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 03화
“수백 명의 양반이 저지른 살생보다 그대 한 사람이 저지른 살생이 수백, 수천 배는 많아 보이는데 말이지.”
“....!”
한울은 다른 신들과 전혀 달랐다.
절대신 레베카와 야탄은 단지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태엽 같은 존재일 뿐이고, 헥세타이아와 제라툴 등의 하위 신은 자신의 욕망에 매몰되어 단순한 감이 있는 반면 한울은 인간을 이해하고 공략했다.
마치 자신 또한 인간인 것처럼 말이다.
‘이놈....’
오래 전부터 짊어져온 마음의 죄를 들춰내진 그리드는 섬뜩했다.
인간의 잣대로 자신의 입을 닫아버린 한울이 두려웠다.
이토록 인간을 잘 이해하는 신이 인류를 기만하여 양반들의 신격을 쌓는 도구로 이용하고, 이후에는 퀘스트를 만들어서 대량으로 학살했단 사실이 소름끼쳤다.
차라리 레베카와 야탄처럼 본능에만 충실한 존재였다면 재앙으로 인식됐을 텐데, 한울은 손에 흉기를 쥔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졌다.
생각이 읽힌 것일까?
그리드를 바라보는 한울의 눈빛에 조소가 어렸다.
마치 너도 나와 다를 바 없다고 조롱하는 듯했다.
그리드는 직감했다.
한울이야말로 가장 기피해야할 신임을 말이다.
그리드가 떠는 동안에도 한울은 그랜드마스터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랜드마스터를 회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리드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랜드마스터에게 현혹되어선 안 된다고 경고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절대신 한울이 당신의 죄를 묻습니다.]
[죄인에겐 입을 열 자격이 없습니다. 3분 동안 침묵합니다. 모든 스킬과 마법의 사용이 봉인됩니다.]
[신화의 근원이 당신의 격을 묵살합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죄인은 불안에 떠는 법입니다. 모든 능력치가 30퍼센트 하락하고 3분 동안 약점 노출 상태가 됩니다.]
[신화의 근원이 당신의 신격을 묵살합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제길! 빌어먹을!’
최근 커뮤니티에 떠도는 소문이 있다.
<전설 공략법>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대상에게 특정 종류의 상태이상 6개를 1초 내에 적중시키면 전설 클래스의 ‘상태이상 저항’이 무력화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리드는 코웃음 치고 흘려버렸었다.
고작 그딴 방법으로 상태이상 저항이 무력화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왜 뭐만 했다하면 상태이상 저항에 실패 하냐?’
상태이상 저항을 무시하는 상태이상 적중, 상태이상 저항을 무시하는 상태이상 적중을 무시하는 상태이상 저항, 상태이상 저항을 무시하는 상태이상 적중을 무시하는 상태이상 저항을 무시하는 상태이상 적중....
그리드는 상태이상 저항에 실패할 때마다 Satisfy엔 절대적이라는 게 없단 생각이 들었고 소문의 전설 공략법 또한 사실이 아닐까 불안해졌다.
“가여운 사도 지크여, 그대 혼자서 칠선인을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일세.”
한울과 그랜드마스터의 대화가 종국에 이르고 있었다.
그랜드마스터의 입장을 통해서 그의 원한과 바람을 엿본 한울은 그랜드마스터를 집요하게 공략해나갔고 그랜드마스터의 표정은 미묘하여 읽기 힘들었다.
‘안 돼. 고민하지 마.’
당신이 한울의 손을 붙잡아선 안 된다.
한울의 손을 붙잡아봤자 칠선인은 결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그리드는 외쳐봤지만 그 외침은 머릿속에만 맴돌았다.
한울이 내린 죄의 무게가 끝끝내 입을 억눌렀다.
이대로는 그랜드마스터가 흔들릴 거라고 생각한 그리드가 좌절하는 순간이었다.
“아니요.”
덥썩.
잔뜩 굳은 그리드의 어깨 위로 크고 따스한 손이 덮였다.
그랜드마스터의 손이었다.
“혼자가 아닙니다.”
한울과 마주했던 맑은 눈동자가 그리드에게 향한다.
“저의 사도들과 함께 저를 도와줄 인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도대체 왜.
무엇을 근거로 나를 이토록 신뢰하고, 의지하는 걸까?
그랜드마스터의 속내를 모르는 그리드 입장에선 큰 의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미소를 그렸다.
그랜드마스터가 한울과 손을 잡는 최악의 사태를 면했음에 안도했고, 이유야 어찌됐든 신뢰 받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어째서 굳이 힘든 길을 걷겠다는 겐가?”
한울이 그랜드마스터에게 물었다.
알아보기 힘든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게 웃는 듯했다.
그랜드마스터가 답했다.
“한울님의 손을 잡아 쉬운 길을 택하는 순간 사악한 길에 들어설 것만 같아 그렇습니다.”
“나와 함께 걷는 길이 사악하다라....”
한울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순간 거대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와 그리드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지발과 네오 적기사들은 혼절했을 정도다.
움찔.
천하의 그랜드마스터조차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위압감이었다.
“그대의 눈엔 내가 사악해 보이나?”
“아닙니다. 잠시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어찌 감히 신께 선악의 잣대를 겨누겠나이까.”
“한데 어찌 사악한 길을 걷게 될 거라고 걱정하는가? 나는 그 어떤 신보다 더 인간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신일세. 인류를 위해 신들과 맞서 싸웠던 그대의 기대와 바람에 부응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세계에 오직 나뿐이란 말일세.”
확신에 찬 음성이다.
한울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그랜드마스터는 잠시 마음이 이끌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신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한 발 먼 곳에서 그저 지켜만 보다가 인간이 자신들의 힘으론 맞설 수 없는 재앙과 조우했을 때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신을 원합니다.”
어떤 이유를 핑계로 세계를 멸망시키는 야탄.
야탄으로 인해 멸망하는 세계를 관망하는 레베카.
인간을 질투하고 시기했던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인간에게 자신의 위대함을 전파하고 싶어 하는 제라툴.
인간과 사랑에 빠졌고 그렇기에 배신감에 휩싸였던 도미니언 등등.
그랜드마스터가 목격해온 신들은 모두 그가 생각하는 신의 상과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전달하는 그랜드마스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울이 조용히 운을 뗐다.
“말인 즉,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인간들이 위기에 처할 때만 나서서 도와주라 이건가?”
“네.”
“대가 없는 호의를 바라는가.... 신 된 입장에선 아무런 보람이 없을 듯한데.”
“그게 자애입니다.”
“마치 신에게 자애를 베풀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군.”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신을 숭배하는 이유는 자애를 바라기 때문이니까요.”
“나는 인간이 탄생하기 한참 전 혼돈의 시대부터 존재했다네. 이런 내게 인간을 위한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는 건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인간이 탄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숭배 받고, 신격을 쌓아 지금의 힘을 지니게 되신 거 아닙니까?”
“적당히 하게.”
감히 한울의 말씀에 일일이 토를 달다니.
지켜보다 못한 삼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고로 신이란,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그랜드마스터의 헛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들 모두 기분이 불쾌한 상태였다.
“서쪽의 추악한 신들이 어째서 자네에게 죄를 짊어지었는지 알 것 같군.”
“자네의 주장은 너무 일방적이야. 과한 욕심일세. 자네가 원하는 신은 존재할 수 없어.”
“.....”
그랜드마스터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울이 죄를 물어서가 아니다.
사실 그랜드마스터는 묻고 싶었다.
신은 인간의 바람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인데 어째서 인간을 위하는 일을 부정하는 거냐고.
하지만 굳이 묻지 않는 이유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갈라서기 전 나눴던 대화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그랜드마스터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주제 넘는 바람이겠죠. 죄송합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치리링.
고대의 룬어가 떠올라 쓰러져있는 지발과 네오 적기사들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한울의 존재감에 압도당해 정신을 잃었던 일행이 모두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을 챙겨 그대로 떠나려하는 그랜드마스터의 등 뒤로 한울의 질문이 꽂혔다.
“그대는 인간들을 그저 지켜만 보아왔나? 오직 인간들을 위해 싸워왔나?”
“....아니요.”
먼 과거에는 신들을 위해서 싸웠다.
그리고 지난 수백 년 동안은 칠선인을 부활시키겠다는 미명 하에 인간들을 이용했다. 때때로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모두 부끄러운 과거다.
자신은 이미 선인이 아님을 그랜드마스터는 알고 있었다.
“그런 자네에게 오직 인간만을 위하는 신을 바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네.”
조용히 가라앉았던 그랜드마스터의 눈동자가 당당하게 빛났다.
“바로 그게 신의 존재 이유니까요.”
“갈!”
듣다 못한 풍사가 소리치자 폭풍이 몰아쳤다.
정자 주위의 호수가 격랑을 일으킨다 싶더니 이내 소용돌이쳤다.
꿀꺽.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순간 무사치 못할 거란 사실을 직감한 지크와 네오 적기사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그때였다.
“보내주게.”
한울이 풍사를 제지하자 풍사가 바람을 멈췄다.
소용돌이 쳤던 호수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이어서 또 새로 불어온 바람이 호수를 반으로 갈라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 일행에게 길을 열어줬다.
그 길 위로 발을 내딛는 그랜드마스터에게 한울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자네가 바라는 신은 존재하지 않아.”
“지금은 그런 것 같군요.”
***
“썩 꺼져라.”
신들이 모였던 장소를 떠나 궁전에 다시 돌아온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 일행을 양반들이 홀대했다.
그랜드마스터가 한울이 내민 손을 감히 거부했단 소식이 벌써 소문난 눈치였다.
대놓고 적의를 보이는 양반들도 있었다.
그리드와 지발, 그리고 네오적기사들은 눈치껏 고개를 푹 숙이고 길을 걸었다.
괜히 한 번 트집이라도 잡혔다간 사달이 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궁전 어귀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그대의 무(武)를 보고 싶군.”
일행이 성문을 지나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짤랑.
방울 소리 때문이었다.
방울 달린 끈으로 머리를 올려묶은 사내.
그는 앞서 정자의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신, 치우였다.
그랜드마스터가 다시 돌아올 거란 사실을 뻔히 알았다는 듯이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은 그는 그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만든 시련을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치우의 시련.
양반들이 신의 자격을 얻기 위해 첫 번째로 통과해야하는 관문이었다.
당연히 주변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그리드 일행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던 양반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치우의 시련을 내리겠다니! 우리들 양반을 조롱하시는 겁니까!!”
절규와도 같은 양반들의 외침을 치우는 가볍게 묵살했다.
“어때? 그대에게 나쁠 거 없는 제안일 텐데.”
치우의 관심은 오직 그리드에게 집중됐고 결국 보다 못한 양반 몇 명이 앞으로 나섰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시련을 치를 기회를 주실 심산이라면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좋다.”
치우는 의외로 쉽게 승낙했고,
“저도 좋습니다.”
당황하고 있던 그리드 또한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수락했다.
좋은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애초에 없을뿐더러, 치우의 시련을 치르겠다고 나선 양반 중에 해진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