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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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61권 - 01화
복숭아나무와 뭉게구름에 둘러싸인 궁궐.
복도를 오가는 궁녀들의 옷이 너울너울 움직이니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시선을 떨구라고 하였을 텐데?”
“두 눈을 불로 지져버려야 말을 들을 테냐?”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지발에게 양반들이 경고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신계의 모든 풍경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던 지발의 반발심이 솟구쳤다.
‘지들이 뭔데 자꾸 지랄이야?’
지발의 상관은 그랜드마스터다.
상대가 양반은커녕 설령 신이라고 해도 지발에게 명령할 권리는 없었다.
조심스레 부탁해도 부족할 판국에 협박을 일삼으며 명령하는 양반들의 태도에 지발은 큰 불쾌감을 느꼈다. 마음 같아선 두 팔을 걷어붙이고 양반들에게 한 소리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고 인내했다.
‘시키는 대로 하자.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게 맞으니까.’
자칫 소란을 일으켰다간 그랜드마스터에게 피해를 끼칠 것이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린 지발이 다른 네오 적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앞장 서 걷는 양반의 발뒤꿈치를 노려보며 묵묵히 걸었다.
양반들이 쯧쯧 혀를 찼다.
“하여튼 좋게 타일러선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니까.”
“무릇 가축과 인간은 호기심이 많아 통제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때때로 배를 곯려야하는 거야.”
“.....”
아스가르드와 달리 초라한 환국의 모습을 다소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피며 걷던 그랜드마스터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양반들의 사상이 불편했던 것이다.
‘어째서 인간을 업신여기는 거지?’
신이라고 해서 모두 인간을 아끼진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는 인간을 질투하고 시기하여 인류를 멸절시키려는 시도까지 했었다.
하지만 인간을 대놓고 혐오하거나 업신여기는 신은 드물었다.
신이 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인간의 신앙이 필요했으니 자신을 믿는 인간들은 오히려 어여삐 여겼다. 어떤 신은 인간에게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과거의 헥세타이에게도 그를 믿고 섬기는 인간들이 존재했다면 인류 멸절이라는 가당찮은 계획을 실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반들의 태도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신들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쫓겨난 신들이 다시금 신격을 되찾은 이유는 동쪽의 인간들이 그들을 믿고, 섬긴 덕분일 텐데 어째서 이토록 심하게 취급한단 말인가?
‘인간에게 감사함을 품고 아껴도 부족할진데 가축과 비교하는 건 이해하기가 힘들군.’
의문을 품던 그랜드마스터가 문득 깨달았다.
‘....인간의 섬김을 감사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보는 건가?’
돌이켜 보니 서쪽 신들 중에도 그런 놈이 하나 있다.
무신 제라툴.
놈은 인간이 자신의 강함을 숭배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었다.
욱씬.
제라툴에게 베인 상처를 떠올린 그랜드마스터가 가슴에서 큰 통증을 느꼈다.
기억이 주는 통증이었다.
현재 그랜드마스터의 가슴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렇다.
그랜드마스터의 현재 육신은 제라툴에게 베인 경험이 없다.
제라툴에게 베여 깊은 열상을 입었던 그랜드마스터의 본신은 무저갱에 봉인된 상태다.
다른 칠악성 아니, 칠선인들의 본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지크프렉터?’
양반들의 무시와 멸시를 이미 몇 번이나 체험해왔던 그리드.
어디서 개가 짖는구나, 생각하며 양반들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려 넘기던 그리드가 그랜드마스터의 안색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기껏 밝아졌던 얼굴이 잿빛이 되어 이전보다 상태가 안 좋아보였으니 걱정이었다.
‘또 그놈에 나태의 저주야?’
사실 나태의 저주는 매우 보기 드문 저주다.
Satisfy 세계관을 통틀어 봤을 때 나태의 저주에 걸린 종족과 개인은 뱀파이어와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가 유일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뱀파이어와 악연, 인연을 맺어온 그리드는 나태의 저주가 지긋지긋했다.
“정신 차려.”
그리드가 작게 속삭였다.
그랜드마스터가 권태에 찌들어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질 경우 상황이 꼬일 것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말귀를 알아 듣는 거냐!!”
퍽!
양반 하나가 그리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바닥만 보고 걸으라고 이미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감히 고개를 치켜드는 인간을 보자 화가 치솟은 것이었다.
‘XX놈이.’
그리드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여태껏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잠시 한 번 그랜드마스터를 쳐다봤을 뿐인데 다짜고짜 폭력이라니?
‘때리려면 지발을 때려야지.’
억울하다.
수업시간에 떠드는 놈 옆에 앉은 바람에 덤터기 쓴 심정이다.
찌릿.
“...???”
지발이 당황했다.
해진이라는 이름의 양반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인 템빨왕비 아이린이 생뚱맞게 자신을 노려보자 영문 모를 노릇이었다.
“하여튼 인간은 좋게 말해선 알아듣는 법이 없군. 그냥 처음부터 눈알을 뽑아버리는 게 편했겠어.”
지발을 노려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는 그리드의 모습을 확인한 해진이 투덜거렸다.
순간.
‘이 예쁜 눈을 뽑겠다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던 그리드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해진이라는 놈의 이름을 머릿속에 똑똑히 입력했다.
‘나중에 내가 네 눈깔을 뽑아주마.’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 일행은 상당히 긴 시간을 걸었다.
환국에 도착해서 궁궐까지 이동하는데 2시간, 또 궁궐 안의 복도를 걷는데 1시간 이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지루하던 차에 열 받은 그리드의 마음이 조급해질 무렵이었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군.”
새로운 인물의 음성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보려던 그리드와 지발이 본능을 억누르고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행을 안내하던 양반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그토록 기고만장하던 놈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기 시작했다.
“바람을 관장하는 신을 뵈옵니다.”
바람을 관장하는 신?
아직 환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지발은 대상을 섣불리 특정할 수 없었다. 단지 쫓겨난 신들 중 한 명이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반면 환국의 모티브를 알고 있는 그리드는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존재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풍사.’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함께 날씨를 다스리는 삼사(三師) 중 하나.
풍사는 한결의 시신을 밟고 섰던 그리드의 모습을 목격한 장본인이다.
당시 그리드가 단테의 모습으로 있었기 때문에 단테에게 신격이 생겼다.
그리드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이린에게 신격이 생길 순간을 기대하며 흥분했다.
풍사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랜드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한울께서 나를 만나주신다고 하던가?”
“....!”
양반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심지어 그리드와 지발도 깜짝 놀랐다.
오존은 신이다.
더군다나 그랜드마스터의 염원은 오존과 협력하여 서쪽의 신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랜드마스터가 당연히 풍사에게 깍듯할 줄 알았는데 하대하였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네놈이 미쳤....!”
양반들은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옛 신의 사자였다는 그랜드마스터의 위치는 높아봐야 천사, 양반과 동급.
한데 감히 신에게 하대를 하다니 용서 받지 못할 신성모독이었다.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던 연검을 풀어 쥔 양반들이 그랜드마스터를 둘러싸자 풍사가 소리쳤다.
“갈!”
“....!”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쳤다.
풍사와 그랜드마스터 단 둘을 제외한 모두가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휩쓸려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땅에 널브러졌다.
드디어 하늘을 올려볼 수 있게 된 그리드와 지발의 시선이 풍사에게 닿았다.
풍사는 의외로 젊었다. 비쩍 말라서 그런지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을 지닌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한데 뒤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광대까지 늘어진 긴 눈썹은 허옇게 셌으니 살아온 세월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썩 물러나라.”
풍사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고요한 시선으로 양반들을 노려보며 명령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혼란스러워하던 양반들이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랜드마스터를 지나치며 칫, 혀를 차더니 머잖아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풍사가 대전의 입구를 눈짓했다.
“들어가세. 한울께선 이미 그대를 기다리고 계시네.”
풍사의 시선은 그랜드마스터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리드와 지발, 그리고 네오적기사들에겐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공기 취급했다.
그랜드마스터가 못 박았다.
“이들은 나를 도와 칠선인을 부활시킬 사도들이다.”
대전에 데리고 들어가겠다는 뜻이다.
“칠선인을 부활시킬 사도라.... 알겠네. 세계에서 가장 큰 중책을 맡은 자들이니 한울을 대면하기에 손색이 없군.”
고개를 끄덕인 풍사가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 일행 전부를 대전으로 인도했다.
“....!”
“....!”
대전에 입장한 일행이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비볐다.
이곳은 필시 궁궐의 내부일진데 꽃밭과 연못이 펼쳐졌으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헉.”
지발이 헛숨을 들이켰다.
유난히 맑은 연못이 신기해 다가가 보자 지상이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다.
파국과 가야의 영토가 한 눈에 들여다보였다.
확대해서 특정 지역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엿보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심지어 대화 내용까지 들렸다.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한 관찰이 가능한 것이었다.
동대륙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다만 초와 씽 두 나라의 영토는 주작의 불길과 현무의 안개에 뒤덮여 엿보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드의 말이 사실이었어.’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털어낸 지발이 황급히 일행의 행렬에 합류했다. 그리고 풍사를 따라 돌담길을 걷다가 멀리 보이는 호수 중앙에 떠올라 있는 정자를 발견했다.
“저곳에 계시네.”
풍사가 슬쩍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오더니 호수를 반으로 갈랐다. 강처럼 깊은 호수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어 길을 만든 순간이었다.
덕분에 일행은 걸어서 정자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
정자 앞.
풍사와 나란히 걷던 그랜드마스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그리드와 지발도 자연히 걸음을 멈췄다.
여태껏 풍사에게 하대했던 그랜드마스터가 처음으로 허리를 숙였다.
“신을 뵙습니다.”
“....!”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정자에 오르는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사내.
그랜드마스터가 허리를 숙이게 만든 그 신의 이름이 다름 아닌 ‘치우’였던 까닭이다.
오직 그랜드마스터에게만 집중했던 풍사와 달리 치우는 그랜드마스터와 그리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더니 뭔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군.”
그걸로 끝이었다.
치우의 모습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르시게.”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풍사가 앞장서 계단 위로 이동했다. 일행과 함께 그를 뒤따라 정자에 도착한 그리드는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소별왕과 우사, 운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랜드마스터가 소별왕에게도 인사했다.
“한울의 아드님이십니까.”
소별왕이 환히 웃어주었다.
“만나서 반갑네, 지크.”
실제 단군신화와 달리 Satisfy는 풍백에게 맏이 백(伯)자가 아닌 사(師)를 붙여 풍사라고 표기하고 있다.
풍사, 운사, 우사 세 신의 권위가 같다는 간접적 표현이었는데 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Satisfy는 삼사 위에 소별왕을 두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신들의 위에 있는 존재가 바로.
“어서 오게.”
레베카, 야탄과 동격을 지닌 절대신 한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