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17화
크라우젤과 판게아의 인연은 깊다.
사악한 도사에게 고통 받는 판게아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작은 영웅이라고 칭송 받았던 인물이 바로 크라우젤이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방문한 판게아가 그는 낯설었다.
익숙한 사람들과 거리가 모두 사라진 마을.
그리드가 만든 결과다.
기존의 판게아 주민들은 템빨국으로 이주하였으며, 새로운 판게아의 주민들은 주작의 비호를 받아 활력으로 넘쳤다.
“....좋군.”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어디를 돌아봐도 활짝 웃는 사람들만 보였으니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사악한 도사도, 양반의 횡포도 이곳엔 더 이상 없었다.
언젠간 나도 이런 업적을 세우고 싶다.
“여행객이신가요? 맛 좋은 식사로 허기를 달래시는 건 어떠세요?”
신선한 채소와 고기가 담긴 바구니를 품에 안은 아주머니가 식당 문을 열며 말해왔다.
독극물을 판매하는 식당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어떤 소녀와 달리 양심적으로 보였기에 크라우젤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 * *
“멋진 도포네요.”
따뜻한 국물로 속을 달래고 기름에 볶은 채소와 고기를 흰 쌀밥 위에 얹을 때였다.
“역시 평범한 여행객이 아닌 거죠?
넉살 좋은 아주머니가 질문해왔다.
황룡이 수놓인 크라우젤의 흑포를 자세하게 살피는 그녀의 표정이 다소 짓궂었다.
“왕도에서 시찰하러 나오신 분이세요? 혹시 암행어사님?”
벌써 3년 가까이 애용 중인 흑포.
템빨국을 방문했을 땐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한 차림새였는데 이곳에선 도리어 반대인 듯하다.
템빨국의 수준이 높다는 방증이며, 판게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무장 상태가 크라우젤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요즘엔 동대륙에서 활동하는 랭커가 많다고 들었는데 의외였다.
‘랭커들은 동대륙을 방문할 때 굳이 판게아를 거치지 않나보군.’
적해를 건너지 않고 대륙을 이동하는 방법이야 많았다.
막대한 요금이 들거나 위험이 수반되지만 시간이 크게 단축돼서 애용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암행어사도 이곳은 피할 것 같은데요. 병사가 없이도 마을이 평온한데 굳이 암행을 올 필요가 있을까 싶군요.”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한 사람이 바로 크라우젤이다.
NPC와의 대화를 토대로 정보를 수집하는데 도가 텄다.
“호호, 우리 마을이 평화롭기는 하죠. 그래도 외지인이 제법 많이 찾는지라 치안에 신경 써야하고 병사님들도 많아요. 최근에는 왕도에서 축제가 있어 병력을 차출한 까닭에 숫자가 줄은 거지.”
‘축제 때문에 지방 병력을 차출할 리가 없는데.’
초국 왕도에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한 번 들러 봐도 좋겠군.’
짧은 대화로 새로운 정보를 얻어낸 크라우젤이 밥 한 그릇을 전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잠시! 거스름 돈 받아가세요.”
“괜찮습니다. 남는 돈으로 아이 장난감이라도 사주세요.”
부엌 앞에 쪼그려 앉아 엄마가 일 끝나기만 기다리는 꼬마.
자갈을 병정삼아 놀이 중인 녀석에게 싱긋 웃어준 크라우젤이 가게를 떠났다.
정보를 얻었으니 소정의 성의를 베푼 것이다.
크라우젤은 늘 그래왔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앞으로 걸어갈 길도 마찬가지이길 바랐다.
* * *
“내게 용건이 있는 건가?”
마을을 빠져나온 크라우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낡은 로브를 뒤집어 쓴 여섯 명의 거수자.
크라우젤은 식당을 떠날 때부터 그들의 기척을 눈치 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했었다.
마을 안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판게아에서의 평판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뮐러의 비급을 내놔라.”
곧바로 용건을 밝힌 거수자들이 크라우젤을 둘러쌌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펄럭이는 로브 사이로 긴 족쇄가 보였다.
그들 전부가 손과 발이 족쇄로 꽁꽁 묶여있었다.
덕분에 그들의 정체를 눈치 챈 크라우젤이 백호검을 뽑아 쥐었다.
“무신의 유적지에서부터 쫓아온 건가. 의외로 활동 범위가 넓군.”
“뮐러의 비급을 내놔라.”
무신의 추종자들.
오로지 무(武)를 갈망하는 광인들과 대화가 통할 리 만무했다.
어깨를 으쓱인 크라우젤이 뮐러의 비급 한 권을 꺼내 놈들에게 던져주었다.
“....!!”
두 눈을 부릅뜬 무신의 추종자들이 허겁지겁 비급을 낚아채 곧바로 펼쳤다.
그리고 혼란에 빠졌다.
비급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무신의 비급하고 비교하면 수준이 너무 높나?”
츠칵-!
비급에 시선을 팔려 진형을 무너뜨린 추종자들을 크라우젤이 기습했다.
날카로운 찌르기로 선두의 추종자를 쓰러뜨린 후 허리를 뒤로 크게 젖혀 좌우의 추종자들이 휘둘러오는 권과 장을 피했다. 그리고 한 발 크게 내딛음과 동시에 허리를 다시 세워 뮐러의 비급을 들고 있는 추종자의 턱을 이마로 찍었다.
휘리릭, 척!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듯,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한 뮐러의 비급이 크라우젤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뮐러의 비급을 내놔라!”
붉은 안광을 번뜩인 추종자들이 보법을 전개해서 크라우젤을 포위, 곧바로 협격을 펼쳤다.
기술의 수준을 보아 최소 5개의 비급을 습득한 놈들이었다.
“무신께 바치리라!”
‘역시 제라툴의 소행이었군.’
무신의 추종자들은 뮐러의 비급을 해석할 수 없다.
비급의 사용 조건 자체가 ‘검성’이기 때문이다.
한데 유적지에서부터 뮐러의 비급에 집착한다 싶더니 그 배후엔 제라툴이 있었다.
‘진저리나는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