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05화
발접(裂蝶)은 령(靈)이다.
대상이 죽을 때까지 찢어발기는 지독한 악령으로, 위령이나 제령이 불가능했다. 오직 신성으로 불태우는 방법 외엔 저 톱날 달린 나비들을 퇴치하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화르르르륵!!
“……!!”
지크의 사도가 미련하게 칼부림이나 치다가 죽을 줄 알았던 양반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마 전까지 자신들이 사용했던 주작의 숨결을 훨씬 압도하는 불꽃.
주작의 강림, 혹은 미르의 힘을 연상시키는 거대하고 신성한 불꽃을 지크의 사도가 일으킨 것이다.
그녀를 덮쳤던 수천 마리의 발접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자 양반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짤랑, 짤랑.
치우의 목과 머리카락에 달린 방울들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치우가 웃을 때 움직이는 근육들에 대한 반응이었다.
“과연 주작의 아홉 번째 심장을 품은 인간답군.”
“아홉 번째 심장……!?”
양반들이 귀를 의심했다.
주작의 힘의 근원이 담긴 10개의 심장 중 하나.
오존조차 빼앗지 못했던 그것을 인간이 품고 있다고?
꽈드득!
해진이 이를 갈았다.
그녀는 한울께 주작의 9,857번째 심장을 선물 받고 감격했던 과거의 자신을 지우고 싶었다. 주작이 부활에 성공하자 사라졌던 그 심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자신을 나무라고 싶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해진의 얼굴이 급기야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인간이 가진 것보다 못한 것을 갖고 기뻐했던 자신이, 인간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자신이 부끄러워 미칠 노릇이었다.
그녀가 살면서 이토록 큰 수치심을 느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양반들의 심정 또한 비슷했다.
주작이 부활한 까닭에 주작의 심장을 잃은 이들, 혹은 아직 심장을 품고 있지만 곧 소멸할 것임을 직감하고 있던 이들 모두가 지크의 사도를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봤다.
그리드는 그들의 살기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반응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주작의 심장을 품은 걸 알고 있었어?’
저 멀리 팔짱 끼고 선 치우를 마주 보는 그리드가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이 주작을 부활시킨 장본인임을 들킨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단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시련 자체가 함정이었어.’
망했다.
치우의 시련에서 뭔가를 얻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개뿔, 얻기는커녕 죽게 생겼다.
‘여기서 템 떨궜다간 회수도 못할 텐데.’
콰르르르륵!
나비 떼는 이미 모조리 불타 사그라졌지만 그리드는 화신의 폭풍을 거두지 않았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치우와 수십 명의 양반들에게 고립당한 그리드는 화신의 폭풍에 의지하는 방법 외엔 활로를 엿보지 못했다.
‘화신의 폭풍이 유지되는 동안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돼.’
치우의 시련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리드가 옮겨진 공간.
즉, 지금 선 이 땅은 기존의 세계와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치우의 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되는 치우의 심상이다.
‘브라함이 심상세계의 약점을 이야기해 준 적 있던가?’
“그대의 격은 잘 봤다. 그럼 이제 세 번째 시련을 시작하지.”
짤랑.
“……!!”
극도로 긴장한 채 화신의 폭풍을 유지하던 그리드의 표정이 왈칵 무너졌다.
치우의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그리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화신의 폭풍이 소멸한 까닭이었다.
그리드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치우의 손바닥 위에 놓인 신세임을.
좌절하는 그리드의 시야가 암전됐다.
***
카응! 카으응!!
“…….”
무엇이 그토록 서럽고 고통스러운 걸까.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에 눈을 뜬 그리드가 푹신한 융단의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서히 두 눈을 크게 떴다.
은은한 조명에 물든 대전의 풍경이 보였다.
크고 화려한 공간이다.
붉은 벽지에 반사되는 조명이 값비싼 가구와 장식품들을 더욱 고급스럽게 가꿔 주고 있다.
몇 가지 흠을 꼽자면 복숭아 향기가 진동하는 술병이 사방팔방에 널브러져 있다는 점과, 대전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철창이 대전 중앙에 우뚝 서 있다는 점이다.
가장 최악은 푸른 도포를 입은 청년들의 행태였고.
“하하핫! 이 짐승 새끼가 우는 꼴을 보라지! 가엽구나! 가여워!”
“목이 마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술을 한 병 더 먹이는 게 어때?”
“우리가 마실 술도 부족한 판국에 술은 무슨 술? 소변이나 끼얹어 주면 그걸로 충분하지.”
콸콸콸!
도포를 풀어 헤친 청년들이 철창 안에 오줌을 싸지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술을 퍼마셔 댄 건지 폭포수처럼 이어지는 오줌 줄기에서 알코올 냄새가 진동한다.
“……?”
이게 무슨 상황이지?
영문 모를 상황에 멍하니 있던 그리드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양반들이 오줌을 싸는 철창 안에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고양이를 목격한 것이다.
신비로운 푸른 털의 고양이였다.
아니, 고양이라고 보기엔 머리와 발이 너무 크다.
이마의 무늬를 보아 영락없는 호랑이다.
“…아!”
그리드가 새끼 호랑이의 정체를 눈치챘다.
청호다.
수백 년 전 어린 시절의 청호.
“이 개XX들이……!”
어찌 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과거로 왔다.
자신의 상황을 대충 파악한 그리드는 일단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청호를 돕기 위해 철창으로 달려가 양반들을 밀쳤다.
“어쿠?”
술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비틀, 갈대처럼 휘청거리며 오줌을 싸지르던 양반들이 단체로 벌렁 나자빠졌다.
뒤엉켜 서로의 오줌으로 범벅이 된 그들이 도끼눈을 뜨고 호통 쳤다.
“파그마! 네놈이 드디어 미친 거냐!!”
‘파그마?’
지금 날 파그마라고 부른 건가?
당황한 그리드가 옆에 있는 거울을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움찔 놀라 뒷걸음쳤다.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의 청년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랜디가 재현했던, 그리고 크레이슐러의 회상 속에서 목격했던 파그마의 모습보다 한참 젊은.
이제 갓 약관이나 되었을까 싶은 시절의 파그마다.
‘뭐지?’
내가 과거의 파그마에게 빙의한 건가?
왜?
혼란에 휩싸이는 그리드의 뇌리에 치우의 음성이 떠올랐다.
“그럼 이제 세 번째 시련을 시작하지.”
…맞다.
지금은 치우의 시련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리드가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바지춤을 추스른 양반들이 그리드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미친놈이!”
짜악!
뺨이 얼얼하다.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그리드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만큼 양반의 손이 맵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리드의 방어력이 하락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얼얼한 뺨을 붙잡은 그리드가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파그마
레벨:256
종족:양반
직업:초급 검사, 초급 대장장이
…….
…….
…….
공교롭게도 그리드의 모든 능력치는 수백 년 전 파그마의 능력치를 적용받고 있었다.
현재 보유 중인 장비와 스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허접이잖아?’
아무리 오래전 시점이라지만 양반이 맞나 의구심이 생길 지경.
그리드의 뺨을 때렸던 양반이 이어서 그리드의 멱살을 붙잡았다.
“네놈이 이제는 짐승을 감싸는 기행마저 벌이는구나. 너처럼 정신 나간 놈이 나와 같은 양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소름 끼치도록 싫다. 역겨워 구역질이 치솟을 지경이야.”
신경질적인 표정과 분노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어딘지 익숙하다.
자신의 멱살을 붙잡은 놈을 빤히 쳐다보던 그리드가 이내 놀라서 소리쳤다.
“가, 가람!”
“핫! 왜? 내가 누군지 몰라봤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 뀐 가람이 그리드를 밀쳐냈다. 그리고 구겨진 융단 위에 침을 퉤, 뱉더니 일행과 함께 대전을 떠났다.
카릉…….
철창 안의 어린 청호가 그리드를 빤히 쳐다본다.
맑게 빛나는 동그란 눈동자가 순진무구했고 숨소리는 구슬퍼 철창 안에 갇힌 꼴이 더욱 가엽게 다가왔다.
“괜찮아?”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스킬 목록에서 보았던 <주작의 숨결>을 전개했다.
그러자 따스한 불길이 흠뻑 젖은 채 축 늘어져 있는 청호에게 스며들어 청호의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진짜 뭣 같은 XX들.’
가까이서 청호의 상태를 살핀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흉측한 채찍 자국과 새빨간 피멍이 청호의 작은 몸 위에 가득 새겨져 있었다.
“빨리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하다.”
털이 뽀송뽀송해진 청호의 몸을 쓰다듬는 그리드의 표정이 어둡다.
양반들이 오줌을 싸기 전엔 나서 줬어야 했는데, 둔해서 상황 파악을 빨리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크릉…….
철창 사이로 간신히 머리를 뺀 청호가 웅크려 앉은 그리드의 정강이에 마구 얼굴을 비벼 댔다.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듯했다.
‘제기랄…….’
과거의 한 장면을 재현한 공간일 뿐이다.
이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 봤자 미래에, 현실에 영향을 끼치진 못한다.
심지어 자신은 세 번째 시련의 내용에 집중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언제, 어떤 형태로 시작될지 모를 시련에 대비해야만 했다.
그리드는 뻔히 알고 있었지만…….
스륵.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 쥐었다.
소드 마스터리 스킬로 분류되는 <양반의 검술> 레벨이 아직 초급에 불과했지만,
“파그마의 검무.”
습득하고 있는 검술이라곤 고작해야 연(聯)과 파(派) 2개의 단일검무뿐이었지만.
“파연(派聯).”
그리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철창의 자물쇠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문이 열리자 겁을 먹고 뒷걸음치는 청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나는 널 해치지 않아.”
양반들이 철창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기에 이토록 몸을 떤단 말인가.
가여운 청호를 품에 안아 도포 속에 숨긴 그리드가 곧바로 대전을 뛰쳐나갔다.
“놈!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멈춰라!!”
가람과 양반들이 기와집 곳곳에서 뛰쳐나왔다.
아무래도 자물쇠를 수십 번이나 내리쳤더니 소음이 컸던 눈치다.
“게 서라니까!”
‘너 같으면 서겠냐!’
양반들은 그리드가 허겁지겁 도망치는 와중에도 도포를 몸에 두르고, 갓을 쓰고, 비단신을 챙겨 신느라 채비가 늦었다. 심지어 어떤 양반은 담뱃대까지 주섬주섬 챙겼다.
덕분에 잠시나마 추격을 따돌리고 환국 어귀에 다다른 그리드가 기다란 강가를 시야에 담았다. 도대체 끝이 어딘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큰 강이었다.
“허억… 허억…….”
선착장에는 커다란 선박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리드는 차마 그 위에 올라탈 자신이 없었다. 선박에 있는 사람들도 적일 확률이 높았을뿐더러 선박을 빼앗아 달아나기에는 조타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룻배 위에 올라탄 그리드가 힘껏 노를 젓기 시작했다.
“걱정 마. 내가 북두산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미래에서 청호와 만났던 장소를 떠올린 그리드가 어린 청호를 연신 안심시켰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리드의 심장도 쿵쾅쿵쾅 뛰고 있단 점이었다.
그리드 본인부터가 두려움과 긴장감에 떨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덜덜덜.
현재 그리드의 시점에서 봤을 땐 저질이나 다름없는 파그마의 체력이 벌써 한계에 봉착한 까닭이다.
노를 젓는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고 덜덜 떨리는 팔과 다리는 제대로 통제가 되질 않았다.
둥! 두둥! 두웅!!
선착장에서 북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거대한 선박이 출항했다.
선박은 그리드 혼자서 노를 젓는 나룻배보다 몇 배나 더 빨랐고 순식간에 나룻배를 따라붙었다.
“괘씸한 놈!”
분노에 찬 가람의 외침이 강 옆으로 늘어진 산과 산 사이를 따라 메아리쳤고,
파팟! 파파파파팟!!
수십 발의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제길!’
그리드는 당연히 포기하지 않았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온 연과 파를 교대로 사용하여 화살들을 요격한 후 이어서 다시 날아오는 화살들은 융합검무 파연으로 막아 냈다.
하지만 급기야 직접 덤벼 오는 가람을 감당할 검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자격도 없는 놈이 멋대로 떠나려 하다니! 고작 짐승 새끼 한 마리를 구하겠다고 오존을 배신하는 것이냐!!”
가람의 입장에선 합당한 비난.
그렇기에 그리드를 겨누는 가람의 검에는 진심 어린 살기가 어렸다.
‘위험……!’
그리드의 시선이 자신의 심장을 찔러 오는 가람의 검을 좇는 순간이었다.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더니 멈춰 버렸다.
시간이 정지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허공의 가람이 그대로 멈춰 있는 광경을 보고 놀라 헛숨을 들이켜는 그리드의 등 뒤에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왜 구했지?”
모든 게 멈추고 소리마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치우와 그리드의 음성만이 교차했다.
“그럼 보고만 있습니까?”
“구할 힘이 없었을 텐데.”
“그건 싸워 봐야 알 일이었죠.”
“1초 뒤에 죽었을 거다.”
“모를 일입니다.”
현무, 백호, 청룡의 숨결.
그리드에겐 아직 사용하지 않은 스킬이 3개나 남아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쉽게 흥분해서 덤벼 오는 가람의 일격을 백호의 숨결로 막아 낸 후 청룡의 숨결로 강을 감전시켜 그대로 실신시킬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틈에 선박으로 옮겨 타 현무의 숨결로 독무를 뿜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려고 했다.
뭐, 먹혀들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말이다.
무심했던 치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행례의 연출 수단에 불과한 검무를 거기까지 발전시킨 집념도, 패기도 마음에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