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09화
양반.
반신으로 태어난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양반의 숫자는 수백인 반면 공석의 신좌(神座)는 일곱에 불과했다.
그리고 치우의 시련은 신의 자격을 얻기 위한 첫 번째 절차.
모든 양반의 열망은 치우의 시련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열린 치우의 시련에 합격한 인재는 우습게도 단 한 명.
심지어 합격자는 인간이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그토록 멸시해온 인간에게 발목을 붙잡혀 신이 될 기회를 놓친 양반들이 침묵했다. 결과에 불복한다며 소란을 피우는 양반은 당연히 단 한 명도 없었다.
싸워봤자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난 주제에 어찌 큰 소리를 치겠는가.
‘....400년 전의 시련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싸워봤겠다만.’
양반들이 물러선 이유는 겁쟁이라서가 아니다.
‘무너지지 않는 벽’에 부딪쳐봤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미 학습한 상태이기 때문에 깔끔하게 포기했을 뿐이다.
미르.
태어난 순간부터 신이 되리라 점지 받은 존재.
그가 참가했던 400년 전의 시련 역시 합격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수백 명의 양반들이 미르에게 도전했지만 모조리 처참하게 박살났고 마지막에 멀쩡히 선 양반은 미르가 유일했다.
전무후무할 줄 알았던 그 대기록을,
[플레이어 최초로 ‘치우의 시련’을 통과하였습니다.]
[당신의 성적은 1위입니다.]
인간이 부순 것이다.
은발의 인간 여성을 바라보는 양반들의 눈빛에서 오만과 편견이 사라졌다.
‘앞으론 인간을 무시해선 안 되겠어.’
채 100년도 살지 못하는 나약한 생물.
피부는 얇고, 살은 무르며, 뼈는 쉽게 부셔진다.
그나마 지능이 있어 기술을 익히고 무력을 쌓는다한들 어느 날 갑자기 요절하고 마는 게 인간이라는 생물이었다.
하여 양반들은 인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바가 없다.
인간이 달걀을 얻고자 닭을 키우듯, 단지 신격을 얻고자 인간들을 관리했을 뿐이다.
아주 간혹 신선이나 초월자가 되는 인간을 볼 때면 기형 같아 거부감, 혹은 불쾌감이나 느꼈지 대단하다고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이 순간 바뀌었다.
억만 명 중 한 명 꼴일지언정 양반을 넘어서는 잠재력을 지닌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인간을 마냥 무시하긴 힘들어졌다.
‘어차피 신격을 쌓기 위해선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차라리 인간과 두루 잘 지내는 편이 나을 수도....’
일부 양반들의 인식이 조금씩이나마 변화하는 그때였다.
‘2등부터 7등까지는 누군지 안 가르쳐주는 건가?’
그리드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치우의 시련을 상위 성적으로 통과한 7명이 누군지 미리 알아두고 싶었지만 시스템이 너무 불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리드 본인의 성적밖에 나오질 않았으니 아쉬웠다.
‘미리 알아둬야 싹을 끊어놓던가 하는데. 쯧.’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 양반과 통과한 양반의 실력 차이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크다.
해진?
대단하긴 했지만 가람과 비교하면 우스웠다.
‘....뭐, 지금은 기쁨을 만끽해볼까.’
두근. 두근. 두근....
그리드의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치우의 시련.
신을 꿈꾸는 반신들을 위한 무대에서 1등을 차지했단 사실에 그리드는 큰 자부심을 느꼈다.
보상이 중요한 게 아니다.
기고만장한 양반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줬다는 사실과, 그 양반들이 멸시했던 인간의 존엄을 지켰단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보상을 아예 기대 안 한다는 건 아니고.’
괜히 부정 탈라.
그리드는 염려했지만 기우였다.
‘플레이어가 이루기 힘든 업적’을 이뤘을 때의 보상은 늘 큰 법이다.
[치우의 시련 최초 통과 보상으로 신격이 상승합니다.]
[신격의 레벨이 5를 달성하여 반신(半神)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
신격을 올리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신위 스탯을 쌓을 것.
신위 스탯을 10개 쌓을 때마다 신격의 레벨이 1개씩 오르는 방식이었다.
굉장히 힘든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리드가 신위를 쌓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첫째,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는 것.
신화 등급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재료’가 필요한데 대악마를 토벌하거나 신을 부활시키는 수준의 결과를 낳지 않는 이상 그런 재료를 구하기란 사실상 힘들다. 하물며 3개의 신화 등급 아이템을 만들어야 1개의 신위가 오르니 아이템 제작만으로 10개의 신위를 노리는 건 기약이 없었다.
‘서사시를 써도 신위를 얻긴 하지만....’
서사시의 발동 확률은 신화급 아이템의 제작 확률만큼이나 극악이다. 게다가 서사시를 쓴다고 해서 무조건 신위가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서사시를 쓸 당시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듯했다.
그 외에도 신을 부활시킨다거나, 특별한 존재 혹은 집단에게 칭송을 받는 등 커다란 업적을 세워도 신위가 오르긴 했지만 그런 상황이 흔한 것도 아니다.
말인 즉, 신격의 레벨을 올리는 난이도는 엄청나게 높다.
그리드는 신격의 5레벨 달성까지 최소 1년을 보고 있었다.
한데 기간이 크게 단축된 것이다.
‘반신!’
꿈에 그렸던 진화.
교황청 구원 에피소드 당시에는 여러 페널티 때문에 반신이 될 기회를 포기해야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칠악성과 관계없이 순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기회다.
쿵쾅쿵쾅!
그리드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반신으로 진화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알림창에 즉시 예, 라고 대답하려던 그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치우의 표정에 실망감이 역력함을 엿본 까닭이었다.
‘뭐지?’
여태껏 치우는 이상하리마치 호의적이었다.
그 온화한 눈빛은 마치 부모의 그것과도 닮았었다.
한데 갑자기 어느 부분에서 실망했단 말인가?
“혹시 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까?”
그리드가 짬밥을 괜히 먹은 게 아니다.
사람 눈치는 못 읽어도 NPC 마음은 읽는 게 그리드였다.
반신으로 진화하겠냐는 질문에 대답을 미룬 그가 치우에게 슬쩍 운을 띄우자 치우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할 문제가 아니다.”
‘이 타이밍에 간을 보네.’
그리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치우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말을 해주질 않았으니 답답했다.
‘....가만.’
치우는 자신이 5레벨의 신격을 달성한 시점 즉, 반신의 자격을 얻은 시점부터 표정이 굳었었다.
‘내가 반신이 되는 게 내키지 않는 건가?’
왜?
인간 따위가 신이 되는 걸 원치 않아서?
아니, 치우의 성격상 그럴 리 없다.
치우는 인간으로부터 비롯한 존재인 만큼 인간을 아끼는 편이다.
시련 속 과거에 등장했던 치우가 파그마를 도왔던 이유도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설마?’
그리드가 생각해보았다.
‘초월의 격’은 ‘초월자’라는 신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그리고 그리드가 초월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신이 되는 순간 그리드는 ‘반신 중에서’ 평범해진다. 기준점이 인간에서 반신으로 옮겨지면서 ‘초월’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제가 반신이 되면 초월의 격을 잃게 되는 겁니까?”
‘반신이 된다고?’
제3자 입장에서 들었을 땐 두서없는 질문이다.
지발의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치우는 찰떡 같이 알아들었다.
“맞다.”
“....!”
그리드가 현기증을 느꼈다.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심정이었다.
급기야 주저앉는 그에게 그랜드마스터가 말했다.
“초월자보단 반신이 낫다.”
그랜드마스터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무저갱에 봉인당해 있는 그의 본신은 반신이며, 현재 그리드의 곁에 선 그는 초월자다.
반신과 초월자를 모두 경험해본 그랜드마스터는 반신의 능력이 초월자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리드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준 그랜드마스터가 말을 잇는다.
“잠재력은 초월자가 더 크다.”
“....?”
초월자보단 반신이 낫다는 그랜드마스터의 말에 위안을 얻고 정신을 수습해가고 있던 그리드가 혼란을 느꼈다.
반신은 신이 되기 위한 발판이다.
1차 전직이 반신이라면 2차 전직이 신인 셈이다.
한데 반신보다 초월자의 잠재력이 더 높다니?
“신을 죽일 수 있는 건 신이 아닌 초월자니까.”
“....!!”
신살자.
초월자의 최종 진화 형태 중 하나.
신들에게 복수하길 꿈꾸는 그랜드마스터가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그대가 인간이길 바란다.”
반면 치우는 침묵했다.
소멸을 꿈꿔온 치우 역시 그리드가 반신이 아닌 초월자에 머물기를 바랐지만, 자기 개인의 욕심 탓에 한 사람의 운명에 개입할 생각은 추호도 없던 것이다.
칠선인을 부활시켜 세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겠다는 그랜드마스터와 달리 치우에게는 대의가 없었다.
“....”
그리드가 침묵했다.
노을을 등진 그의 얼굴은 암운이 드리운 것처럼 어두웠다.
그랜드마스터와 치우, 그리고 양반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귀를 후빈 지발이 입을 열었다.
“신 그거, 인간도 될 수 있는 거 아니냐?”
“....!”
지발의 관점은 이곳에 있는 모두와 다르다.
그는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는 플레이어의 지존이 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실히 체험해보기도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너는 신이 되고 싶은 거지? 그럼 신을 죽이고 신이 되면 되잖아?”
그리드는 현재 아이린의 모습으로 있다.
하지만 그랜드마스터가 그리드를 알아봤듯 지발 또한 그리드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다.
치우의 시련이 끝난 후 아이린이 보여준 말투와 행동이 그리드를 쏙 빼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중요한 대목에 놓인 그리드는 아이린을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아이린에게 신위를 주겠다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방심한 걸지도 모른다.
“너....”
자신을 대하는 지발의 말투와 태도가 변한 것을 느낀 그리드가 당황했다.
하지만 지발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는 단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넌 할 수 있을걸?”
“....”
“지존이잖아.”
“....!”
20억의 정점을 찍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단 한 명, 그리드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존인 것이다.
좋고 싫음을 떠나서 지발은 그리드의 실력을 신뢰했다.
그랜드마스터와 치우가 그리드에게 품은 기대 이상으로 그리드를 높이 평가했다.
결국.
“....결정했다.”
[반신으로 진화하시겠습니까?]
앞으로의 운명이 담긴 질문에, 그리드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됐어. 안 해.”
그리드는 본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서사시를 통해서 신이 되고자 선언했던 가장 큰 이유는 양반과 오존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지 어떤 혜택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신 그 자체가 아닌 신살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사실을 망각해가고 있었다.
알림창이 호응했다.
[반신이 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신격의 5레벨 달성 보상이 변경됩니다.]
[초월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앞으로 당신은 남들과 다른 세계를 봅니다.]
“환영하마.”
드물게 미소지은 그랜드마스터가 다짜고짜 공격을 날렸다.
그의 주먹과 발차기는 모두 섬광과 같아서 지발의 눈에는 빛이 번쩍이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랜드마스터의 공격에 모조리 반응했다.
본래라면 코뼈가 주저앉았을 상황을 뺨이 베이는 정도로 모면했고, 본래라면 무릎이 박살났을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반격하기도 했다.
초월자가 바라보는 세상.
크레이슐러와 파그마의 대결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세상이 그리드에게도 열린 것이다.
[당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당신은 약점을 노출하지 않고 치명타를 저항합니다.]
진정한 초월.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도 수십 명밖에 도달하지 못한 경지.
그 절대적인 경지에 그리드가 발을 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