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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00화 (1,190/1,794)

템빨 61권 - 10화

날카로운 각을 만들며 떨어지는 그랜드마스터의 팔꿈치가 그리드의 손등에 밀려나고 나서야 두 사람의 공방이 멈췄다.

쩡! 쩌저저저저저정!!

스파핫! 콰르륵!!

온갖 종류의 파공성이 뒤늦게 울려 퍼졌고,

두우웅....!

곳곳에서 동시에 발생한 기파가 사람들의 옷깃과 복숭아나무를 뒤흔들었다.

“뭣, 무, 무슨?”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놀란 지발과 네오 적기사들이 뒷걸음쳤다.

갑자기 모습을 감췄던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가 사실은 자신들의 곁에서 공방을 나눴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경악한 것이다.

“꿀꺽.”

양반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체통을 지키고자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당사자 그리드다.

“허억.... 허억.... 이, 이건....”

그리드는 크레이슐러와 파그마의 격전을 잊지 못한다.

하해와 같은 신앙으로 무한한 신성력을 행사했던 크레이슐러.

수백 개의 빛의 작살을 동시에 소환해 수십, 수백 개의 궤도로 쏘았던 그의 솜씨는 위대한 권능이자 기적이었다.

불시에 생로를 잃은 파그마는 그대로 꿰뚫려 죽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리드가 봤을 땐 말이다.

하지만 파그마는 이미 2개의 검무를 완성시킨 상태였다.

터무니없는 동체시력으로 수백 개 빛의 작살을 정확히 포착하고 그 모든 것을 ‘표적’으로 삼아 화회(花回)를 전개, 크레이슐러가 일으킨 대규모 폭격을 크레이슐러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줬었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

폭발에 튀어 오른 파편들이 중력의 영향을 받기도 전에 수십 차례의 공방을 나누는 크레이슐러와 파그마를 통해서 ‘초월자가 보는 세상’을 간접 체험한 그리드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절실히 실감했었다.

한데 오늘.

“허억.... 허억....”

그리드 본인이 초월자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비록 찰나에 불과했고, 그 찰나를 겪은 탓에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리드는 마냥 기쁘고 벅차올랐다.

배신과 암투, 대립과 전쟁, 고위 대악마와 드래곤, 그리고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초월자들과 천상의 신들....

자신이 무의식중에 두려워했던 모든 개념으로부터 해방 된 기분마저 느꼈다.

그리드는 자신이 세계의 모든 개념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음을 분명하게 자각했다.

“핫....! 하하핫! 푸하하하하핫!!”

레전드리 아이템을 처음 제작했을 때도 이만큼의 성취감은 느끼지 못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대소를 터뜨리는 그리드에게 다가온 치우가 작은 목함을 건네주었다.

“그대에겐 이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1등 성적 보상으로 <무신의 비급>을 획득하였습니다.]

“저건....!”

“미르가 받았던!!”

양반들이 크게 술렁였다.

치우에게 비급을 하사받은 존재는 여태껏 미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비급의 주인공이 설마 인간이 될 줄이야.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신의 비급....’

그리드는 무신의 비급에 익숙한 몇 안 되는 플레이어 중 하나다.

무신이 만든 스킬북.

사용 시 랜덤 등급의 스킬을 습득하게 되는데 등급이 낮든, 높든 흔히 볼 수 있는 스킬은 아니다.

무신의 스킬 대부분이 뛰어난 위력이나 효용성을 자랑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무신이란 당연히 제라툴이었다.

하지만 치우가 건네준 무신의 비급의 저자는....

‘역시 치우겠지....’

동쪽의 무신 치우와 서쪽의 무신 제라툴.

둘 중 더 강한 무신은 누구일까?

누구의 비급이 더 뛰어날까?

새삼 궁금증을 느낀 그리드가 목함을 열어 무신의 비급을 감정해보았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대상 아이템의 감정에 실패하였습니다.]

“큭!?”

지끈! 눈에서 심한 격통을 느낀 그리드가 신음을 터뜨렸다.

‘뭐지?’

아주 간혹 감정에 실패하는 아이템이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감정에 실패했다고 해서 고통이 동반 된 경우는 처음이다.

마치 하면 안 될 짓을 해서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그랜드마스터가 전음을 보내왔다.

-유일신에게 범접하는 건 금기다.

‘유일신?’

절대신과도 또 다른 개념인가?

섣불리 이해하지 못한 그리드가 속삭여 물었다.

“절대신이랑 동급이라고 해석하면 되는 건가?”

-굳이 격을 논하자면 같겠지. 하지만 그대가 착각하는 게 있다. 절대신은 유일하지 않아.

맞다.

절대신은 레베카, 야탄, 한울로 총 셋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면 무신도 둘이다.

유일신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무신도 둘이잖아?”

-무신은 하나다.

“....?”

-제라툴은 치우의 복제품에 불과해.

“....!!”

-레베카로부터 비롯돼 레베카의 권능에 거역하지 못하는 제라툴과 달리 무신 치우는 유일하며 독보적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에게 간섭하지 못해.

“아니....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리드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다른 신들과 달리 인간들의 염원으로부터 비롯한 치우가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다니?

“사방신도 인간들의 염원으로부터 비롯한 진짜 신이잖아? 사방신이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어떻게 치우가 유일할 수 있단 거지?”

-사방신과 치우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사방신은 이곳 ‘동쪽의 인류’로부터 비롯한 신인 반면 치우는 ‘세상의 모든 인류’로부터 비롯한 신이니까.

“???”

-서쪽과 동쪽, 과거와 현재를 구분할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힘을 열망하게 된다. 여태껏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모든 인류가 염원했던 무(武)의 집결체가 바로 치우인데 단지 동쪽의 땅을 수호하고자 탄생한 사방신과 어찌 비교가 되겠나?

“....!”

놀라는 그리드의 뇌리에 하나의 기억이 스쳤다.

“그 다짐이 사실이라면 오존의 눈을 피해 서쪽 땅으로 떠나라. 그리고 신살의 자격을 얻어서 돌아오너라.”

먼 과거, 파그마를 떠나보내며 치우가 했던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치우는 신살에 집착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인류의 염원으로 탄생한 존재라면.... 치우는 잊힐 수조차 없다는 뜻인 건가?”

-그래, 치우는 영원불멸하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그는 결코 소멸하지 않아. 그리고 공교롭게도 인류는 멸망할 수 없다. 야탄, 혹은 누군가가 인류를, 세계를 멸망시키는 순간 레베카가 즉시 새로운 인류와 세계를 재탄생시키니까. 또 다시 그들에 의해서 치우는 존재하게 된다.

“....”

-치우를 멸할 수 있는 건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이 그를 없앰으로써 ‘인간의 힘이 신의 힘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치우는 부정당하고 소멸할 수 있다. 치우가 절대자에게, 그리고 양반들에게 집착하는 이유지.

“양반은 인간이 아닌데?”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양반의 몸에 흐르는 피 중 절반은 신의 것이오, 나머지 절반은 인간의 것이니까.

“....!!”

양반이 단지 반신이 아닌 반신반인이었다고?

“지들도 반은 인간이면서 인간을 멸시한다고?”

-본인들조차 진실을 모르는 걸 테지. 양반은 오직 한울의 의지로 탄생하고, 사육당하는 존재인데 그들이 세상물정을 어찌 알겠나? 내가 볼 때 양반의 모티브는 우리 칠선인....

“....그만. 그만 됐어.”

그리드가 두 귀를 막았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복잡한 얘기를 자꾸 듣자니 기분만 찝찝했다.

‘결론은 치우가 짱이라는 거잖아.’

양반에 대해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놈들은 무조건 적이다.

지금 느껴야할 기분은 딱 하나.

기뻐하면 그만이다.

세계관 최강의 존재가 직접 내린 보상.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으리라.

<무신의 비급>

종류:스킬북

?????

무게:10

‘....상세정보가 물음표인 게 좀 걸리지만.’

스킬북인 건 기정사실이다.

매우 높은 확률로 고등급 스킬을 습득하게 될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은 그리드가 무신의 비급을 사용하려다가 멈췄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잠재력 개방 스킬의 상태를 확인해본다.

다행히 사용 가능 상태다.

치우의 시련이 인스턴트 던전으로 분류된 것인지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됐다.

‘잠재력 개방.’

[등급을 성장시킬 스킬을 지정해주십시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스킬의 잠재력이 개방되어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감정>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됐어!’

혹시나 싶었는데 성공이다.

희열에 찬 그리드가 다시 한 번 비급 감정에 도전했다.

[대상 아이템의 감정에 실패하였습니다.]

‘큭, 역시 안 되나.’

아쉽지만 예상대로다.

두 눈을 감싸 쥐고 고통에 몸서리치는 그리드.

아까부터 자꾸 비급하고 씨름하는 그를 지발과 양반들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그때였다.

“그건 공백의 비급이니 살펴보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

치우가 조언해주었다.

공백의 비급이라니?

“공백....? 내용이 없다고요?”

“그래.”

“내용이 없는데 어떻게 비급입니까?”

그리드가 울컥했다.

당연히 속으로만 말이다.

치우 앞에서 그리드는 한없이 공손하고 겸손했다.

“무도란 부족함을 채우고자 만들어진 것. 비급의 공백은 그대가 자연히 채우게 될 것이다.”

“....”

치우의 말을 곱씹어본 그리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급의 정체를 눈치 챈 그에겐 이제 망설임 따위 없었다.

[<무신의 비급>을 습득하였습니다.]

[자신의 무력을 관조합니다.]

[깨우침을 얻어 <그리드의 검무>가 강화됩니다.]

[<초(超)>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상상 속의 초월자가 아닌, 스스로를 온전히 표출하는 검무를 춥니다.]

[<연(聯)>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아닌, 햇살처럼 뻗어나가는 절대자의 기세를 상징하는 검무를 춥니다.]

[<살(殺)>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징벌의 검무를 춥니다.]

[<파(派)>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

[<극(極)>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

[<제(制)>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

[<화(化)>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

[<락(落)>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

[<회(回)>의 스킬 정보가 변경됩니다.]

....

[새로운 검무 <천(天)>을 습득하였습니다.]

[깨우침을 얻어 심(心)이 강화됩니다.]

[<명상> 스킬이 늘 활성화됩니다.]

[<무형지기>를 더 능숙하게 다룹니다.]

[<원덕구> 사용 시, 소환 요청 대상이 전투 중일 경우 소환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깨우침을 얻어 마스터리 스킬을 통합합니다.]

[<웨폰 마스터리>와 <매직 마스터리>가 <그리드식 전투술>로 통합되며 레벨은 성장도가 높은 스킬을 기준으로 적용됩니다.]

[깨우침을 얻어 ‘빛의 상급 정령’을 해방합니다.]

[빛의 상급 정령은 당신의 곁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곁을 지킬 빛의 상급 정령은 앞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아.”

이 맛에 게임한다.

감격한 그리드가 눈시울을 붉혔다.

환국을 떠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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