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08화 (1,198/1,794)

뮐러가 남긴 비급은 총 8권이며, 크라우젤은 그중 벌써 4권을 얻었다. 비급을 얻을 때마다 뮐러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세계관 지식이 급격히 확장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라툴의 추악한 본성을 엿보았다.

무(武)의 과시를 통한 현혹과 지배.

그리고 최강에의 집착.

그나마 대놓고 횡포를 부리는 양반들을 순수하게 느끼게 만들 정도로 음습한 존재가 무신 제라툴이었다.

콰작!

측면에서 날아오는 발차기를 칼집으로 막아낸 크라우젤이 가볍게 손목을 젓자 빙그르르, 칼집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여파는 컸다.

추종자의 발을 묶은 족쇄가 칼집과 엉켜 심하게 뒤틀리더니 추종자의 거구가 무너진 것이다.

기우는 놈의 거구가 다른 추종자들의 시야를 방해하는 찰나의 틈을 노린 크라우젤이 지룡 승천을 썼다.

푸욱!!

사각으로부터 날아오는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 존재는 초월자 정도밖에 없다.

백호검에 턱을 꿰뚫린 추종자들이 신음하며 경직됐고, 그들의 가슴을 자진모리로 때려 날린 크라우젤은 도약해 유성 검을 전개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압도.

5개의 비급을 배운 무신의 추종자 여섯이면 제국의 공작과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검성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이 봤을 땐 큰 아쉬움을 느낄만한 광경이었다.

본디 검성이란 최강을 뜻하는 칭호.

제국의 공작 따위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절대적인 힘으로 군림해야함이 옳았다.

검성이 되고 수년이 지나도록 절대지경에 오르지 못한 크라우젤은 재능을 의심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는다네.”

“....?”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무신의 추종자들과 격전을 벌인 직후.

마지막 남은 추종자의 목을 베어 떨어뜨리던 크라우젤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오래간만이군.”

“비반 공....”

지혜의 탑을 최초로 방문했던 선구자는 크라우젤이다.

레전드리 클래스는 다만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식됐던 시절, 지혜의 탑을 방문한 크라우젤은 탑의 결사들과 만났고 레전드리 클래스가 실존함을 확인했었다.

그리고 당시 크라우젤에게 큰 전율과 영감을 준 인물이 바로 비반이었다.

“잊으신 겁니까? 저는 이제 선구자가 아닙니다.”

지혜의 탑은 선구자의 전유물이다.

탑의 결사들은 오직 선구자하고만 교류한다.

그리고 당대의 선구자는 그리드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 사실을, 크라우젤은 이미 작년에 비반에게 알려주었다.

한데 또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애처로운 시선마저 보내는 그에게 비반이 버럭 화를 냈다.

“사람을 노망난 늙은이 취급하지 말게. 오늘 난 탑의 결사가 아닌 선배로서 그대를 찾아온 거니까.”

“검성 비반으로서 말씀이십니까.”

크라우젤이 상황을 금세 파악했다.

“아둔한 후배를 잠자코 지켜보기 힘드셨던 거군요.”

“잘 알고 있군. 자네, 힘들게 얻은 뮐러의 비급들을 어째서 외면하는 겐가?”

과거의 뮐러는 비반의 비급을 배우고, 발전시킴으로서 역사상 최강의 검성으로 거듭났다.

한데 그의 정수가 담긴 비급을 후대의 검성인 크라우젤은 외면하고 있었다.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네. 역사에 ‘크라우젤의 검’을 남기고 자신이야말로 최고임을 증명해보이고 싶겠지. 하지만 자네의 실력은 아직 부족하여 발전해야할 여지가 남았고, 뮐러의 비급이 자네의 부족한 실력을 채워줄 것일세. 뮐러의 비급에 잡아먹히라는 게 아니야. 뮐러의 비급을 흡수하고 자신의 검을 만들도록 하게.”

비반은 크라우젤의 재능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쓸데없는 고집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크라우젤이 더욱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당대의 선구자를 보게나. 그 친구는 매번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고 부족함을 극복한 끝에 초월의 격마저 쌓았네. 하지만 자네는 검성이라는 전설의 잠재력조차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한참을 뒤처지고 선구자의 자리마저 박탈당한 게 아닌가.”

“굳이 서둘러서 앞서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자고로 검성이란 제일의 존재. 당연히 서둘러서 앞서가야지.”

“그런 비반 공께선 하야테 공보다 강하십니까?”

“그, 그건....”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금의 제가 뮐러의 비급을 습득한다고 해서 최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굳이 탑의 결사들을 염두에 둘 것도 없다.

그리드조차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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