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18화
“여기서부턴 출입 금지외다.”
초국 왕도 카라스로 향하는 9개의 길목 중 하나.
그중에서도 험한 산세를 골라 이동했는데 이미 방비가 철저했다. 다른 곳의 사정은 어떨지 눈에 훤히 보였다.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카라스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카라스에 용무가 있습니다만, 언제쯤 출입 제한이 풀릴 것 같습니까?”
“글쎄올시다.... 왕도를 언제까지고 봉쇄할 순 없으니 아마 빠른 시일 내에 풀릴 거라고 보오.”
“무슨 변고가 생긴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변고는 무슨. 중요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어 외지인의 출입을 잠시 막은 것뿐이오.”
“그렇습니까. 그럼 수고하십시오.”
왕도는 국가의 심장이며 얼굴이다. 왕도에 어떤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려서야 대외적으로 좋을 게 없으니 초국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병사들에게 정중히 인사한 크라우젤이 은밀하게 청운진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안개로 뒤덮인 산세를 푸른 구름이 뒤덮자 병사들의 오감이 잠시간 마비되었고 크라우젤은 유유히 관문을 돌파했다.
“갑자기 웬 구름이....”
어리둥절한 병사들은 상상조차 못했다.
조금 전 되돌아갔던 잘생긴 청년이 어느새 자신들의 곁을 지나쳤단 사실을 말이다.
***
카라스에 도착한 크라우젤이 병사들의 시선을 피해 도시를 살폈다.
시가지 곳곳에 널브러진 백골과 묘비마다 파헤쳐진 흔적이 눈에 띄었다.
거리의 가옥들과 궁전의 성벽이 무너진 이유는 네크로맨서의 침략을 받아서임이 분명했다.
그것도 최소 수십 명 이상의 네크로맨서가 침략한 흔적.
‘이건....?’
성벽의 잔해를 살피던 크라우젤이 눈살을 찌푸렸다.
성벽은 마치 톱날에 썰려나간 것처럼 절단면이 울퉁불퉁했지만 절단면 부분에 작은 실금조차 없었다.
검날도 아닌 톱날이 일격에, 빠르게 성벽을 베어냈단 증거다.
크라우젤은 이 검술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카오.’
오크 전사 출신의 데스나이트.
다름 아닌 아그너스의 수족이다.
말인 즉, 카라스를 침략한 네크로맨서는 수십 명이 아니라 아그너스 일인이라는 뜻이었다.
임모탈을 버린 뒤로 아그너스는 쭉 혼자서 활동하는 중이었으니까.
혹자는 고작 한 명의 플레이어가 무슨 수로 대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겠느냐 반박하겠지만,
‘아그너스의 침략을 받은 것치곤 무사하군.’
크라우젤의 감상은 도리어 반대였다.
아그너스의 침략을 받고도 내성벽부턴 무사히 지켜낸 카라스의 전력에 크게 감탄했다.
‘주작 신의 힘이라는 건가?’
아그너스가 카라스를 점령하지 못하고 되돌아간 이유를 크라우젤은 금세 유추했다.
카라스 군대의 손실이 의외로 적었다.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으니 아그너스는 시체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던 것으로 추정됐다.
주작 신의 권능이 병사들의 상처를 지속적으로 회복시켜줬기에 가능한 결과였으리라.
‘그리고 아그너스가 의외로 성장을 못했나보군.’
뮐러의 스토리에 단편적으로 출현했던 바알의 계약자는 짧은 순간이나마 절대자의 위용을 선보였었다.
번헨 열도로 침략해온 대악마의 군세를 단신으로 막아냈을 정도.
하물며 병사란 악마보다 쉽게 죽는 법이고, 죽은 병사는 곧 바알의 계약자의 노예로 부활하였으니 인간의 군대로 바알의 계약자를 막는다는 건 상성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카라스는 아그너스의 침략을 비교적 수월하게 막아냈다. 성벽 바깥의 민가가 모조리 파괴당하고 외성벽을 내어준 정도로 아그너스를 물리쳤다.
아그너스가 전대 바알의 계약자와 비교가 안 되게 약할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업적이었다.
묘비들의 상태를 보아 아그너스 또한 꽤 긴 시간 공을 들여서 전력을 모은 것일 텐데 말이다.
‘이런 강대국조차 양반 앞에선 한없이 작아졌단 말인가.’
양반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체감한 크라우젤이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 그때였다.
“크라우젤?”
익숙한 기척이 다가온다 싶어 피하지 않고 기다렸더니 적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외모라는 개념에 별 감흥이 없는 크라우젤조차 감탄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지슈카였다.
“그대가 초국을 도운 거였나.”
아그너스가 패퇴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추가됐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는 크라우젤에게 지슈카가 씨익 웃어주었다.
“궁성의 실력이라는 거지.”
포비아의 후예가 아닌 궁성.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데 성공한 증인이 바로 눈앞에 있다.
지슈카를 바라보는 크라우젤의 눈빛은 더없이 따스했다. 존경심마저 엿보였다.
“전설이 된 것을 축하한다.”
“그리드나 너하고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뭐.... 고마워.”
칭찬이 어색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지슈카의 얼굴에선 조금의 후회도 엿볼 수 없었다.
크라우젤은 재차 확신했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다는 건 분명히 즐거울 거란 사실을.
어머님이 병환을 극복한 뒤로 순전히 재미를 추구하고자 게임을 플레이 중인 그의 입장에선 ‘게임은 재밌어야한다’는 본질을 망각해선 안 됐다.
“나야말로 고맙다. 덕분에 희망이 보이는군.”
“응? 뭐가?”
“하하.”
“뭐야? 빨리 말해 짜샤.”
검성 크라우젤이 영문 모르게 웃는다는 이유로 멱살을 붙잡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지슈카가 유일할 것이었다.
그녀와 잠시간의 회포를 나눈 크라우젤이 가야로 떠났다.
***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리드가 모험하며 발전하는 동안 템빨단원들이 성장했듯이 메르세데스 또한 새로운 기사도를 썼다.
기사가 죽을 곳은 전장이다.
젊고 건강해진 아이린의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쓴 기사도였다.
주군 그리드가 소중한 이들의 허무한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챈 메르세데스는 새로운 기사도를 통해서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고대의 괴물과 싸웠을 때 소모했던 진원진기를 기적처럼 회복한 것이다.
그러면서 골격의 밀도가 높아졌고 하얗게 샜던 머리카락도 원래의 색깔을 되찾았다.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지며 온 몸의 상처와 굳은살 또한 사라졌다.
최초에 메르세데스는 혼란을 느꼈다.
어린아이의 것처럼 부드러워진 자신의 손과 피부에 수치심마저 느꼈다. 평생을 단련하며 얻었던 굳은살을 잃자 기사의 자격을 상실한 건 아닐까 걱정했다.
괜한 기우였다.
그녀가 겪은 것은 환골탈태.
진화이지 퇴화가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
메르세데스가 되찾은 청발을 넋 놓고 바라보던 그리드가 슬며시 웃었다.
첫 만남.
그리드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던 기억을 떠올린 메르세데스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혔다.
“소, 송구합니다.”
“그때처럼 예쁘다고. 두 번 다신 백발이 되지 마.”
단지 취향을 고백하는 게 아니라,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는 뜻을 담은 충고였다.
진원진기는 목숨과 직결되는 기운.
그리드는 자신 때문에 메르세데스가 진원진기를 소모하는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새는 광경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왔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메르세데스였다.
순순히 대답하는 것과 달리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다짐했다.
‘또 같은 상황이 오면 그때는 내가 지켜주면 된다.’
그리드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강해졌다.
템빨국에서 최강을 논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므로 더 큰 책임을 짊어지어야한다고 생각하며 걷던 그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커다란 복도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선 사내 때문이었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월광이 그의 은발을 차갑게 적셨다.
“브라함.”
안 그래도 높은 콧대가 천장을 찌를 기세다.
턱을 치켜세운 채 시선을 낮게 까는 브라함의 모습은 늘 그랬듯이 세상을 오시하는 듯했다.
“건방지군.”
“네?”
오래간만에 만나는 벗에게 다짜고짜 무슨?
반갑다는 말을 들어도 부족할 판국에 건방지다는 말을 들은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리자 히죽 웃은 브라함이 손가락을 퉁겼다.
촤르르르르르륵!!
풍경이 변한다.
붉은 융단이 깔린 넓은 복도와 창문 너머 밤하늘의 풍경이 겹겹이 접힌다 싶더니 이내 점이 되어 소멸했다.
무(無)가 된 공간을 빼곡히 채우기 시작한 것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책장.
이 무한의 서고는 브라함의 심상 중 하나, 다름 아닌 일계(一界), <지식의 방>이었다.
“이럴 수가....”
감당불가의 전율이 그리드를 관통했다.
유일신 치우의 심상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브라함의 심상에 압도당한 것이다.
이곳은 이미 또 다른 세계였다.
지상, 지옥, 천국과 같은 개념으로 구분할 수 있는.
심지어 브라함은 총 3개의 심상을 구현 가능했다.
이 거대한 세계조차도 브라함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서고의 귀퉁이가 네모나게 잘려나간다 싶더니 모습을 드러낸 브라함이 질문하자 곰곰이 생각해본 그리드가 대답했다.
“게으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태라는 죄악의 무서움을 그리드는 최근에도 목격한 바 있다.
나태의 저주에 집어삼켜졌을 때의 그랜드마스터와 나태의 저주를 극복했을 때의 그랜드마스터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브라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오만이다.”
“.....”
그게 당신이 할 말인가?
건방지고 거만하기로 손꼽자면 당신이 세계 제일이 아닐까 싶은데.
게슴츠레한 시선을 보내오는 그리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나는 최고가 맞으니 오만한 게 아니다.”
“아, 네....”
“반면 너는 다르지.”
브라함의 붉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욱 더 도발적이었다.
“아직 애송이 주제에 강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리드가 울컥했다.
브라함이 말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됐지만 그래도 불쾌한 건 사실이었다.
치우의 비급까지 습득하고 신격을 쌓은 자신을 여전히 애송이 취급하는 브라함이 솔직히 황당했다.
“혹시 안목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닙니까?”
“애송이라는 평가를 부정하려는 것이냐?”
“당연하죠.”
“그럼 내 평가를 바꿔보던가.”
벨리알의 지팡이를 꺼내 쥔 브라함이 그것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쳤다.
어디 한 번 덤벼보라는 듯이 말하는 표정이 지독히도 오만했다.
그리드는 사양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신의 실력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정확하게 가늠해보고 싶었던 차였다.
아직 본래의 힘을 되찾지 못한 브라함이라면 충분히 호각을 이루지 않을까....
생각하며, 단지 검을 받드는 자세만으로 초를 전개한 그리드가 즉시 순보를 전개했다.
그리고 브라함의 후위를 점령하는 순간 시야에서 브라함이 사라졌음을 자각했다.
초월자의 증명이나 다름없는 순보가 고작 텔레포트 마법에 맞대응 당한 것이다.
‘캐스팅 없이 즉시 발동하는 마법’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 그리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자 브라함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순보로 선수를 치는 건 하수한테나 통하는 방식이다.”
“....!!”
그리드가 싸우자고 덤빌 것을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
브라함이 미리 캐스팅해놨던 마법이 알람 마법에 의해 타이밍 좋게 발현됐다.
디스인티그레이트.
존재를 멸하는 빛의 창이 그리드의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단단하군.’
고통에 몸을 떠는 그리드를 확인한 브라함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전설의 대마법을 그리드가 불사조차 소모하지 않고 버틴 까닭이다.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굉장한 일이었다.
브라함이 인간을 상대로 심상세계를 열고 지팡이까지 무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리드를 일격에 혼쭐내고 기를 좀 죽여 놓은 다음 새로운 마법이나 배우게 만들 계획이었다.
한데 의외로 쉽지 않아보였으니 놀라웠다.
‘내가 걱정해야할 단계는 넘어섰군.’
오만한 건 나였나....
깨닫는 브라함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평소의 뒤틀린 미소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순수한 감탄과 기쁨으로부터 파생한 미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