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04화
양반에게 환국은 보금자리이자 철창이었다.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고 신격을 쌓기 위해선 반드시 탈출해야하는 감옥.
하지만 탈출은 쉽지 않았다.
환국과 인계를 자유롭게 오갈 자격은 단 7명의 양반에게만 쥐어졌으니까.
치우의 시련을 상위 성적으로 통과한 이들.
그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양반들이 인계에 강림하기 위해선 오존의 허락이 필요했다.
파그마 등 몇 명의 양반은 멋대로 환국을 탈출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끝은 좋지 않았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시련을 치를 기회를 주실 심산이라면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양반은 치우를 싫어한다.
존귀하신 오존을 업신여기는 치우에게 호감을 품는다는 게 생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치우의 무력만큼은 숭상했다.
치우가 만든 규칙을 누구보다 잘 따르는 존재가 양반이기도 했다.
“좋다.”
치우의 시련은 정기적인 행사가 아니다.
어떤 기준이 근거인진 몰라도, 치우는 짧으면 수십 년에서 길면 수백 년에 한 번씩 시련을 개최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말이다.
양반들은 늘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했고 지금 당장에라도 시련에 뛰어들 준비와 각오가 되어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어!’
치우가 양반들에게도 시련에 참가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자 해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가장 최근의 시련에서 22등의 성적으로 시련을 통과했던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7좌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루, 나은, 한결, 하랑, 싸울, 마루, 가람 등.
7좌였거나 7좌에 가까웠던 양반들이 모조리 죽었으니 그 빈자리 중 하나를 자신이 반드시 꿰찰 수 있다고 믿었다.
“저도 좋습니다.”
마침 인간 여자도 시련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다.
눈치껏 물러날 줄 알았는데 예상 외였다.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놈이었구나.’
오존과 함께하기를 거부한 지크의 사도답게 사태 파악을 못한다.
설마 진짜로 치우의 시련을 수락할 줄이야.
이쯤 되면 죽으려고 작정한 듯하다.
‘뭐, 죽는 건 자유라지만.’
해진이 쯧, 혀를 찼다.
그녀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치우에게 향했다.
애초에 치우가 문제였다.
괜한 변덕으로 인간에게 시련을 제안하다니.
‘장난이 너무 지나쳤어.’
예전부터 치우는 이상했다.
이해 못할 기행으로 혐오감을 일으켰던 파그마에게 호감을 표한 적이 있었을 정도다.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신을 위한 시련에 인간이 참여하는 순간 시련의 격이 떨어질 텐데.’
신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은 격이다.
더 높은 격을 쌓아야만 신에 가까워졌고, 더 강한 신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치우의 시련은 통과하는 것만으로 격을 높여주는 일종의 은총이었다.
신이 신에게 내리는 은총.
그 은총을 인간과 나눠 갖게 되는 순간 도리어 독이 되지 않을까?
해진과 양반들은 염려했다.
잠자코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 양반 몇 명이 원성을 보냈다.
“정말로 인간에게 치우의 시련에 참가할 자격을 주려는 겁니까?”
“안 될 말입니다. 어찌 하등한 생물에게 고귀한 시련을 안기는 겁니까?”
“말은 바로 해야지.”
짤랑짤랑.
치우의 목걸이와 머리끈에 달린 방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입 꼬리가 솟구치면서 안면 근육이 움직인 여파였다.
작은 변화에도 반응할 정도로 치우가 치장한 방울들은 민감했다.
“내가 이번 시련을 개최하는 이유는 이 인간의 무위를 목도하기 위함이고 너희는 그에 편승했을 뿐인데 이제 와서 인간의 자격을 묻는다고? 그게 무슨 염치지? 도리어 감사해야하는 거 아닌가?”
“.....”
양반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인간을 위해서 개최하는 시련이라니, 어처구니없는 궤변이었다.
치우의 시련은 신의 자격을 묻기 위한 시련일진데 어찌 인간이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늘 그랬듯 변덕을 부리는 치우에게 질린 양반들이 말문을 닫는 반면 해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하시면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요.”
해진은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자신에게 도전적인 시선을 보내는 인간이 좌절하고 절망하며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나하고 눈이 마주치다니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네 같은 놈은 기어코 눈알이 뽑혀봐야 주제를 알지.”
그리드와 마주보고 선 해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진득한 살기가 배인 미소였다.
반신의 살기.
본래라면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을 느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의외로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양반이 이런 느낌이었나?’
불과 몇 달 전까지 그리드의 인식 속에서 양반은 즉, 가람이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넘어서지 못할 절대적 강자.
떠올리는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식은땀을 흘리게 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해진은 전혀 달랐다.
양반이니까 당연히 강한 건 알겠는데 딱히 위압감이 크지 않았다.
가람이 아닌 다른 양반들과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해진이 유독 약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양반의 평균 능력치는 비슷하다.
시련을 20등으로 통과했던 해진은 심지어 실력이 준수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다른 느낌을 받은 이유는 그리드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해진보다 더 강한 적과 싸워봤고, 이겨봤다.
해진에게 위축되기엔 그리드라는 그릇이 너무 커졌다.
“누구 눈알이 뽑힐지 두고 보지.”
여태껏 아이린의 말투와 표정을 연기하고자 노력해왔던 그리드가 본성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눈매에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눈빛으로 해진에게 적의와 살기를 보냈다.
갑자기 180도 바뀐 분위기에 해진이 움찔 놀랐다.
‘본성을 숨기고 있었어?’
고작 인간 따위가 양반을 기만해?
잠시라도 위축된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꽈드득, 이를 간 해진이 치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서 빨리 시련을 시작해달라는 요청이 담긴 눈짓이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리드를 바라보고 있던 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에게 시련을 내리겠다.”
짤랑. 짤랑. 짤랑....
요란하게 울리던 방울소리가 점차 아득해진다.
그리드와 양반들의 정신이 희미해진다 싶더니 이내 어딘가로 빨려들어갔다.
***
“이건....”
잠시 멍해졌던 그리드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기고만장한 양반들이 활보하던 대리석 거리가 사라지고 협곡이 자리를 채웠다.
수십 개의 가파른 절벽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짤랑.
“첫 번째 시련이다. 이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방울소리에 이어지는 치우의 음성이 한참동안 협곡에 메아리치다가 사라지는 순간 시련이 시작됐다.
새카만 협곡 아래에서부터 귀를 찢는 비명이 울린다 싶더니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반들이 마주본 것은 절대신 한울이었고, 그리드가 마주본 것은 악룡 번헬리어였다.
가장 두려운 대상과의 조우.
양반들도 처음 겪는 시련이었다.
치우의 시련은 매번 그 내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달리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어버이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은 양반들이 후들후들 다리를 떨었다.
그리드의 사정 또한 썩 좋지 않았다.
‘왜 갑자기 번헬리어가?’
두려워하는 대상과의 조우.
이와 비슷한 내용의 시련을 그리드는 이미 한 번 체험할 기회가 있었다.
번헨 열도에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 그리드가 겪었던 시련은 매우 쉬웠다.
당시 그리드의 시련에 나타났던 난적은 토끼와 사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사슴과 토끼의 뒷발차기에 맞아 죽었던 1레벨 플레이어 그리드는 이미 시련을 극복하고 사라진지 오래다.
이 순간 그리드는 지존이었고, 그리드가 두려워하는 적은 사슴이나 토끼 따위가 아닌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였다.
그간의 성장이 도리어 발목을 잡아버린 셈이다.
‘빌어먹을. 이놈을 뭐 어쩌라는 거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하늘에 떠올라있는 번헬리어의 모습은 국대전에서 목격했던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다.
숨결에 따라서 물결치는 비늘, 흉포한 눈동자, 벌름거리는 코와 날개가 일으키는 폭풍.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환상으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이 현상을 만든 존재가 신 중의 신인지라 진짜 번헬리어를 재현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싸우라는 건가?’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가 결국 검을 뽑아 쥐었다.
그리고 가장 높은 협곡으로 향하는 길을 당당히 가로막고 있는 번헬리어를 한 번 노려봐준 후 잠재력을 개방, 5융합 검무를 시전했다.
콰르르르르르릉!!
그리드의 지배하에 놓인 공간에 벼락같은 기세가 가득 찬다.
강력한 기운을 일점에 모은 염룡검이 번헬리어의 비늘을 뚫고 깊숙이 들어갔다.
-키에에에에에엑!!
번헬리어가 비명을 토했다.
‘역시!’
5융합 검무쯤 되면 절대적인 존재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생각해왔던 차다.
생각이 현실이 되자 자신감을 얻은 그리드가 만면에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번헬리어의 발, 무릎, 배를 차례대로 걷어차며 도약해 이내 번헬리어의 등 위에 올라탔다.
‘순보!’
스파앗!!
번헬리어의 등 위에 섰던 그리드가 저 멀리 보이는 가장 높은 협곡 위로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쏴아아아아....
역시나 환영이었다는 것처럼 번헬리어의 거대한 육신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마침 다른 양반들도 무기를 꺼내 쥐기 시작했다.
“아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신께 검을 겨누게 만들다니....! 치우 당신은 미쳤다!!”
양반들 또한 눈앞의 한울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눈치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감히 공격하지 못하다가 이내 눈물을 머금고 사죄하며 한울을 공격하고, 넘어서고 있었다.
머잖아 그리드 곁에 도착한 양반들이 발을 구르며 호통 쳤다.
“무엄한 놈! 한울님이 아닌 용 따위를 겁내다니! 신성모독이다!!”
“.....”
화내는 포인트가 참 희한한 놈들이다.
그리드가 양반들을 미친놈 보듯이 하는 그때 주변의 풍경이 다시 바뀌었다.
짤랑.
“두 번째 시련은 어려울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
나비의 날갯짓 소리가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연상시킨다.
수천, 수만 마리의 나비가 떼를 지어 덤벼드는 광경에 그리드가 아연실색했다.
번헬리어의 환영이 나타났을 때만해도 잠잠했던 초월자의 감각이 그에게 경고를 보냈다.
[죽음이 다가옵니다!]
“....!”
정신을 번쩍 차린 그리드가 집중했다.
나비들의 날개가 하나 같이 톱날처럼 날카로웠다.
스치기만 해도 살이 찢겨나갈 듯했다.
“치우께서 네게 시련을 내린 이유를 알겠구나.”
해진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너를 희생시켜서 지크에게 경고하시려는 의도였어.”
양반들은 치우의 속내를 모르기 때문에 신뢰하지 못한다.
하지만 함께해온 세월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아무렴 외부인보다야 치우를 믿었고, 의지했다.
양반들은 한울의 뜻을 거역한 지크에게 치우가 벌을 내리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그 증거로 무시무시한 나비들이 천지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지 않은가.
기술이나 기세 따위로는 결코 감당 못할 시련이었다.
오직 신의 격을 등에 업은 자만이 이 시련을 감당할 수 있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양반들이 일제히 청룡의 숨결을 개방했다.
그들의 주변을 푸른 벼락이 감싸며 덤벼오는 나비들을 모조리 지져버렸다.
기세등등해진 양반들이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
양반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나비 떼를 상대로 몸부림치다가 죽어갈 줄 알았던 인간 여자가 몸 주위에 불꽃의 폭풍을 두르고 있는 까닭이었다.
양반들이 몸에 두른 벼락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거대한 기운이었다.
‘저건....!’
양반들이 화염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
모를 리 없다.
이제는 잃고 말았지만 본래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힘 중 하나였으니까.
‘주작의 숨결!’
아니, 고작 숨결 수준의 힘이 아니다.
저건 주작의 근원에 가깝다.
가장 신에 가까운 양반, 미르를 떠올리게 만드는 광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