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19화
포식의 대악마 베리아체.
세계의 규칙을 엿보고 야탄을 규탄한 그녀는 인계로 추방당한 뒤 10명의 자식을 낳았다.
자신을 닮아 큰 욕망을 지닌 자식들에게 복수를 맡긴 그녀는 누차 경고했다.
혈육을 해하지 말라.
너희가 형제의 피를 탐한다면 나의 염원은 헛되리라.
경고이기에 앞서 부탁.
깊은 염려가 담긴 그녀의 통첩에 반발한 자식은 단 한 명, 브라함 에슈발트가 유일했다.
무한한 지식을 탐하였고, 그러므로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고자 했던 브라함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고 존경했던 어머니의 말씀을 외면하였다.
이는 브라함의 삶이 슬픔과 고통으로 점철 된 원인이었으며,
‘나태의 저주가 여전히 나를 지배했다면 내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브라함과 그리드의 만남을 성사시킨 기적의 발단이기도 했다.
브라함은 어머니의 말씀을 어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천(天).”
스스로를 하늘이라 선언하는 검무.
자신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자를 징벌하겠노라 외치듯이 온갖 위력적인 검무를 연계하는 그리드를 힘으로 찍어 누르고, 달래고, 어르는 브라함의 입술이 위로 솟구쳤다.
그는 기뻤다.
대장장이이되 영웅왕이며, 검성이 아니되 검술의 극의를 엿본, 또한 마법을 배울 자격을 갖춰가는 이 ‘완전에 가까운’ 존재에게 자신이 일말의 도움이라도 줬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쩌엉!!
레인보우 리플렉션.
모든 공격을 반사하는 전설의 대마법으로 검무의 파장을 그리드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준 브라함이 환희에 찼다.
그리드가 자신에게 되돌아온 검무를 모조리 반격하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
텔레포트로 피하고, 실드로 막으며 몸을 지켜낸 브라함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알고 있다시피 나는 실로 엄청난 천재다.”
“허억.... 허억.... 네, 네, 그러시겠죠.”
설마 모든 검무가 반사당할 줄이야, 치우의 비급을 익히기 전이었다면 방금 죽었다.
화회로 반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지.
벅찬 숨을 몰아쉬는 그리드와 달리 브라함은 평온하게 말해나갔다.
“하지만 나보다 더 뛰어난 천재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무무드와 마리로즈....
그들과의 만남은 브라함에게 지독한 저주를 내렸었다.
자신의 작은 재능을 원망하게 되는 저주.
그들과 자신의 재능을 저울질하면서 브라함은 때때로 눈물마저 흘렸었다.
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쾌락을 느꼈다.
자신보다 대단한 인물들이 존재하는 덕분에 목표를 더 높게 설정할 수 있었으니까.
“그들을 넘어서겠노라 다짐할 때마다 나의 열정은 태양처럼 들끓었었지. 하지만 지금.”
“....?”
“네가 나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나의 열정은 도리어 그때보다 더 뜨거워지는구나.”
“네?”
아니, 무슨.
내가 브라함을 뛰어넘게 될 거라는 건 솔직히 너무 심한 비약이다.
5분 내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말을 들어봤자 립서비스로밖에 안 들....
눈살을 찌푸리던 그리드가 문득 떠올렸다.
브라함이 립서비스?
성립 불가능의 개소리다.
브라함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 타인의 비위를 맞춰주겠답시고 고민해본 경험 자체가 없는 존재였다.
그의 모든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다는 뜻.
‘내가 언젠간 브라함마저 뛰어넘는다고?’
감격하는 그리드의 머리 위로 메테오가 떨어졌다.
“한 천 년쯤 후에?”
“으아아악!!”
***
이 정도로 깔끔하게 져본 게 얼마만일까.
속된 말로 개털렸다.
“끄응....”
스태미나가 조금 회복되자마자 똑바로 고쳐 앉은 그리드가 전투를 복기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실수했거나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브라함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
‘초월자의 강점이 하나도 먹히질 않으니 원.’
속도는 예측에 가로막히고, 반사 신경은 즉발 마법에 상쇄 당한다.
본래 단 한 번의 사용으로 전황을 뒤집는 <순보>가 텔레포트에 카운터 당하기도 했다.
차포 떼고 싸우는 격이었다.
‘내 행동이 예측당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인데....’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
이는 단지 브라함이 영리해서가 아니라 수백 년을 살아왔고, 살아온 세월만큼 싸워온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드도 지난 10년 동안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싸워왔지만 브라함은 그보다 수십 배 더 긴 시간 동안을 싸워온 인물이 아닌가.
브라함이 범이라면 그리드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패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당연하다.
단지 재능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패배에 익숙해졌다간 앞으로 셀 수 없이 많은 패배를 겪게 될 것이다.
패배 전적만 산처럼 쌓일 테지.
앞으로 그리드가 싸워야할 적들은 최소 수백 년 이상 존재해온 생물들이니.
“좌절하지 않는군.”
한쪽에 턱을 괴고 앉아 그리드를 지켜보던 브라함이 피식 웃는다.
설마 신이라도 만나고 온 걸까, 그런 허황된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그리드는 급격히 성장한 상태였다. 자신이 최강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건방질 정도로 당당한 기세를 숨기지 않고 발산했었다.
한데 무력하게 패배한 것이다.
제법 큰 충격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침착하다.
“누구를 상대로 진건데 좌절하겠어요?”
그리드가 진솔하게 고백했다.
상대가 브라함이었다.
역대 최강의 마법사이자 최근에는 신격마저 쌓아올린 존재.
비록 전성기의 실력을 되찾진 못했어도 그리드보다 강한 게 당연했다.
그는 이미 신격을 쌓기도 전부터 피아로를 ‘맨손’으로 제압하지 않았던가.
“당신하고 싸워서 진 게 차라리 다행이네요. 주제파악 못하고 설치다가 다른 사람하고 싸워서 졌다간 그땐 정말 큰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요.”
굳이 싸우자고 한 브라함의 의중을 완전히 헤아린 그리드였다.
감사함마저 느끼는 그에게 브라함은 ‘네가 나 말고 누구한테 진다고?’ 반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고를 빙 둘러보더니 말했다.
“너는 당연히 독서를 싫어하겠지?”
한때 활자 공포증이 있던 그리드였다.
특히 교과서와 학습지를 끼고 살았던 학창시절엔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교과서와 학습지의 내용을 원망하며 경기마저 일으켰었다.
하지만 Satisfy를 시작한 후로 바뀌었다.
온갖 공략법과 지식 백과를 의무적으로 읽어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한 세월이 벌써 몇 년째.
활자에 제법 익숙해졌다.
“독서가 취미입니다만?”
“그런가. 의외군.”
“....”
브라함이 비웃지 않고 순순히 인정하자 그리드가 도리어 당황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를 멍청이, 돌머리라고 부르던 사람이 바로 브라함 아니던가.
글씨를 읽어봤자 이해는 하는 거냐고 비꼬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흐뭇한 표정은 뭐지?
“머리에서 돌이 떨어져나갔다 싶더니 과연, 독서를 취미로 삼아서였나.”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브라함을 그리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볼 때였다.
촤르르르르륵!!
무한의 서고에 가득 찬 책장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배치를 바꿨다. 그리고 곧 하나의 책장이 그리드 앞으로 다가와 우뚝 멈췄다.
“한 권 골라보아라.”
서고에 보관 된 수십, 수백 만 권의 서적은 브라함의 지식 단편들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모든 서적의 내용이 다르다는 뜻.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모두 똑같아 보였다.
“이 책들이 뭔데요?”
“그 책장에 있는 서적들엔 나의 마법이 기록돼있다.”
“....!”
브라함의 마법서!
기껏 안정을 되찾았던 그리드의 마음이 다시 거칠게 뛰었다.
사실 이젠 마법에 미련을 버린 상태였다.
세컨드 클래스 <전설의 대마법사>가 <지공>으로 바뀌게 되면서 더 이상 마법을 배울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브라함이 따로 마법을 가르쳐주진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건만, 어느새 지력이 4천을 훌쩍 넘겼는데도 브라함의 반응이 영 없어 그나마 남은 미련도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한데 다짜고짜 마법서를 들이민 것이다.
그것도 수백 권의 마법서를.
‘이걸 다 배우면....’
브라함의 후계임을 자처해도 되지 않을까.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가 한 권의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펼치려는 순간 브라함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일고의 고민도 없군?”
“어차피 겉으론 다 똑같이 생겼는데 골라봤자 의미가 있을까요?”
책장에 꽂혀있는 수백 권의 책 전부가 단지 검은 표지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었다.
제목조차 없는 책들.
뭐가 뭔지 구분이 불가능하니 아무거나 집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권밖에 못 고르는데 조금 정돈 고민해 보지 그랬나.”
“네?”
한 권 골라보라고 하더니 정말로 한 권만 고르라는 거였나? 이 많은 책 중에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너는 다양한 마법을 습득할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지력이 낮았을 때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브라함식 강화 마법은 명망 높은 마법사들도 배우지 못하는 마법이었으니 고작 수천 단위 지력으로 브라함에게 마법을 배우는 건 욕심이려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재 그리드의 지력은 5천을 향해가고 있었다.
브라함이 말했던 기초 마법의 습득 조건은 4천이었으니 조건을 이미 진즉에 갖춘 것이다.
“이제 기초 마법 정도는 다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질의 문제다.”
“제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썩 달가운 말은 아니었다.
세컨드 클래스로 전설의 대마법사를 얻었다가 이후 지공의 계보를 이은 그리드는 레벨이 오를 때마다 6개의 스탯을 지력에 강제 투자하는 중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자질이 부족하다니?
강제로 투자되고 있는 지력 스탯은 그럼 뭐가 된단 말인가.
그리드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삼켜내는 순간이었다.
“마나가 순환해야할 통로마다 투기가 순환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
“아쉬워할 것 없다. 덕분에 너의 검기가 강해진 거니까.”
사실 마음이 쓴 건 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브라함은 기왕지사 그리드를 자신의 제자로 삼고 싶었다. 자신과 같은 마법사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검기와 투기의 합일을 이룬 그리드의 신체는 이제 마법사의 것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리드의 지력이 제법 높아졌다는 것.
마나를 순환시킬 통로가 적어 여러 개의 마법 술식을 소화하진 못할지언정 마법을 습득하는 일 자체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단, 브라함이 도왔을 때의 이야기지만.
“네게 마법은 선택과 집중이 되어야할 것이다.”
마법이란 여러 개의 단계로 나뉘어있으며 단계마다 5개에서 10개의 술식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드는 단계마다 1개의 마법을 습득하는 게 고작일 터.
만약 그리드가 ‘보통의 마법’밖에 배우지 못하는 입장이라면 심각한 흠이었다.
하지만 브라함식 강화 마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브라함식 강화 마법이란 하나의 마법으로 열의 위력을 내는 마법.
하나의 마법만 익혀도 10개의 마법을 익힌 마법사들 부럽지 않으리라.
단언한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눈짓했다.
“그 책이 너를 인도했다면 망설이지 말고 펼쳐라.”
“다시 고르면 안 됩니까?”
마법서를 아무 생각 없이 고른 그리드의 입장에선 망설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브라함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나의 지식은 너의 부족함에 감응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쯤 되면 그리드도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망설임을 버린 그가 마법서를 펼치자 브라함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잘 골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