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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87화 (1,177/1,794)

템빨 60권 - 19화

“한 숨 자야 되는 거 아니야? 정말로 안 쉬어도 괜찮겠어?”

“햇볕과 바람이 이불이 되어주니 눕지 않아도 누운듯하고, 풀과 흙의 냄새가 마음을 진정시켜주니 몸의 피로가 자연히 풀립니다. 이곳에서 노동하는 것 자체가 제게는 휴식인 셈이지요.”

‘전설의 농부에겐 흙냄새가 아로마쯤 되는 건가....’

내게도 쇠냄새가 아로마가 되는 날이 올까?

그럼 노동 능률이 조금이나마 더 오를 텐데....

자연히 이처럼 생각하는 그리드는 과연 지존이라 할 수 있었다.

게임에서 지존이 된다는 건 타인보다 부지런하다는 증거였으니까.

남들이 쉴 때도 홀로 버티며 하나라도 더 많은 일을 해내야 지존의 문턱이라도 밟아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는 지존이 될 만도 했다.

지금처럼 지쳐있는 상태에서도 더욱 더 일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으니 말이다.

“알았어. 난 쉬러갈 테니까 고생해. 해도 곧 떨어질 텐데 잘 챙겨 입고.”

“예, 전하. 반드시 좋은 소식을 안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황금호두는 엘릭서 다음가는 효능을 지닌 영약이다.

황금호두의 재배는 그리드의 염원이었고 피아로는 그리드의 염원을 반드시 이뤄주고 싶었다.

***

“어린놈들이 예쁜 건 알아가지고....”

씽왕에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6세, 7세, 10세로 연령대가 낮았는데 녀석들 모두가 그리드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장가를 가겠다고 난리였다.

어깨가 으쓱해져서 숙소로 돌아온 그리드가 거울 앞에 섰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눈가에 희미하게 지어지는 주름과 깊어진 눈빛 탓인지 소녀의 인상은 이제 없다.

한 아이의 엄마답게 정숙하고, 수천 만 백성의 어버이답게 강인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알고 있다.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은 여전히 여리고, 약하다.

가녀린 손목을 쥐어본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반드시.... 반드시 그대에게....”

영원에 가까운 젊음과 삶을 선사하리라.

변치 않는 나를 보고 고독과 두려움에 떠는 일이 없게끔 내가 도울 것이다.

다짐하는 그리드는 아이린의 입장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있었다.

아이린이 무조건 기뻐해줄 거라고 믿었다.

흠칫.

거울을 바라보던 그리드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창문이 열려있다.

심지어 그 사실을 바람에 커튼이 흩날리고 나서야 눈치 챘다.

‘뭐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땐 분명히 닫혀있었는데?

그리드가 넓은 방 안을 구석구석 살폈고,

“.....”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리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고, 찾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 초월자의 감각조차도 잠잠했다.

‘밖인가?’

철컥!

땡기미를 꺼내 쥔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칼날을 부착시켰다.

이때 발생하는 결착음으로 어딘가에 숨어있을지 모를 침입자의 청각을 집중시키는 한편 염룡검을 소환해 등 뒤로 숨겼다.

저벅, 저벅, 저벅.

고요한 실내에 그리드의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창가에 다다르기 직전, 그리드가 소리쳤다.

“갓 핸드!”

촤르르륵!!

6개의 흑금색 손이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중 유독 1개의 손이 빨랐다. 거머쥐고 있는 무기에 귀속 된 버프 스킬을 사용하는 타이밍도 가장 앞섰다.

“....!?”

숨죽인 채 창틀에 매달려있을 침입자를 갓 핸드들이 먼저 덮치게 만든 후 합류할 계획이었던 그리드가 창틀을 뛰어넘으려다가 멈칫 섰다.

갓 핸드들이 상공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목표물을 찾아내지 못해 갈 곳을 잃은 것이다.

그리드가 당황하는 순간이었다.

[위험이 다가옵니다.]

초월자의 감각이 경고를 보냈고,

-주인! 뒤다!

한 발 늦게 염룡검이 외쳤다.

쩌어엉!!

그리드의 바로 등 뒤에서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이 터졌다.

“큭!”

황급히 물러나 자세를 취한 그리드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명을 간신히 견뎌내며 시선을 든 그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착용되지 않아 스탯 효과를 받지 못한 염룡검 혼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참격.

<사하란의 검>을 휘두르는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의 참격이 염룡검과 맞부딪치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고?’

란스티어가 된 페이커조차도 두 눈 뜨고 있는 그리드의 방에 당당히 창문을 열고 잠입하진 못한다. 물체를 움직일 땐 미세하게나마 소음이 발생하기 마련이었고 기류가 변하는 법이므로 운신에 한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한데 그랜드마스터는 그리드가 잠시 거울을 바라보는 짧은 시간 동안 창문을 열고 들어와 방 안에 몸을 숨겼다.

그리드가 직접 두 눈으로 샅샅이 살폈음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고 초월자의 감각에 기척이 읽히지도 않았다.

‘이 정도였나?’

임철호 회장이 공인한 최강의 NPC를 그간 너무 과소평가해왔던 걸지도 모른다.

탑의 하야테가 초월자의 궁극 중 하나인 용살자라면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는 또 다른 궁극인 신살자에 다가섰던 존재.

심지어 그가 신살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나태의 죄’ 때문이었다.

신들이 그에게 새긴 죄 탓에 지크프렉터는 신들과의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렸었다.

칠선인 중 유독 그에게만 가장 큰 죄를 새긴 이유는 그만큼 그를 경계했다는 뜻이 된다.

만약 칠선인이 모두 모여 신들과 맞서 싸웠다면 신들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드의 잡념이 깊어지는 그때였다.

까아앙!!

그랜드마스터의 이어지는 참격에 실린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염룡검이 끝내 날아가 벽면에 처박혔다.

주륵.

염룡검이 스치고 지나간 그리드의 눈가에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권태로 물들어있던 그랜드마스터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피하지 않는 건가.”

그랜드마스터는 스스로 움직이는 신비로운 검을 떨쳐내는 순간 궤도를 계산했다.

템빨왕비를 사칭하는 괴한의 왼쪽 눈에 검이 꽂히게끔 완벽하게 유도했다.

하지만 검이 날아가는 도중 스스로 날을 살짝 비튼 덕분에 궤도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버렸다.

그 사실을 엿본 괴한은 검을 굳이 피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 동체시력.... 초월자로군.”

그랜드마스터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손과 검....

템빨왕 그리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티팩트들이다.

템빨왕비를 사칭하고 있는 눈앞 괴한의 정체는 어쩌면....

“.....”

“...꿀꺽.”

그리드의 긴장감이 점차 커졌다.

그랜드마스터 즉, 6악 지크.

나태의 죄를 짊어진 그가 사건 발생 후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눈앞에 나타났단 사실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인데,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서있기만 하자 무슨 생각인지 알기 힘들어서 더 불안해졌다.

결국 그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크프렉터.”

‘어째서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쫓겨난 신들과 만나선 안 돼. 인간을 입맛대로 통제하는 놈들은 어쩌면 서쪽의 신들보다 더 흉포한 존재일지도 몰라.”

‘어째서 내 목적을 알고 있지?’

그리드를 빤히 응시하는 그랜드마스터의 눈동자가 어느새 다시 권태로 물들어 있었다.

수잔을 압살했다는 인간이 템빨왕비일 리 없다는 생각에 직접 찾아왔던 그는 이미 모든 정신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템빨왕비를 사칭하는 괴한의 실체를 유추하던 도중부터 지독한 게으름이 그를 지배해버렸다.

그의 영혼에 각인된 나태의 죄가 그의 영혼을, 사고를 잠식해나갔다.

결국.

“귀찮군.”

“....엉?”

“우선은 돌아가겠다.”

그랜드마스터의 사고가 완전히 멈춰버렸다.

분별력을 잃은 그에게 남은 건 이제 귀소본능과 수면욕구뿐이었다.

“비켜.”

“아, 아니, 이봐! 기껏 찾아와 놓고 뭔데! 사람이 말을 했으면 뭐라고 반응이라도 보이던....!”

지나쳐가는 그랜드마스터를 붙잡으려던 그리드가 문득 거울에 비추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제야 그랜드마스터가 자신에게 적대심을 보였던 이유를 납득하더니 인피면구를 벗으려고 했지만 그랜드마스터는 이미 창밖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아.... 젠장.”

안 되겠다.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쯧, 혀를 찬 그리드가 누군가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뭐해?

귓속말 대상은 분명히 온라인 상태였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그리드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자신의 귓속말을 듣고도 무시할 리 없다는 확신에서였다.

역시나.

-뭐냐? 다짜고짜 템빨왕비가 나타났다기에 의아했는데 역시 너도 함께 동대륙으로 넘어왔던 거냐.

머잖아 떨떠름한 답변이 돌아왔다.

상대방의 정체는 지발.

과거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리드의 가장 큰 경쟁자 중 하나인 거물급 플레이어였다.

-그랜드마스터에게 전해줘. 아직도 인류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쫓겨난 신들을 믿어선 안 된다고. 놈들은 서쪽의 신들보다 더 흉악하고 나쁜 놈들이거든.

-...그러고 보니 네 서사시에 동쪽 신들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었지.

-....

서사시 이야기가 나오자 그리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상황과 감정, 발언 등을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에게 생중계하는 서사시 시스템이 솔직히 그리드는 썩 좋지 않았다. 뉴스에 뜬 서사시 내용이 떠오를 때마다 이불을 박차고 잠에서 깨어난 적이 있었을 정도다.

사생활침해로 S.A그룹을 고소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침묵하는 그리드에게 지발이 이어 답했다.

-네 요청은 기각하겠다. 너의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대상을 판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애초에 난 그랜드마스터에게 훈수를 둘 위치가 아니야.

-그러지 말고 언질이라도 해줘. 내가 말했다고 하면 그랜드마스터도 한 번쯤은 더 생각해볼 거야.

-뭐?

지발이 콧방귀 뀌었다.

그랜드마스터는 Satisfy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거물 중 하나다.

20억 플레이어 중 대부분이 평생가도 그와 대면조차 못해볼 것이다.

한데 그런 거물에게 그리드라는 이름 석자가 통할 거라고?

‘물론 그랜드마스터와 그리드의 인연이 결코 얕지만은 않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나갔다.

순수한 건지, 거만한 건지 모를 지경.

끝내 실소를 터뜨리고 만 지발이 수락했다.

-뭐, 좋아. 하켄 왕국에서의 은혜도 갚을 겸 언질이라도 해보마.

귓등으로도 안 듣겠지만, 이라는 뒷말을 삼킨 지발이 고맙다고 인사하는 그리드에게 질문했다.

-씽과 혈맹을 맺었던데. 만약 그랜드마스터가 직접 씽왕을 치러 가도 넌 씽왕을 위해서 싸울 거냐?

-당연하지.

-그러냐.... 그 각오가 사실이라면 왕비만큼은 미리 피신시키는 걸 추천하마. 내가 못 지켜줄 수도 있으니까.

-하핫, 조언 고맙네.

-정말 환장하겠군. 웃을 처지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거냐?

-아니, 진짜로 고마워서 그래.

-쯧....

두 사람의 대화는 곧 끝났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잠에서 깬 그랜드마스터를 찾아간 지발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템빨왕 그리드가 말하기를, 쫓겨난 신들을 믿어선 안 된다고 합니다.”

“....”

역시 대꾸조차 없다.

깨있는 시간이 하루에 채 2시간도 안 되는 그랜드마스터에겐 쓸데없는 말들을 흘려 넘기는 재주가 있었다.

‘의리는 지켰다.’

그리드에게 지었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낸 듯한 기분을 느낀 지발이 그대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알았다.”

“....??”

그랜드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고 지발은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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