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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92화 (1,182/1,794)

템빨 61권 - 02화

그리드는 그랜드마스터가 풍사에게 하대하는 모습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실성한 건가, 의문을 품기보단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랜드마스터는 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인물이니까.

그가 신에게 예의바른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한데.....

“신을 뵙습니다.”

치우를 만난 그랜드마스터의 태도는 더없이 예의 발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중히,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그의 인사에는 존경마저 담겨있었다.

풍사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인 것이다.

치우.

양반들을 교육시킨다는 동쪽 최강의 신.

천하의 그랜드마스터도 그의 무력만큼은 두려웠던 걸까?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이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르다. 아예 달라.’

빛의 여신 레베카,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무신 제라툴, 바람의 신 풍사.

여태껏 그리드는 꽤 많은 신을 대면해왔다.

레베카에겐 자애와 감동을, 헥세타이아에겐 동정심을, 제라툴과 풍사에겐 두려움과 혐오를 느꼈었다.

한데 치우만큼은 막연했다.

어떤 감상이나 감정을 품을 대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다른 신들과 달리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반갑군.”

흠칫.

그랜드마스터의 인사에 화답해준 치우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그리드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메르세데스와 처음 만났을 때 이상의 충격이 그를 덮쳤다.

[동쪽의 무신 치우가 당신을 관조합니다.]

[당신의 레벨과 전투 관련 능력치, 전투 관련 스킬의 정보가 하나도 빠짐없이 치우에게 공개됩니다.]

[치우에게 당신의 약점을 100퍼센트 노출합니다. 공격 시 명중률이 80퍼센트 하락하고 피격 시 3배 이상의 데미지를 입습니다.]

[당신이 쌓아온 초월자의 격이 아직 미약하여 모조리 억눌립니다.]

[초월자의 격으로 발생한 능력치와 스킬들이 전부 봉인당합니다.]

혜안과는 다르다.

메르세데스의 혜안은 대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힘인 반면 치우의 시선은 대상의 ‘무력’을 꿰뚫어보는 힘이었다.

아직 성장 단계에 있는 혜안은 모든 것 중 ‘일부’밖에 보지 못하는 반면 치우의 시선은 완전하여 대상을 완벽하게 압도한다는 차이점도 있었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선 혜안보다 치우의 시선이 훨씬 더 강하고 뛰어난 능력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그리드가 치우에게 전율을 느낀 원인은 시선에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드는 치우의 존재 자체가 거대하게 다가왔다.

풍사에겐 하대했던 그랜드마스터가 그에게 고개를 숙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게 바로 진짜 신.’

헥세타이아와 제라툴은 레베카가, 풍사는 한울이 빚어 만든 신이다.

반면 치우는 인간들의 염원으로 자연히 탄생한 존재.

격이 다른 게 당연했다.

하물며 절대신 중 하나인 빛의 여신 레베카를 실제로 보면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걸까?

지상에 강림했던 레베카의 ‘형상’만을 보고도 감격한 경험이 있던 그리드는 언젠가 레베카를 실제로 만나게 됐을 때 느낄 감정이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됐다.

그리고 당장 마주하게 될 한울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일지 긴장하게 되었다.

“오르시게.”

꿀꺽.

치우가 자리를 비켜주자 드러나는 계단.

그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리드는 몇 번이나 마른 침을 삼켰다.

인간을 멸시하는 양반들.

그들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한울이다.

심지어 한울은 퀘스트로 플레이어들을 유혹해 대량 학살을 유도하기도 했었다.

그리드가 아는 한 최소 3번이나 말이다.

‘한울은 악이다.’

대악마들을 빚어 만든 악신 야탄처럼 인류를 노골적으로 위협하진 않지만 서서히 좀먹고, 속이고, 노예로 부리는 음흉한 신이 바로 한울이다.

그리드의 머릿속에 자연히 그려지는 한울의 형상은 악귀 그 자체였다. 인간들의 폐를 썩게 만드는 독무를 은밀하게 내뿜는 표독스런 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실제론 전혀 달랐다.

“어서 오게.”

[플레이어 최초로 절대신 한울을 목격하였습니다.]

[세계의 근원 중 하나를 목격한 당신의 저변이 확장됩니다.]

[앞으로 신, 드래곤, 대악마 그 어떤 절대적인 존재와 조우할지라도 당신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따스한 목소리와 온후한 눈빛.

한울의 느낌은 빛의 여신 레베카와 닮아있었다.

심지어 그는 그리드 일행에게 친히 구름으로 만든 의자를 내어주기까지 했다.

사신을 봉인하고 동대륙의 모든 인간을 속여 가짜 신화를 새겼던, 몇 번이나 대규모 퀘스트를 발생시켜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장본인은 사실 따로 있지 않을까....

그런 의심을 품게 만들 정도로 한울의 모습은 상상과 정 반대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한울의 따스한 외면 뒤에 숨어있을 잔혹하고 음흉한 본성을 엿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다가 문득 혼란을 느꼈다.

분명히 두 눈으로 한울을 바라보고 있건만 한울의 생김새를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단지 온화하고 따스한 존재라고 느껴질 뿐, 그리드는 바로 눈앞에 있는 한울의 외형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랜드마스터와 인사를 나누던 한울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닿았다.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무언가를 판단하려는 건 커다란 욕심일세. 그대 또한 수많은 누군가에겐 악이었을 테지.”

“....!!”

그리드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듯한 발언이었다.

선을 표방하는 레베카, 악을 표방하는 야탄과 달리 한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신일세. 나의 한 가지 측면만 보고 의심하고, 경계하고, 적대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야.”

칠악성은 말했다.

레베카와 야탄은 감정 없는 시스템에 불과하다고.

주기적으로 세계를 파괴하고 수복하는 과정을 무한히 되풀이하는 그 두 신은 인류에게 애정도, 원한도 없다고.

반면 한울은 그 둘과 전혀 달랐다.

감정을 지녔다.

때때로 누군가를 위해 싸웠고,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희생시키곤 했다.

양반을 신으로, 오존을 더 강한 신으로 만들고자 동쪽의 사신을 봉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나는.”

어렴풋했던 한울의 얼굴이 자리를 잡았다.

강인한 전사의 얼굴이었다.

“나를 섬기는 이들을 위해서 싸우고.”

한울의 얼굴이 다시 모습을 바꿨다.

그리드가 상상했던 표독스런 뱀의 얼굴이었다.

“나를 의심하고 적대하는 자들을 벌하며.”

이번엔 슬피 우는 여인의 얼굴이다.

“죽은 이들을 추도할 줄 알고.”

끝으론 인자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조언을 해주는 유일한 신일세.”

한울은 그리드의 시선에 깃든 의심을 해소하고자 말하고 있었다.

이는 즉, 그랜드마스터를 설득하는 말이기도 했다.

“반면 레베카와 야탄은 어떤가? 서로가 서로를 선과 악으로 구분 짓고 세상이 편을 갈라 싸우게 만들었어. 그리고 그 모습을 다만 관망할 뿐일세. 특히 레베카는 자신을 위해서 싸웠던 칠선인이 칠악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음에도 끝내 그들을 돌봐주지 않았지.”

“.....”

그랜드마스터의 미간에 핏대가 섰다.

레베카를 향한 증오심이 들끓는 탓이었다.

그랜드마스터는 선과 악,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레베카와 공생하지 못했던 한울의 설득에 넘어가고 있었다.

한울이야말로 인류를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산통을 깼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올바른 조언을 해주신 적이 있나요?”

당돌한 질문.

소별왕과 삼사가 물끄러미 그리드를 바라보았다.

분노도, 살기도 담기지 않은 고요한 시선이었지만 그리드는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한울이 대답해주었다.

“우리를 신으로 섬기라 하였네.”

“그 ‘우리’엔 양반도 포함되는 거겠죠?”

“그렇다네.”

“인간을 가축 취급하고 쉽게 해치는 양반들을 신으로 섬기라는 게 올바른 조언인가요?”

“우선, 쉽게 해친다는 주장은 잘못 됐다네. 아주 드물게 감정을 제어 못했던 아이를 제외하면 양반 중 누구도 섣불리 살생을 저지르지 않았어.”

공교롭게도 맞는 말이다.

양반은 의외로 섣불리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주작을 봉인하는 중요한 열쇠인 주작궁을 분실했던 씽왕과 백성들을 함부로 처벌하지 않았던 것이 단편적인 예다.

쉽게 살생을 저질렀던 양반은 가람으로, 그 또한 그리드 탓에 분노에 휩싸여 두 눈이 멀어 저지른 업이었다. 가람 한 명을 기준으로 삼아서 모든 양반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잔혹한 잣대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양반이 인간을 정답게 대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필연일세. 비록 모습은 같다하나 수명도, 능력도, 사고도 다르니 거리감을 느끼는 수밖에. 자신들을 신으로 섬겨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품기는커녕 조롱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야. 양반 또한 신이 되어 사고가 확장되면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보상할 걸세.”

“그건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 아닌가요? 사람을 가축처럼 여기며 기분에 따라 함부로 해치는 그들이 신이 된다고 해서 과연 정말로 사람을 아낄 수 있을까요?”

대화에 진척이 없다고 느낀 것일까.

한울은 그리드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그대는 여태껏 몇 명이나 죽였지?”

“....!”

“수백 명의 양반이 저지른 살생보다 그대 한 사람이 저지른 살생이 수백, 수천 배는 많아 보이는데 말이지.”

“그, 그건....”

“물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저지른 살생도 많았을 테지. 하지만 그 정의는 올바른 것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나? 그대에게 죽어간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대야말로 악마가 아니었을까?”

“.....”

그리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양반들을 비호하는 한울의 주장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던 까닭이다.

드디어 그리드가 조용해지자 한울의 시선이 그랜드마스터에게 닿았다.

한울이 질문했다.

“이런 대화가 레베카와도 가능할 거라고 보는가?”

“....아니요. 절대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랜드마스터가 고개를 젓자 한울의 형태 모를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걸리는 듯했다.

“대화를 통해서 인간과 서로 이해하고, 맞춰갈 수 있는 신은 세계에 오직 나뿐일세. 그대가 진정으로 바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선 칠선인이 나의 곁에 머물러야 할 것이며, 그대가 칠선인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나의 힘이 필요할 것이네.”

확신에 찬 음성.

한울은 그랜드마스터가 자신과 함께할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잠시 잠자코 있던 그랜드마스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데 사과하지 않으시는군요.”

“....?”

“인류를 하등하게 취급하는 양반들의 부족함에 대해 묻는 인간에게 신께서는 사과하시지도, 해결책을 마련해주시지도 않고 그저 필연이니 받아들이라고 하시는군요. 그건 소통이 아닙니다.”

“모든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앞서 말했듯이 양반들은 반드시 인류에게 보상할 걸세.”

“.....”

그랜드마스터는 눈치 챘다.

신은 모두 똑같다.

다만 한울은 다른 두 신과 비교해서 극단적이지 않을 뿐이다.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한울이 불러 세웠다.

“가여운 사도 지크여, 그대 혼자서 칠선인을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일세.”

“아니요.”

멈춰 선 그랜드마스터가 그리드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혼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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