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07화
눈알을 뽑아버리겠다.
양반 해진의 말버릇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땅을 보고 걸어야할진대, 간혹 고개를 치켜드는 놈이 있어 으름장을 놓을 때면 지껄이곤 했다. 실제로 행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상대방의 공포나 고통 따위는 고려치 않았다.
하늘 아래 으뜸이 양반이므로 당하는 자의 입장을 생각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꺄아아아아악!!”
왼쪽 눈을 베인 해진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선박을 뒤흔들었다.
순간 나부끼는 기파 탓에 갑판이 파도를 타듯이 출렁였다.
그 위에 태연히 선 그리드가 해진을 비난했다.
“눈깔 뽑혀보니까 어때? 아프지?”
“윽....! 으으윽!!”
세상의 절반이 사라진 듯하다.
협소해진 시야 안에 은발의 인간 여자를 간신히 잡아넣은 해진이 저주를 퍼부었다.
“네놈은....! 네놈은 태초 이래 가장 처참하게 죽은 인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이 되는 순간 네놈의 혈육을! 네놈과 연이 닿은 놈들 전부를 샅샅이 찾아내 사지를 절단해 죽일 것이다!!”
공백의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물든 세상에 붉은 물감이 날카롭게 뿌려진다.
극의에 이른 해진의 분노와 살의가 치우의 심상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과연....’
짤랑.
치우가 새삼 인정했다.
양반은 한울의 걸작이다.
파그마는 자애를 베풀기 위해서, 가람과 해진은 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르는 본인의 재능에 매몰되지 않고자.
성향에 따른 차이점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양반은 어떤 계기만 있으면 신살의 자격을 꽃피울 정도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아이들이 그대에게 안식을 선사할 것이오.”
‘이런 아이가 계속 나타나 미르와 협력한다면....’
한울의 약속을 떠올린 치우가 해진에게 기대감을 품는 그때였다.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드의 한쪽 눈에 불온한 기운이 맺힌다 싶더니 해진에게 어떤 영향을 행사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해진의 분노와 살기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고 그녀의 의지에 영향을 받은 세계는 여전히 그녀에게 강력한 힘을 실어줬다.
‘뭐지?’
거세안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그리드가 의아해하는 와중에도 해진의 전투력은 증폭됐다.
콰득! 콰드드드득!!
순백의 세계에 뿌려졌던 붉은 물감이 하나로 집결되며 검의 형상을 갖춘다.
철컥!
살기에 에워싸인 붉은 검이 해진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드가 두 번째 시련에서 화신의 폭풍을 전개했듯이, 해진 또한 치우의 심상세계에 자신의 심상을 새겨 넣은 것이다.
그리드가 일으켰던 화신의 폭풍도, 해진의 손에 쥐어진 붉은 검도 치우가 부정하는 순간 사라질 덧없는 신기루에 불과했지만 치우는 잠자코 지켜봤다.
이 세계는 무(武)의 증명을 위해 만든 공간.
치우는 참가자들을 제약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위기감을 느낀 그리드가 재차 거세안을 발동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거세안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해진을 강화하고 있는 이로운 효과가 물리력이 아닌 심상에 기인한 까닭이다.
그녀를 약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방법은 그녀의 마음을 부수는 것이지 마안이 아니었다.
“하아압!!”
해진의 공격이 시작됐다.
붓을 타는 물감처럼 휘고, 번지고, 뻗어나가는 그녀의 붉은 검은 공격 범위가 무척 넓고 경쾌해서 피하기가 힘들었다.
깡! 까강! 까가가강!!
“끅....!”
[12,31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3,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2,8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해진과 검을 부딪칠 때마다 그리드는 손목이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신화급 무기 염룡검을 4천이 넘는 근력으로 휘둘러 맞상대하는데도 힘에서 역으로 밀렸다.
‘무슨 이딴 공격력이?’
그리드 또한 이미 버프 스킬들을 몸에 두른 상태다.
순수한 힘 싸움에서 밀렸단 사실은 꽤나 충격이었다.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방어력이 무색하다는 점 또한 황당했고.
까강! 까가강!!
검격을 교환할 때마다 한 발자국씩 물러나던 그리드가 급기야 갑판의 끝까지 밀려났다.
“하하핫! 요행이 끝나자마자 벼랑까지 몰리는 꼴이라니! 인간의 힘이란 정녕 하찮구나!!”
“큭!”
기고만장한 면상을 당장 후려 쳐주고 싶다.
곧바로 괴완공의 힘을 꺼내 면상을 납작하게 만들어줄까, 그리드는 고민하다가 이내 관뒀다.
평타 한 방, 한 방이 모두 강력한 해진을 상대로 한 번의 힘싸움에서 이겨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패배를 모르는 힘>을 벌써부터 꺼내는 건 시기상조다.
‘....가만, 평타?’
까앙!!
[11,98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게 과연 평타인가?
[강력한 살의가 덮쳐옵니다.]
[강력한 살의가 덮쳐옵니다.]
의문을 느낀 그리드가 아까부터 계속 경고를 보내오는 초월자의 감각에 집중했다.
[강력한 살의가 덮쳐옵니다.]
경고는 해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떠올랐다.
매번 말이다.
‘이 괴물 자식.’
그리드가 파악했다.
아직 그 어떤 숨결도 개방하지 않은 해진의 공격력이 여태껏 만나온 다른 양반들을 초월하는 이유.
그건 그녀의 공격 하나하나가 모두 스킬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필 살(殺)의 위력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한 스킬 말이다.
‘무한 스킬 난사는 너무 사기 아니냐?’
쿨타임 제로의 스킬....
정말로 희귀하고 사기적인 특성 아니, 권능이다.
‘이래 뵈도 명색이 반신이었지.’
주작 신과 브라함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쉽게 양반들을 해치웠던 경험 탓에 양반의 무서움을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새삼 깨닫는다.
양반은, 반신은 정말로 강력한 존재다.
그렇기에 더욱 더....
깡! 깡! 까앙!!
“하하핫! 나약하구나! 피를 흘려대는 꼴을 보아하니 곧 죽겠어! 하지만 견뎌라! 악착같이 견뎌 살아 남거라! 네놈은 최대한 고통을 맛보다가 죽어야하니까!!”
....없애야한다.
인간의 아픔에 공감 못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아끼는 이놈들이 신이 되는 꼴은 도무지 못 본다.
서사시의 다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은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이제 고작 반 보.
반 보만 더 뒤로 밀려나면 그는 선박에서 추락하고 만다.
그리고 이 선박은 온통 하얗게 물든 세상에 남은 유일한 무대다.
떨어지는 순간 시련에서 탈락할 거란 사실쯤, 그리드는 뻔히 예상했다.
“하하핫!! 발악해! 쥐새끼처럼 도망쳐 보라고!!”
콰르륵!!
붉은 검이 뻗어 나간다.
3미터의 간격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찌르기가 살(殺)에 비견되는 위력을 내포한 채 그리드를 덮쳤다.
회(回)로 맞받아친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해진의 스킬 위력이 살에 그치는 이상 그냥 힘으로 압도해버리면 그만이다.
상성이라는 것이다.
“극살.”
쩌어어어어엉!!
“....!?”
해진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이어서 신음을 터뜨렸다.
“윽!”
여태껏 힘으로 완전히 압도했던 상대에게 도리어 밀리다니?
검을 쥔 손과 팔이 부르르, 경련하다가 잠시 감각이 사라지자 해진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젓더니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한 번쯤이야 우연히 밀린 거라고 믿은 것이다.
“하압!!”
“초연화.”
쩌저저저정!!!
“끼야아아악!!”
꽃잎처럼 나부끼는 검기의 폭포.
힘겨루기에서 밀린 건 고사하고 넝마가 된 해진이 휘청,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똑바로 섰다.
‘뭐지?’
반드시 죽이겠다는 심상의 구현에 성공한 해진.
붉은 검을 손에 쥔 순간 끓어오르는 용력을 느꼈던 그녀는 천하무적이 된 심정이었다.
한데 마치 덧없는 꿈처럼 입장이 바뀌어버렸으니 황당했다.
‘요행 따위가 아니었어.’
눈앞의 왜소한 인간 여성이 갑자기 거대하게 다가온다.
경계심을 품은 해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이린이라는 이름이었던가?
한낱 인간 주제에 이만한 저력을 숨겨뒀을 줄이야.
‘....아니, 한낱 인간이 아니지.’
해진이 실소를 터뜨렸다.
자조적인 냉소였다.
눈앞의 인간이 특별한 존재임을 뒤늦게 깨달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지크의 사도.’
그래, 눈앞의 인간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과거 반신의 경지에 올랐던 칠악성 중에서도 가장 특출했다는 6악 지크에게 선택 받은 사도다.
설령 인간이라고 해도 보통내기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반신을 목표로 수행하는 신선쯤으로 평가함이 옳을 수도 있다.
‘좋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쉽게 이기지 못하는 게 당연한 상대다.
싸우면 상처를 입는 게 당연한 상대다.
나는 월등하지 않다.
그러므로 더, 더, 더 강하게 몰아붙여야한다.
촤학. 촤하학.
새하얀 세계 곳곳에 붉은 물감이 새로이 뿌려졌다.
그리고 벼락처럼 떨어져 해진의 붉은 검 위로 덧칠됐다.
코오오오오....
요동치는 핏줄기 같다.
해진의 붉은 검이 더 크고 화려해졌다.
깃든 기세가 배는 강력해진 느낌이었다.
심상이 강화된 것이다.
콰앙!!
이제 확실히 이긴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장담한 해진이 그리드에게 쇄도하며 검을 힘껏 휘둘렀다.
붉은 검이 남기는 궤적은 잠시 뒤 그리드가 흘리게 될 피의 궤적을 암시하는 듯했다.
해진의 입 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연살화극.”
까가가가가강!!
“초연살극.”
“....!?”
해진의 공격이 모조리 파쇄 당했다.
그러면서 드러낸 빈틈을 공략당해 가슴과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은 해진이었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끝이다.
곧 끝이다.
이놈에겐 더 이상의 저력이 없다.
반면 나는 아직도 검을 휘두를 여력이 있다.
그저 베고, 찌르고, 후려치다 보면 당연히 내가 승리할 것....
긴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 가속되던 해진의 사고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화려한 검술을 펼치며 앞으로 다가온 지크의 사도가 또 다시 같은 검술을 사용한 까닭이다.
“초연살극.”
“....!?”
이번엔 방어조차 못했다.
몸을 난도질당하는 해진의 머릿속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신장?’
어떻게?
6악 지크의 사도가 4악 타렌의 권능을...?
쿠당탕탕!!
“쿨럭, 쿨럭! 끅....!”
그리드와 해진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갑판 끝까지 내몰린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해진이었고, 심지어 그녀는 중상을 입어 검은 피를 토해댔다.
감히 내려다보며 다가오는 지크의 사도를 지켜보는 해진의 얼굴에 딱히 공포심은 어리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핫....! 하하하핫! 바보 같은 놈! 사실 이곳은 치우의 심상세계다! 현실이 아닌 가짜라고! 이 거짓된 세계에서 네놈이 살아남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면서 쓴 모든 검술과 권능을 이 내가 똑똑히 체험했고, 기억했다!! 시련이 끝난 후에 현실로 되돌아가면 네놈은 기필코 내게 죽을 것이야!!”
“....”
죽일 수 없는 건가?
아쉽게 됐지만 뭐, 괜찮다.
해진이 시련에 통과하는 일만큼은 막았으니까.
더군다나.
“괜찮아. 너는 아직 못 본 게 더 많거든.”
[<그리드의 검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물리 공격력, 치명타 확률, 치명타 공격력이 10퍼센트씩 상승하고 5종류의 융합 검무를 새로이 창조할 수 있습니다.]
해진은 그리드에게 남은 수가 첫 번째 시련에서의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 하나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해진이 자존심 때문에 백호의 숨결과 청룡의 숨결을 꺼내지 않고 있듯, 그리드 또한 아직 밑천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삼십만대군 잠행검.”
“....?!”
“십만대군 학살검.”
“....!!”
“이십만대군 분쇄검.”
“....끼야아아아악!!”
쩌적! 쩌적! 쩌저저적!!
난도질당하는 해진의 손에 쥐어진 붉은 검이 균열을 일으킨다 싶더니 이내 산산이 조각나 사라졌다.
공포....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을 견뎌내지 못한 마음이 부서진 것이다.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쐐기를 박는 거세안.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한 줌의 힘마저 잃은 해진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주저앉고 말았다.
피로 젖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 선박에서 떨어뜨린 그리드가 선착장 쪽에 선 양반들을 오시했다.
“다음.”
오싹!
양반들은 은발의 사신을 보았다.
가람과 마루 같은 귀재들도 인계에서 생을 마감했음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