 했지 굳이 적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직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페이커는 도통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그리드에게 레이단에서 발생했던 사건을 보고했다.
잠자코 듣던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 혁명단이라는 놈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진위 파악도 안 된 상태라는 거군.”
혁명단은 자신들의 배후에 로스차일드가 있다는 듯이 말했다지만 글쎄.... 진실은 어떨까?
“아직 척살령은 내리지 마. 혁명단 놈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고 감시하면서 상황을 지켜보자.”
현명해진 그리드였다. 분노에 눈이 멀지 않고 실리를 추구했다.
고개를 끄덕인 페이커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가 채 10미터도 이동하기 전에 그리드는 그의 기척을 놓쳤다.
잠자코 곁에서 지켜보던 브라함이 실소했다.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군.”
브라함이 처음 막 부활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템빨국에서 그나마 제법이라고 할 수 있는 실력자는 농부 한 명이 전부였다.
한데 지금은....
“네?”
“아니, 혼잣말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브라함이 자리를 떠났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콧대 높은 전설들을 하나로 규합시킨 그리드가 위대하고 자랑스러웠기에. 여태껏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아니, 시도조차 못했던 업적 아닌가.
“우리도 가자.”
그리드가 메르세데스를 재촉했다.
템빨아카데미 건립 후 최초로 졸업생들이 탄생하는 날이다. 새로운 인재들을 격려해주고 스틱세이를 만나 코크로 섬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마치 그리드의 앞길을 밝혀주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