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05화 (1,195/1,794)

템빨 61권 - 15화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직업의 등급은 강함의 척도가 되지 못했다.

히든 클래스가 노말 클래스보다 강하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제2회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를 압도했던 크라우젤은 노말 클래스 전직자였고, 크라우젤은 이후 1년을 더 노말 클래스로 지존에 군림했다.

단독으로 아이스 플라워 길드를 전멸시켰던 시절의 페이커도 노말 클래스였다.

폰, 반트너, 레가스, 극검, 제드노스 등의 템빨단원들은 여전히 노말 클래스로 최강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통합랭킹 10위권 최상위 랭커 중에서 히든 클래스 전직자는 아그너스가 유일했던 시절도 존재한다.

그렇다.

본래 Satisfy에서 중요한 개념은 직업이 아닌 컨트롤이었다.

컨트롤에 자신 좀 있다는 사람들이 바라온 갓겜이 바로 Satisfy였던 것이다.

하지만 게임은 변질된 지 오래다.

그리드가 발전시킨 템빨 때문에?

아니, 그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컨트롤로 극복하기 힘든 직업 간의 격차가 발생한 이유는 상태이상 기술의 다변성에 있다.

초창기의 Satisfy를 생각해보라.

플레이어가 보유하고 있는 상태이상 기술은 많아봐야 2~3개가 고작이었고 그중에서도 스턴기가 가장 큰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3차 전직 직업과 더 다양한 히든 클래스가 공개되자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상태이상 기술의 종류와 개수도 대폭 늘어났다.

전투에서 상정해야할 위험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초창기에는 스턴 내성과 공포 내성 아니, 스턴 내성만 올려도 PvP에서 큰 문제가 없던 노말 클래스 전직자들은 이제 최소 10종류 이상의 내성 수치에 신경 쓰고 투자해야했다.

반면 일부 상태 이상에 저항하는 레어~유니크 클래스 전직자들과 모든 상태 이상에 저항하는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들은 신경 쓸 요소가 적었다.

3차 전직을 완료하고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하이랭커들이 능력치적인 면에선 히든 클래스와의 격차를 좁히는 추세였지만 PvP 전적은 도리어 하락세를 걷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말 클래스 전직자들이 상태이상 저항 수치에 비용을 투자할 때 히든 클래스 전직자들은 그 비용을 아끼고 다른 요소에 투자했으니 히든 클래스가 앞서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상태이상 망겜이 되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지고 있다.’

3차 전직을 완료한 노말 클래스 하이랭커들은 자신의 새로운 힘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다변화한 상태이상에도 대비책을 충분히 마련하여 쉽게 무력화되지 않았다.

반면 히든 클래스 전직자들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 년 동안 상태이상을 ‘당연히’ 저항해온 그들은 아주 나쁜 습관이 몸에 배였다.

어차피 저항하는 상태이상 기술 따위 경계하지 않고 허용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공격에 신경 쓸 시간에 공습하여 대상을 빠르게 격파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학습한 것이다.

그토록 맹신하는 상태이상 저항이 무력화되는 순간 놈들이 보여줬던 표정을 떠올린 할레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네놈들은 알아야한다. 네놈들이 군림해온 이유는 네놈들이 대단해서가 아니야. 단지 네놈들이 얻은 특혜가 대단했을 뿐이다.’

할레는 노력이라는 개념을 불신한다.

노력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인간을 혐오했다.

사업, 스포츠, 공부 등.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은 노력이 아니라 재능과 운이 따랐기에 그 위치에 오른 것이다.

노력은 최고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 증거였다.

그 옛날 크라우젤과 현재의 그리드보다 노력을 덜 기울인 사람이 하이랭커 중에 존재할까?

단언컨대 없다.

하이랭커들은 누구나 똑같이 노력을 한다.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게임에만 매진하고 일상생활에서도 게임을 연구하는 건 랭커 모두가 같았다.

하지만 할레는 통합랭킹 54위에 머무는 것이 한계였고 할레보다 못한 사람은 지천에 널렸다.

노력의 가치가 다르다는 뜻.

그리고 노력의 가치는 재능과 운으로 결정된다.

할레는 생각한다.

하이랭커들은 남들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운 좋게 타고났을 뿐이며, 그중에서도 히든 클래스로 전직한 사람들은 더 좋은 운이 뒤따랐을 뿐이라고.

그런 놈들을 히어로 취급하는 세태가 무지하고 가여울 따름이다.

‘놈들이야말로 게임의 수명을 좀먹는 역병인 줄도 모르고.’

할레는 Satisfy에 모든 걸 걸었다.

Satisfy의 몰락은 즉, 자신의 인생이 망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타고난 운만 믿고 밸런스를 망치는 놈들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놔둘 순 없어.’

히든 클래스의 사기성은 점차 더 심화될 것이다.

아직은 하이랭커들만 느끼고 있는 박탈감을 머잖아 모든 플레이어가 느끼게 될 것이고 그때부터 Satisfy의 인기는 쇠락할 것이다.

할레는 그 전에 Satisfy를 구원하고 싶었다.

히든 클래스 전직자들을 완벽하게 공략하고 공략법을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이었다.

소수의 히든 클래스들이 군림하지 못하게끔 말이다.

의욕을 다지는 할레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템빨국의 영토에 진입하였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피로도를 높입니다.]

동시에 마부가 말했다.

“곧 레이단입니다.”

“그래, 마지막까지 수고 좀 해주시오.”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낙타가 모는 마차.

의외로 좋은 승차감이다.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리는 할레에게 일행들이 물었다.

“유라가 정말로 레이단에 올까요?”

유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옥에서 보낸다고 알려졌다.

데빌 슬레이어라는 직업이 지옥에서야말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계에서는 타 전설 클래스보다 약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라가 이번 표적이 된 것이다.

최근에야 비로소 전설이 된 지슈카와 달리 베테랑이되 충분히 사냥 가능한 표적.

“반드시 올 거다. 냥멍이의 페스티벌이 있는 날이니까.”

냥멍이.

고양이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혼합해 만든 아이디다.

어린애가 만들어도 저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심한 아이디지만 냥멍이를 비웃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펫 마이스터.

유니크 클래스 전직자인 그는 템빨국의 중추다.

온갖 야생동물, 그리고 몬스터와 언제라도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가 있기에 템빨국의 수많은 백성들이 강과 산을 안전하게 오가며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템빨국이 몇 달 전부터 시범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비룡단>도 냥멍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냥멍이가 레이단의 영주대리를 맡은 이후 매해 두 번씩 개최되는 축제....”

이름하야 냥멍이 페스티벌.

수백 마리의 동물과 몬스터가 사이좋게 도시를 행진하는 내용의 축제다.

동물과 몬스터가 초식, 육식을 가리지 않고 사이좋게 행렬하는 모습이 장관인지라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거두고 있었다.

축제기간 중 레이단을 방문하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2,000퍼센트씩 증가한다고 하니 경제적인 가치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냥멍이 페스티벌은 템빨국 입장에서도 중요한 축제로 거듭났다. 아무래도 치안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지 매번 축제마다 유라를 참석시킨다더군.”

“레전드리 클래스인 유라를 호위로 붙인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진짜 엄청난 사치군요.”

“사치? 과연 그럴까. 냥멍이 페스티벌은 사실 축제라기보다 열병식이다.”

“열병식이요?”

“한 명의 히든 클래스 전직자가 수백 마리의 동물과 몬스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군대로 부릴 수 있음을 과시하는 열병식.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축제이니 유라를 호위로 붙이는 게 사치는 아니지.”

“....!”

“히든 클래스는.... 독이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선 반드시 도려내야할 암 덩어리와 같다!!”

“다수를 위해!”

“다수를 위해!”

할레의 동료들은 깨달았다.

오늘의 표적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사실을.

***

“아이구 예뻐라. 너희 부모가 누군지는 몰라도 너를 정말 사랑스럽게 낳아주었구나.”

눈에 하트를 그린 냥멍이가 오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길고양이들과 들개들을 하나씩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무려 수백 마리의 동물들에게 하나하나 애정행각을 펼치다보니 시간이 굉장히 많이 소요됐지만 문제없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으로 축제 시간을 오후로 배정한 거니까!

“우리 듬직한 렁이하고 황소 아저씨들도 도착하셨군.”

지하에서부터 솟아나 병사들을 기겁하게 만든 자이언트 웜의 등을 쓰다듬어준 냥멍이가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미노타우르스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하하하, 신사가 따로 없구려.”

크릉! 크르릉!

다짜고짜 모자를 쓰게 된 미노타우르스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콧김을 내뿜었다.

....기뻐보였다.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분위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기사들에게 냥멍이가 물었다.

“거리의 통제는 잘 진행되고 있나?”

“예! 백성들과 관광객들의 안전에 지장이 없게끔 병사들을 철저히 배치하였습니다!!”

“사료와 간식의 배치는?”

“예! 고양이들과 강아지들이 언제 어디서든 배불리 먹을 수 있게끔 모든 길목을 사료 천지로 만들었습니다!!”

“수고 많았네. 항상 예의주시하며 동물들의.... 동물들과 백성들의 안전을 책임져 주시게.”

“예! 맡겨주십시오! 결사의 각오로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사실 레이단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혼란스러웠다.

제드노스가 새로운 영주로 부임하고 얼마지 않아 영주대리로 임명된 냥멍이는 무관도, 문관도 아니었다.

상인들을 괴롭혀온 길고양이들과 어린아이들을 오줌 지리게 만들었던 들개들을 아끼는 동물애호가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이 영주대리가 됐으니 과연 괜찮을까 싶었다.

그를 영주대리로 임명한 라우엘 재상의 선택에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레이단은 크게 발전했다.

길고양이들이 상인들을 도와 생선을 운반해주기 시작했고 들개들이 몬스터로부터 어린아이들을 지켜줬다. 매우 흉포해서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자이언트 웜은 언젠가부터 온순하게 변해 오히려 사막의 수호자로 거듭났다.

모든 백성들이 자유롭게 영지를 오갈 수 있었으니 경제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화룡정점은 냥멍이 페스티벌이다.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축제 기간마다 몰려오는 관광객들 덕분에 특수를 맞이한 레이단의 백성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레이단의 영주님은 대대로 훌륭하시구나!’

레이단은 템빨국 제2의 수도라고 불린다.

레이단 백성들의 자부심은 그만큼 컸다.

그리드부터 시작해 크리스, 제드노스, 그리고 냥멍이까지 이어진 훌륭한 영주 계보는 백성들의 자부심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었다.

열정에 휩싸인 기사들과 병사들이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고 냥멍이가 동물들을 챙기는 동안 어느덧 축제 시간이 다가왔다.

“자, 애들아. 산책 다녀오자.”

이 아이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어서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

세상사람 모두가 이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면 한다.

고양이들과 강아지들, 그리고 미노들의 털을 충분히 빗어줬다고 판단한 냥멍이가 영주성의 성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피하십.... 끅!”

털썩!

바깥에서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일제히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침입자라고?’

허를 제대로 찔렸다.

기사들과 병사들을 도시 곳곳에 분산 배치시킨 점을 역으로 이용당해 불청객이 성에 침입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고 말았다.

표정을 굳히는 냥멍이 앞에 낯선 인물들이 나타났다.

“유라가 안 보이는군. 오랜 평화가 천하의 템빨단조차 방심하게 만드는가.”

“너희는 누구지?”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묻는 냥멍이에게 침입자가 대답해주었다.

“우리는 다수 위에 군림하는 소수를 처단하고자 뜻을 모은 자들. 혁명가들이다.”

“테러리스트군.”

“....행렬에 참가하는 몬스터는 끽해야 자이언트 웜과 미노타우르스인가. 너를 지켜줄만한 재목들은 없군. 자, 대의를 위해서 죽어라.”

퍼엉!

땅을 박차고 도약한 할레가 냥멍이의 얼굴에 발차기를 꽂았다. 일단 크게 한 방 먹인 뒤 회전 뒤차기로 복부를 꿰뚫어줄 요량이었다.

한데 전투능력이 전무하다고 알려진 냥멍이가 의외로 그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아슬아슬하게나마 말이다.

‘딱히 빠른 건 아닌데 이 반사 신경은 뭐지?’

놀라는 할레를 냥멍이가 노려봤다.

“난 13마리 고양이의 집사다. 어둠 속에 도사리다가 갑자기 덤벼드는 주인님들의 습격을 매일매일 감당하며 단련해온 내게 너 따위의 기습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

“과연 냥멍이답게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일찍 죽으나, 조금 늦게 죽으나 결국 너는 죽게 돼있다.”

쿠와아앙!!

할레가 맹렬한 기세를 일으켰다.

레가스 이후 단 3명밖에 획득하지 못한 3차 전직 직업.

획득 난이도가 무려 극악으로 분류되는 <아수라>의 기세였다.

“피, 피해!!”

질겁한 냥멍이가 사방으로 사료를 뿌려 고양이들과 강아지들을 산개시켰고,

“뇌전권.”

빛살처럼 쏘아진 할레의 주먹이 냥멍이의 가슴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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