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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90화 (1,180/1,794)

템빨 60권 - 22화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

6악 지크라는 전생을 지닌 그의 목적은 천상의 신들, 그리고 그들과 결탁했던 대악마를 징벌하는 것이다.

일곱 선인을 죄로 물들인 신들을 모조리 끌어내리고 세상에 진실을 전파하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헛된 꿈이다.

만인에게 조롱당해도 부족할.

하지만 지크프렉터는 가능성을 엿보고 있었다.

그가 천 년의 세월을 견디는 동안 희망이 싹튼 덕분이었다.

신에게 호의를 얻어 그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인물, 그리고 최상위권 대악마를 압도하는 힘을 지닌 인물.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2개의 열쇠가 당대에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전자는 그리드요, 후자는 마리로즈다.

“....?”

그리드를 데려오겠다던 그랜드마스터가 템빨왕비 아이린을 대동하고 나타나자 지발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자가 그리드....”

그리드를 소개하려는 지크프렉터의 말이 중간에 가로막혔다.

싱긋, 화사하게 미소지은 그리드가 지발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템빨국의 왕비 아이린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발 경. 아니, 지크의 사도라고 불러드리는 게 좋을까요?”

“아, 네.... 편하실 대로 불러주십시오.”

역시 Satisfy의 인공지능은 대단하다.

NPC와 플레이어를 구분하는 게 쉽지가 않다.

새삼 느낀 지발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린을 경계하는 네오 적기사단원들을 대신해서 그랜드마스터에게 질문했다.

“어째서 그리드가 안 오고 왕비가 오신 겁니까?”

“.....”

그랜드마스터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가 뭐하는 짓인지 몰라 설명하기 난해한 구석이 있는 까닭이었다. 잠시 고민도 해보았지만 밀려오는 귀찮음 때문에 그냥 침묵을 선택했다.

‘하여튼 이 양반은.’

으레 그렇듯이 대화가 끊기자 지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린이 그리드일 거라곤 꿈에도 모른 채 그리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야, 그리드. 너 미쳤냐? 쫓겨난 신들을 신뢰하면 안 된다고 위험하다는 듯이 지껄였던 주제에 와이프를 환국에 보내겠다고?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NPC의 목숨은 하나다.

플레이어와 달리 죽어도 부활하지 못한다.

칸이 살해당하자 분노의 응징을 시작했던 그리드를 세상이 함부로 비난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데 이제 와서 아이린을 환국에 보내겠다니....

지발은 그리드가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귓속말로 비난을 퍼붓는 그를 보고 슬며시 미소지은 그리드가 대답해주었다.

-괜찮아. 그랜드마스터와 동행하는 이상 환국 놈들도 섣불리 아이린을 건드리진 못할 테니까.

오존들 또한 그랜드마스터를 탐낼 게 분명하므로 신중할 것이다.

게다가.

-그리고 아이린은 강해. 자기 목숨 정도는 건사할 수 있다.

그리드는 자신의 실력에 제법 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처음으로 크라우젤을 꺾고 지존에 등극했을 때처럼 자신이야말로 최강이라고 믿고 오만하게 구는 게 아니라, 세계관의 파워 밸런스를 모두 파악한 상태에서 객관적인 지표를 세운 것이다.

설령 오존이 자신을 적대할지라도, 그랜드마스터의 비호 아래서 도주에 집중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크게 걱정 안 해도 되겠군.

지발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린을 훑어봤다.

저 여린 여자가 강해봤자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건지, 정말로 그토록 강하다면 그동안의 행보는 도대체 뭐였던 건지..... 납득 안 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굳이 집요하게 의심하고 불신할 생각은 없었다.

-걱정해줬던 거야? 그것 참 감동인데?

-오해하지 마라. 네가 와이프 갈아치우려고 수작 부리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어서 아이린을 동정했던 것뿐이니까. 그건 그렇고 환국의 위치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지난 몇 달 동안 수색해봤지만 씽왕에게 직접 묻는 방법 외엔 위치를 알아낼 방도가 없는 것 같던데.

-그것밖에 없는 거 맞아. 나도 씽왕에게 물어봐서 안 거야.

-씽왕이 대답을 해줬다고?

지발이 진심으로 놀랐다.

목에 칼을 겨눠도 함구했던 씽왕의 입을 대체 무슨 수로 열었다는 말인가?

-지독한 놈.... 도대체 어떤 고문을 했길래....

오해하고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 지발에게 그리드가 설명해주었다.

-씽의 왕과 백성들이 외지인에게 환국에 대해서 함구한 이유는 ‘신화를 모르는 자들에게 오존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 자체가 현무 신의 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야. 현재 씽은 현무 신의 가호로 지켜지고 있는데 현무 신이 약화되는 순간 양반들의 침략이 개시될 테니 필사적으로 함구하는 수밖에 없지.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 그런데 너한텐 왜 그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거지?

-난 동대륙의 신화를 알고 있으니까.

그리드는 양반을 쓰러뜨리고 현무 신을 부활시킨 장본인이다.

모든 진실을 꿰뚫고 오존을 부정하는 그 앞에선 백날 오존에 대해서 떠들고, 찬양해봤자 오존의 신격이 쌓이지 않는다.

-음.... 그랬군. 근데 넌 뭐하냐?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지발이 이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왜 같이 환국으로 안 가는데? 굳이 네가 아닌 와이프가 환국을 방문해야할 이유는 뭐야?

-난 돈 버느라고 바빠.

-....요즘 템빨국에서 템 뿌리기 바쁘다더니 역시나 개털 됐군.

-....

-뭐, 난 너희가 잘하고 있다고 본다.

피식 웃은 지발이 귓속말을 끝냈다.

앞장서 걷고 있는 그랜드마스터의 뒤를 쫓으며 그는 생각해보았다.

7대 길드의 수장이었던 시절.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던 그 시기에 자신은 무엇에 집착했던가?

개인의 명성, 돈, 권력....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급급했었다.

반면 그리드는....

‘....비교되는군.’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지존의 자리를 끝내 차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애초에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지언정 머지않아 끌어내려졌으리라.

생각하는 지발의 표정은 종전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고 강인했다.

***

신들의 거처는 천상에 있다.

설령 패주한 신들이라고 할지언정 그들은 결코 지상에 머물지 않았다.

친숙함은 즉 평범한 것이므로, 신이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순간 신격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주작, 현무, 백호, 청룡.

잊혔던 옛 신들이 쫓겨난 신들에게 패배했던 원인이다.

동대륙의 중심.

4개의 강줄기가 교차하는 대지 위에 거대한 복숭아 숲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드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 도착한 그랜드마스터가 드물게 눈에 이채를 띄었다.

“지상이라고 믿기 힘들군.”

눈앞에 신들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천 년도 더 전에 방문했던 천상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영기(靈氣)가 생동하는 땅이었다.

스륵.

그랜드마스터가 고대의 룬어를 써내려 허공으로 흘려보내자 룬어의 행렬이 은하수처럼 빛났다.

본신을 잃고 상실했던 신의 힘이 약간이나마 강해진 것이다.

꾸욱, 주먹을 말아 쥐는 그랜드마스터의 손에 힘이 실렸다.

권태에 찌들어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와우....”

그리드가 감탄을 토했고 지발과 네오 적기사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랜드마스터의 인상이 완전히 변한 까닭이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마른 몸, 양 갈래로 빗어 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고요한 눈동자....

이전까지 그랜드마스터의 인상은 음침하고 퇴폐적인 느낌을 주었던 반면 지금은 맑고 깨끗해보였다. 절로 신뢰하게 만드는 그런 선함이 있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생기가, 고요했던 눈동자에 총기가 깃들었단 사실만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이곳을 통하면 되는 건가?”

저벅, 저벅.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마저 바뀌었다.

근심에 잠긴 듯이, 혹은 부끄러운 죄인마냥 망설임이 느껴졌던 발걸음이 힘차고 당당해졌다.

숲의 가장 중앙에 우뚝 솟은 복숭아나무.

가지가 크게 좌우로 벌어져 신비로움을 더하는 그 거목 앞에 다가선 그랜드마스터가 나무 끝에 걸리는 푸른 하늘을 시야에 담았다.

치링. 치리리링....

그랜드마스터의 주변을 맴돌던 룬어들이 하늘을 겨누기 시작했고,

“맞아요, 여기에요.”

그리드가 확인시켰다.

그랜드마스터의 곁에 나란히 선 그가 씽왕에게 받았던 부적을 나무에 붙였다.

“개문.”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사방에 천둥이 울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복숭아 숲 전역을 푸른 장막이 뒤덮었다.

일행이 세계와의 단절을 느끼는 그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

검게 물든 하늘로부터 황금처럼 찬란한 빛이 쏟아져내려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 일행의 몸을 감쌌다.

[동쪽 신들의 세계에 방문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

떠오르는 알림창이 지발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신계.

20억 플레이어 중 과연 몇 명이나 그곳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을까?

환상처럼 치부해왔던 그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자신이 직접 방문하게 됐단 사실에 지발은 커다란 감격과 두려움을 느끼는 반면.

“이쪽 동넨 좀 허름하네.”

이미 서쪽 신계에 방문한 경험이 있는 그리드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빛 무리에 감싸여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 일행의 귓전에 웅장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정확히는 그랜드마스터에게 향하는 음성이었다.

「타락한 신들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던 가여운 옛 사도여. 그대를 환영하는 바이다.」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 일행의 시야가 반전한다.

곧 세상이 암전됐고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가로수가 늘어진 길이 펼쳐졌다.

“아아....”

지발과 네오 적기사들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에 탄식했고,

슬금슬금.

그리드는 무릉도원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복숭아나무들을 발견하고 다가가 백도를 땄다.

아쉽게도 단 2개의 백도밖에 따지 못했을 때 도포를 입은 양반들이 나타나 일행을 안내했다.

“옛 사도 지크를 제외한 인간들은 시선을 떨구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드느냐.”

“따라와라. 오존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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