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89화 (1,179/1,794)

템빨 60권 - 21화

1만, 10만, 100만, 300만, 1,000만....

기존 유저들의 반발이 무색하게도 이변은 없었다.

새로운 업데이트 이후, Satisfy에는 단 며칠 만에 대규모 신규 유저가 유입됐다.

한동안 한산했던 각국 시작의 마을이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템빨국의 풍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템빨국 시작의 마을 셀레나.

영주 솔져가 창밖에 보이는 초보자들의 행렬을 보고 혀를 찼다.

“저 많은 사람들이 야탄교의 예비 신도들이라니....”

신규 유저들이 뒤늦게나마 Satisfy를 시작하리라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험치 상승률을 무려 700퍼센트나 올려주는 성장 물약의 등장 때문이었다.

무럭무럭 성장할 저들이 앞으로 야탄교를 번성시킬 거라고 생각하자 솔져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마을 근처에 야탄교 신전이 들어서기라도 했다간 치안이 순식간에 악화될 텐데.’

통합랭킹 4,986위.

솔져의 랭킹은 템빨국에 가입하기 이전과 비교해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주직을 맡다보니 사냥에 집중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근데 야탄교까지 다시 득세하게 되면 사냥을 완전히 통제당하는 건 아닐까 벌써부터 걱정됐다.

‘주민들이 힘들어지면 세수도 줄어들 테고....’

시작의 마을은 이름 그대로 마을이다.

도시 규모가 되기엔 인구가 부족했다.

하지만 전체 영토 면적은 상당히 컸다.

매일 새로운 플레이어가 유입되는 장소이니만큼 규모가 큰 게 당연했다. 퀘스트 달성률이 무척 높았고, 시장도 활발해서 세금이 상당히 짭짤했다.

코크로 섬 전투에서 큰 공적을 올리고, 아스모펠 밑에서 병사들을 육성하며 실적을 쌓았던 솔져가 중소규모 도시의 영주직을 마다하고 시작의 도시의 영주가 되기를 선택했던 이유다.

하지만 정작 영주가 되고 보니 업무량이 너무 많이 슬슬 지쳐가던 차인데 야탄교 신도들까지 늘어나게 생기자 한숨이 나왔다.

‘그냥 확 싹을 잘라버릴까....’

순진무구한 얼굴의 초보자들을 노려보는 솔져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영주님!”

헐레벌떡 달려온 기사가 다급히 외쳤다.

“재, 재상 각하께서....! 재상 각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

템빨국의 영토는 거대하다.

물론 사하란 제국과 비교하면 수십 배나 작았지만 서대륙의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2배, 3배 이상 면적이 크고 인구도 많았다.

그 거대한 국가의 정치를 책임지는 라우엘 재상이 고작 시작의 마을에 친히 방문했으니 솔져의 마음은 불안했다.

‘그동안 내가 일을 잘 못했나?’

마을을 나름 잘 운영해왔다고 자부했지만 혼자만의 착각일 확률이 높다.

자신은 뼛속까지 군인이므로 아무래도 정치엔 문외한이었으니까.

각을 잡고 똑바로 앉은 솔져에게 라우엘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편하게 계세요. 민망하게 왜 그러세요.”

“자고로 상관 앞에선 긴장을 유지해야하는 법. 전 이 자세가 편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지난 며칠 동안 고민하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라우엘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규 유저의 대규모 유입.

한데 그들 중 대부분이 야탄교 신도가 될 확률이 높다는 건 정말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지금의 야탄교만 해도 주기적으로 대악마를 소환하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실정인데, 다시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 사고를 치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힘들 게 분명했던 까닭이다.

‘본단을 쳐도 의미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야.’

레베카교는 교황청을 점령당하는 순간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교황청에 머물며 업무를 처리하는 교황과 원로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역의 모든 레베카교 신전이 교황청의 관리 하에 있었고 교황청의 부재는 모든 레베카교 신전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야탄의 종들은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성격들이 아니다.

대륙 각지를 떠돌며 실시간으로 악행을 저질렀다.

야탄 신전을 따로 관리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야탄 신전의 역할은 제물을 바치고 의식을 진행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딱히 어떤 명령체계가 존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갔다.

“솔져 님.”

“네.”

“야탄교가 모르페우스의 의도만큼 커져선 절대로 안 됩니다. 이미 옛날에 야탄교의 전성기를 경험해보셔서 알겠지만 야탄교 신도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야탄교의 표적은 늘 약자였다.

불특정다수의 약자를 일일이 보호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무척 어려운 일이며, 피해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인구 감소, 치안 하락, 경제 위축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아무리 방비를 철저히 해도 놈들이 마음에 숨어드는 걸 막기 힘든데 그 숫자가 수백, 수천 만이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그리드에 의해서 여러 야탄의 종들이 목숨을 잃었던 시기.

서대륙의 국가들은 그때조차도 야탄교를 발본색원하지 못했었다.

그나마 야탄교에 들어가려는 플레이어가 적어 세력을 크게 약화시킬 순 있었지만 완전히 뿌리를 뽑지는 못했다.

바퀴벌레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야탄교가 수백, 수천 만 명의 플레이어를 등에 업는다?

놈들을 정벌하는 건 영원토록 불가능한 일이 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저는 국고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네?”

맥락이 끊긴다.

갑자기 생뚱맞은 결론에 솔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보세요.”

인벤토리를 연 라우엘이 몇 개의 아이템을 꺼냈다.

검, 도, 창, 활, 지팡이, 오브 등등.

딱 봐도 레벨 제한이 낮은 무기들이 책상 위에 진열됐다.

“지난 며칠 동안 템빨국의 모든 대장장이들에게 초보자용 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보통 초보자용 무기엔 사용하지 않는 고급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동급의 무기보다 몇 배나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죠.”

“....?”

“솔져님이 이 아이템을 신규 유저들에게 지급하세요.”

“....네?”

“단, 조건이 붙습니다. 레베카교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 한정해서 아이템을 나눠주세요.”

“아....!”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솔져가 감탄했다.

그 반응을 보고 입 끝을 말아 올리는 라우엘의 흰 이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게임을 템빨국에서 시작하는 신규 유저 중에서 레베카교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 한해 10레벨, 50레벨, 100레벨, 150레벨, 200레벨 단위로 최상급 장비를 지급해줄 예정입니다.”

종교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어떤 종교에 소속된 후에 다시 종교를 바꾸기 위해선 탈퇴 후 1년의 대기시간이 필요했다.

최소 1년 이상은 야탄교의 세력이 커지는 걸 억제할 수 있다는 뜻.

그리고 많은 공략법이 공개돼 있는 현재 Satisfy에서 1년이란 무척 긴 시간이었다.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하는 사람은 200레벨 중반대도 노려볼 수 있었다.

“신규 유저들에게 야탄교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단 하나, 빠른 성장 속도 때문이죠. 기존보다 몇 배나 빨리 300레벨을 찍을 수 있다고 하니 혹할 수밖에요. 하지만 레벨을 빨리 올리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경험치 상승 버프보다 도리어 사냥 속도를 높이는 편이 더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빠른 사냥을 가능케 만드는 요소가 바로 템빨이다.

“모르페우스가 성장 물약으로 사람들을 현혹한 이상 우리는 템빨로 사람들을 현혹할 겁니다. 심지어 공짜로요.”

이 방법은 반드시 통한다.

물론 재정에는 심각한 타격이 생기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템빨국 소속의 플레이어가 늘어난다는 건 곧 세수가 증대한다는 뜻이며 레베카교 소속의 플레이어가 늘어난다는 건 곧 템빨국의 동맹이 강해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라우엘은 확신했고 그의 확신은 늘 높은 확률로 적중했다.

.....

....

...

“저요! 저도 주세요!”

“이걸 언제 다 나눠주고 앉았지....”

이틀 후, 셀레나의 광장.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이 솔져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Satisfy에 새로 유입된 플레이어 중 절반 이상이 시작의 마을로 셀레나를 선택한 여파였다.

이 순간에도 셀레나로 향하는 행렬은 전국 각지에서 계속 됐다.

인원 제한 때문에 템빨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시작한 신규 유저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셀레나로 이동 중이었다.

게임사를 플레이어가 이긴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였다.

야탄교에 유입된 플레이어의 숫자는 S.A그룹의 예상을 훨씬 밑돌았고 성장 물약의 매출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갓빨국! 갓빨국!”

신규 유저들은 템빨국을 찬양했다.

템빨국에서 레벨 구간별로 공짜로 나눠준 무기 덕분에 현질을 하지 않아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인공지능을 방패삼아 비난을 피하려고 시도했던 돈독 오른 게임사를 그리드와 템빨국이 응징했다는 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권력과 재력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한 사례로 손꼽히기도 했다.

물론 그리드의 마음은 찢어져나갔지만 말이다.

‘돌아가면 며칠 각 잡고 노가다만 해야겠군....’

바닥나기 직전인 재정을 확인한 그리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돈을 잘 번다고 해도 템빨국의 국고를 다시 채우기 위해선 수십 개의 아이템을 만들어야할 판국이었다.

‘뭐.... 반드시 복구할 수 있는 피해니까 괜찮아. 마음 추스르자.’

지금 이 순간에도 라우엘과 라빗이 동분서주 중이었다. 어떻게든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피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이번 사건은 어디까지나 투자다.

“음....”

그리드가 호두나무 숲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나흘째 숲에 틀어박힌 피아로가 부디 좋은 소식을 들고 돌아와 주길 바랐다.

황금호두를 재배할 수만 있다면 거지가 돼서 공허해진 마음이 다시 충만해질 것만 같았다.

“왕비전하.”

시간은 소중한 법.

피아로를 기다리는 동안 양저우 인근의 사냥터에서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있던 그리드에게 한 명의 귀족이 찾아왔다.

주변에 자욱한 피비린내에 흠칫 놀란 귀족이 정중히 고개 숙여 말했다.

“지크프렉터라는 자가 전하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어머, 정말요?”

며칠 동안 아이린의 모습으로 씽왕과 귀족들을 상대해온 그리드는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어있었다.

싱긋 웃으며 무기를 인벤토리에 회수한 그가 궁전으로 돌아갔다.

‘내 조언을 새겨들은 모양이군.’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나와 함께 환국으로 가지.”

“???”

곧 황당한 제안을 해오는 그랜드마스터를 보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됐다.

“아니, 놈들을 만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니까?”

당황하는 그리드를 그랜드마스터가 안심시켰다.

“그대의 경고를 무시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을 뿐이야. 그대의 경고를 듣고도 그들과 무작정 한 배를 탈 생각은 없다.”

“....”

그리드는 양반들만을 상대해왔을 뿐이다.

아직 직접 환국을 방문해본 경험이 없다.

고민 끝에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왜 그렇게 신뢰하는 건지, 내게 왜 그렇게 호의적인 건지 묻고 싶은 게 많다만 우선 알았어. 좋아, 동행하도록 하지.”

이건 적진을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랜드마스터와 함께해야만 가능한, 결코 놓쳐선 안 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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