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09화 (1,199/1,794)

“당연히 그렇겠지. 자네는 아직 4권의 비급밖에 얻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 4권의 비급을 발판으로 삼아서 더 강한 힘을 추구하다보면 언젠간 기필코 최강이 될 것일세.”

“당장 비급을 익혀봤자 최강이 될 수 없음을 비반 공께서도 인정하시는군요.”

“으, 응?”

“한데 왜 비급을 빨리 익히지 않느냐고 재촉하시는 겁니까?”

하야테와 비교 당했을 때부터 이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던 비반이 결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비급을 익히는 편이 자네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해주는 것인데 왜 자꾸 삐딱하게 듣고 궤변만 늘어놓는 겐가? 자네, 나한테 불만 있나?”

“저는 제가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한 길에 비반 공께서 개입하는 걸 원치 않을 뿐입니다.”

“자네의 길은 틀렸다니까!”

“어째서 틀렸다고 단정 지으시는 겁니까? 비반 공이 창안하고 뮐러가 발전시킨 검이야말로 지고의 검임을 무엇을 근거로 확신하시는 거죠?”

“무쌍검법을 부정하는가!!”

콰르릉!!

비반의 기세가 천지사방을 울렸다.

땅거미 내린 대지 위로 날카로운 검기가 요동치자 다시 날이 밝았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 기세를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인 크라우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백했다.

“제게 뮐러의 검술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

비반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머리에 망치라도 얻어맞은 듯 충격에 휩싸인 표정이다.

그 또한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제게는 영웅왕의 투기가 없으니까요.”

뮐러가 역대 최강의 검성이었던 이유는 그가 검성이자 영웅왕이었기 때문이다.

검기와 투기의 조화를 통해 검술의 위력을 극대화시켰으므로 최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뮐러와 경우가 달랐다.

그가 뮐러의 비급을 익혀봤자 뮐러의 검술을 온전히 재현할 리 만무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비반이 허허 웃었다.

“역시 자네도 알고 있었군. 나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네. 허허허.”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뮐러의 비급을 외면할 필요가 어디에 있나? 자네에게 비록 투기가 없을지언정 검기가 있고, 뮐러의 검술 또한 근원은 검기로부터 비롯한 것일세. 뮐러의 비급을 익히고 자네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면 ‘크라우젤의 검’을 만드는데 충분히 큰 영감을 얻을 거라고 나는 확신하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선 저의 한계를 가늠해보고 싶습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우선 파악한 뒤에 뮐러의 비급을 익혀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으음.”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타인이 남긴 힘에 의존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한계를 점검한다면 더 많은 것을 깨우칠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끄덕인 비반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진즉부터 그리 말했으면 내 자네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렸을 터인데. 난 또 자네가 무쌍검법을 무시하는 줄 알고 오해를 하고 말았군.”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건 맞지. 사실 오해하지 않았다네. 처음부터 눈치 채고 있었어.”

“역시 그러시군요.”

애써 태연한척하는 비반.

그는 모르고 있었다.

크라우젤이 한계에 도달할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플레이어의 잠재력이란 무궁무진한 법이었으니까.

하물며 최고의 플레이어일수록 더 많은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간 뮐러의 비급을 익히게 될 수도 있겠지.’

본래 크라우젤은 벽창호가 아니다.

검성임에도 대륙제일창 키리누스를 스승으로 섬겼을 정도로 그는 유연한 사고를 지녔다. 실제로 방금 사냥한 무신의 추종자 중 하나가 드롭한 무신의 비급을 바로 습득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뮐러의 비급만큼은 외면하는 첫 번째 이유는 투기의 부재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는 ‘검성은 즉 뮐러다’라는 공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드와 달리 뮐러의 후예가 아닌 검성으로 전직한 크라우젤은 자신을 증명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만약 끝내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순순히 포기할 생각이지만, 적어도 포기하기 전까진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뮐러의 검술이 없이도 검성이 최강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목표였다.

‘우선은 최대한 많은 비급을 모아야한다.’

뮐러의 비급을 얻을 때마다 새로운 퀘스트와 에피소드가 진행되며 그것은 크라우젤의 저변을 확장시켰다. 굳이 비급을 배우지 않아도, 비급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크라우젤은 일단 모든 비급을 모을 계획이었다.

‘가야라.’

크라우젤이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룡이 봉인돼 있는 가야.

하필 동대륙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지역이다.

바로 그곳에 뮐러의 비급이 잠들어 있다는 정보를 4번째 비급을 습득할 때 입수했다.

만약 비급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양반들과 조우하게 된다면 힘든 싸움을 각오해야할 것이었다.

‘과연 내가 양반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현재 시점에선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다보면 반드시 넘어서리라.

몇 달, 몇 년이 걸릴지라도 반드시.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날 선배님의 격려를 잊지 않겠습니다.”

각오를 다진 크라우젤이 비반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자 비반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이것까지 거부하진 않겠지?”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는 비반이었다.

크라우젤의 낡은 도포가 영 신경 쓰인 눈치였다.

“드래곤의 비늘을 검기로 제련해서 만든 무복일세. 3좌와 함께 만든 것인데 내 손재주가 워낙 투박해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뮐러도 이 옷을 입었었네.”

“....감사히 입겠습니다.”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크라우젤이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는 비반의 두 눈엔 깊은 회한이 서렸다.

“3층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크라우젤의 소식을 접하고 흥분해서 앞 뒤 안 재고 세상에 나오고 말았다.

2좌에게 혼쭐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지는 비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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