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13화
현무 신께서 부활하시어 거짓 신화를 벗겨내셨다.
만백성이 기뻐하며 기도를 올리나니, 신께서 말씀하되 인간의 도움을 받으셨다 하니라.
백성을 기만하고 이 땅을 오염시킨 가짜 신들을 템빨왕이 벌하였음에 너희는 그에게 감사하라 하니라.
‘....당연히 과장인 줄 알았다.’
찌릿! 찌릿....!
일국의 왕이자 무인.
씽왕의 정체성 중 하나는 전사다.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그의 감각은 극도로 예리하고 섬세했다.
하물며 철이 들기도 전부터 양반들을 목도해온 까닭에 강자를 느끼는 감각만큼은 초월자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그가.
‘한데 과장이 아니었어. 저자.... 아니, 저분께서는 진짜다.’
그리드를 목격하자마자 전율한다.
타고난 격과 무력으로 인류를 지배해온 양반을 해친 인간....
도무지 믿기지 않던 업적이 진실이었음을 단번에 간파한 것이다.
“템빨왕 전하.”
저벅.
옥좌에서 내려온 씽왕이 그리드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
자신을 지존이라 섬기는 대소신료들과 무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깊숙이 절을 올렸다.
“영광이옵니다. 한없이 영광이옵니다.”
“....!”
대소신료들이 술렁였다.
현무가 수놓인 황금포가 바닥에 끌려 구겨지는 모습은, 씽의 신민들이 상상치 못했던 광경이었다.
“전하께서 현무 신을 부활시켰음에 씽은 평화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나이다.”
십만의 백성을 거느렸든, 천만의 백성을 거느렸든 왕과 왕은 서로 동등해야 한다.
자신을 섬기는 신민들을 생각해서라도 상대방을 웃어른으로 섬겨선 아니 된다.
씽왕은 그렇게 믿어왔다.
설령 템빨왕에게 큰 은혜를 입었을지언정 허리를 굽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은혜에 은혜로 보답할지언정 백성들의 자부심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실제로 템빨왕을 만나자 생각이 바뀌고 말았다.
같은 왕이지만 격이 다르다.
이분께 허리를 숙이는 건 백성들을 깎아내리는 행위가 아니다. 백성들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이 그저 순수하게 존경하면 된다.
이분은 구원자니까.
“고개를 드세요.”
씽왕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리드는 씽왕과 며칠을 함께 지냈다.
아이린의 모습으로 씽왕과 함께하며 그의 성격과 본질을 대강이나마 파악했다.
도리를 아는 사람.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할 바른 길을 알기에 은혜를 잊지 않는다. 백성들에게 자랑스러운 왕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런 사람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절을 올리다니?
그리드는 원치 않았다.
시점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리드가 타인에게 무릎 꿇는 모습을 템빨단원들이 과연 달가워할까?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드를 최고라고 믿으며 그리드를 목표로 삼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그 사실을 알기에, 그리드는 황급히 달려가 씽왕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하지만 씽왕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는 대역죄인입니다. 은인께 은혜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근심을 안겨드렸으니 고개를 들 면목이 없습니다.”
“근심이라니요?”
“왕비께서.... 템빨 왕비께서 실종되셨나이다.”
‘아.’
그리드가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아이린의 얼굴로 모습을 한 번 비춰 줬어야했는데 생각이 짧아 씽왕을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런 실수를.’
스스로를 책망한 그리드가 몇 번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부인은 집에 갔.... 험험,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입니까? 적해를 건넌다는 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했던 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진데....”
“제 벗 중에 수완이 좋은 현자가 있습니다. 그자의 도움을 받으면 대륙 간 이동도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렇습니까....”
신하를 벗이라 표현함인가.
‘어떤 분이신지 알 것 같구나. 나 또한 본받아야할 것이야.’
흐뭇하게 미소 짓는 씽왕은 꿈에도 몰랐다.
벗을 텔셔틀로 혹사하는 템빨왕의 실체를 말이다.
***
‘로드는 아이린을 많이 닮아서 다행이다.’
한동안 아이린의 모습으로 생활하다가 본모습으로 돌아온 그리드는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했다.
‘주량이 1병도 안 되는 사람이 태반이었을 줄이야....’
그리드가 아이린의 모습으로 연회나 만찬에 참가했을 땐 씽의 대소신료들 모두가 술을 최소 3병 이상씩은 마셨다.
한데 오늘 본모습으로 환영회에 참석했더니 3병은커녕 1병조차 못 비우는 대소신료가 태반이었다.
술 맛 안 난다는 듯한 태도였다.
심지어 씽왕의 어린 왕자들조차 갑자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이한 청소년마냥 거리를 뒀다.
아이린의 모습일 때는 귀찮을 정도로 살갑게 굴던 녀석들이 그리드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여튼 외모가 최고군.”
“....”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리드를 피아로가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씽의 왕자들과 대소신료들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단 사실을 모르시는 건가.’
그리드는 고작 며칠 만에 절대강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이전까지의 그리드 또한 ‘전설로 남을 강자’로써 대단한 존재감을 발휘했지만 지금은 뭔가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아니, 범접해선 안 될 존재처럼 보였다.
‘실력을 겨뤄보고 싶다’는 투쟁심마저 억제될 정도.
이 느낌은 흡사.....
‘....신.’
아니, 내가 전하께 콩깍지가 씌어도 너무 씌었군.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 피아로에게 그리드가 물었다.
“황금호두를 재배할 방법은 찾아낸 건가?”
“예, 전하.”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여전히 숲에 머물러 연구 중이었으리라.
예상대로 희소식을 들려주는 피아로 덕분에 그리드의 얼굴이 활짝 폈다.
“앞으론 우리 백성들도 황금호두를 먹을 수 있겠군.”
황금호두는 열화판 엘릭서이기에 앞서서 보양식이기도 했다.
황금호두를 꾸준히 섭취하는 NPC들은 능력치가 상승하는 것뿐만 아니라 건강해지고 수명까지 늘어날 게 분명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템빨국은 서쪽이 너무 덥고 북쪽은 너무 춥습니다. 동쪽 너머에는 야탄교 본단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와 대기가 오염된 상태이지요.”
기후와 토질에 예민한 황금호두를 대량으로 재배하기엔 환경적으로 힘들다.
“템빨국에서 황금호두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은 코크로 섬이 유일합니다. 코크로 섬에서도 헬가오의 열기가 남은 던전 근처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고 한정된 구획에서만 재배가 가능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몇 그루나 심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즉답했다.
“500그루입니다.”
“황금호두를 대량으로 확보하는 건 아직 요원하겠군....”
황금호두나무 숲을 시찰했을 때 봤듯이 황금호두는 쉽게 열리지 않는다.
100그루의 나무에서 채집할 수 있는 황금호두는 매해 평균 10알이 고작.
황금호두의 원산지인 씽국조차도 황금호두를 쉽게 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실망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웃어주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동쪽의 환경을 바꿔 더 많은 황금호두 나무를 심도록 하겠습니다.”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걸릴지언정 노력은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이다.
단언하는 피아로의 모습에 희망을 얻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든든하군. 좋아 그럼 슬슬 돌아가 보도록 할까.”
동대륙을 방문한 목적은 달성했다.
백린목과 황금호두의 재배법을 확보하고 씽국과 혈맹을 맺었다.
씽왕은 자신을 친아우처럼 여겨주길 바란다고 말했을 정도다.
‘진짜로 얻은 게 많아.’
특히 환국에 방문했던 일이 행운이었다.
아이린의 신격을 생각보다 수월하게 올렸을 뿐더러 급격히 강해졌다.
세계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랜드마스터라는 든든한 우군을 얻었다.
이젠 빨리 아이린이 보고 싶다.
건강하고 젊어졌을 아이린.
그녀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열망 속에 그리드는 떠났고, 씽왕은 현무를 모셔놓은 사당 옆에 새로운 사당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
바알의 계약자.
네크로맨서를 초월하는 지배력을 지닌 망자들의 왕이자 전대 바알의 계약자 파그마의 검술을 일부 계승한 최상위 전투 클래스다.
세계관 최강의 존재 중 하나인 제1위 대악마 바알에게 히든 퀘스트를 직접적으로 공급받기도 해서 성장 잠재력이 무한했다.
만약 아그너스의 목적이 ‘강함’ 그 자체에 있었다면, 플레이어 지존의 자리는 ‘당연히’ 아그너스가 꿰찼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하기도 했다.
바알의 계약자가 수행해야하는 역할은 순수한 악역.
바알의 계약자는 홀로 세상과 대적하는 존재이니만큼 단신으로 수백, 수천 명을 도륙할 수 있게끔 설계 된 직업이다. 그만큼 성장 속도도 빨라서 심(心)을 깨우쳐야하는 검성이 아직 잠재력을 다 드러내기도 전에 완전체로 거듭나야 정상이었다.
국가대항전의 종목 중 하나인 <마왕 토벌전>이 사실은 아그너스가 본서버에서 보여줬어야 할 모습 중 하나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니 말 다했다.
“이래서야 그리드가 바알의 계약자 같네요.”
환국을 방문해 또 다시 급성장한 그리드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S.A 임원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드가 강해졌다는 점에 이의를 갖는 건 아니다.
그리드가 직업의 한계를 몇 번이나 초월해서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동안 아그너스는 직업의 잠재력조차 다 개화하지 못했다는 점에 불만을 품는 것이다.
설마 지슈카에게 패배하는 지경에 이를 줄이야....
원래라면 초국의 수도와 지슈카를 통째로 박살냈어야할 아그너스가 낮은 성장도에 발목을 붙잡혀서 패배한 모습은 S.A 임원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이대로는 바알의 계약자라는 직업을 만든 의도가 사장되게 생겼으니 게임의 미래가 걱정될 지경.
“아그너스 때문에 몇 개의 에피소드가 태동조차 못하고 소멸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운영팀과 개발팀은 바알이 새로운 계약자를 맞이해야만 위기가 해결될 거라고 전망할 정도네요.”
“그게 가장 좋아 보이는군. 애초에 아그너스는 바알의 퀘스트를 거의 다 거부했었잖아? 그래서 동화율이 낮아 빙의해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거고. 바알도 아그너스를 탐탁찮게 여길 것 같은데.”
“....그게 또 의외로 바알은 아그너스를 좋아하는 눈치라.”
“말 안 듣는 장기말을 좋아한다고?”
“바알한텐 다 장난이니까요. 아그너스의 선택과 행동들을 지켜보는 게 순수하게 재미있나 봐요.”
“그게 무슨.... 그럼 새로운 바알의 계약자도 못 뽑는다는 건가?”
“현재로서는 바알이 원치 않을 겁니다.”
“.....”
회의실이 초상집 분위기가 됐다.
최근 일부 하이랭커들이 찾아낸 ‘전설 공략법’이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했다간 아그너스가 동네북이 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Satisfy 초기, 순수한 악의로 똘똘 뭉쳤던 아그너스는 무분별한 PK를 자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한을 산 상태니까.
그리고 아그너스가 진짜로 동네북이 됐다간 바알의 계약자는 재기 불능이 될 수도 있다.
걱정이 난무하는 가운데 윤상민 이사가 입을 열었다.
“아그너스가 성장하지 못했던 이유는 첫째, 바알과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 레벨링에 집착하지 않아서고 셋째, 피할 수 있는 죽음도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말 그대로 게임을 대충했다, 이겁니다.”
사자 창조 스킬을 황당하게 소모했을 때가 특히 압권이었다.
아그너스는 최상위 랭커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엔 일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 같군요.”
운영팀장으로부터 막 도착한 보고서를 홀로그램으로 띄우는 윤상민 이사의 입 꼬리가 귀에 걸렸다.
“아그너스가 전투 중에 생명력이 위험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도주했다는 기록이 있네요.”
“....!!”
전투 중에 죽음의 위기를 느끼면 응당 도망치게 마련이다.
도망치는 게 정답이다.
죽는 순간 발생하는 페널티는 ‘막대한 시간’.
몇날 며칠을 노력해서 쌓아올린 경험치를 한 순간에 잃게 되니 누구라도 죽음을 두려워해야 옳았다.
한데 아그너스도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큰 증거였다.
아그너스가 게임에 집중하기로 했다는 증거.
“아마 곧 바알과도 교류를 시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아그너스가 새롭게 창조할 사자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대인전에선 최강을 위협받을지 몰라도 전쟁에서는 무적.
그게 바로 바알의 계약자다.
애초에 바알의 계약자가 자신의 역할만 잘 수행했어도 야탄교가 여기까지 쇠락할 일도 없었다.
아그너스가 정신을 차린 이상 균형은 반드시 맞춰질 것이다.
기대하는 S.A 임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반면 회의 내내 입을 굳게 다문 임철호 회장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제 자네만 남았네.’
검성.
성장속도가 더딘 무형지기의 개념에 크게 의존해야하는 클래스이며 전투 스킬을 직접 창조해야한다는 점 때문에 재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클래스.
성장 난이도가 무척 높지만 잠재력만큼은 최고인지라, 크라우젤이 검성이 됐을 당시 임철호 회장이 느꼈던 기쁨과 기대감은 무척 컸었다.
한데 최근 크라우젤이 보여주는 모습은 임철호 회장의 기대를 연속으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랭커치고 고집 없는 사람 없다지만 설마 ‘자신만의 검’을 논하며 전대 검성의 비급을 외면할 줄이야....
저쯤 되면 고집이 아닌 아집이다.
‘그 아그너스조차도 변했어. 이제 자네도 아집을 버려야할 때네.’
임철호 회장은 바랐고,
“.....”
영상 속 크라우젤은 또 다시 새롭게 얻은 뮐러의 비급을 이번에도 역시 펼쳐보지 않았다.
임원들은 예상했다는 듯 크라우젤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임철호 회장은 탄식했다.
이때까지는 임철호 회장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크라우젤의 행보가 비반의 자존심을 긁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