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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82화 (1,172/1,794)

템빨 60권 - 17화

“어찌 감사를 표해야할지....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드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넘긴 씽왕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비굴해 보이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보다 국가와 백성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으니까.

씽왕의 온후한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리드가 이내 빙그레 웃어주었다.

“템빨왕 전하께서는 씽을 위해, 그리고 현무 신을 위해 싸웠던 시점부터 이미 씽을 혈맹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서로 돕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그리 격식 차리실 필요 없어요.”

“혈맹....”

맹우를 넘어서는, 보다 가족에 가까운 어감이다.

템빨왕 그리드 덕분에 잊었던 옛 신을 되찾고 역사와 나라를 바로세울 수 있었노라 생각해온 씽왕의 입장에선 무척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풀기 힘든 의문이 있었다.

“템빨왕 전하께서 아무런 연고 없는 씽을 도와주신 점에 대해선 딱히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자고로 영웅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존재이니까요. 하지만 씽을 혈맹이라고 표현하셨다는 건 좀 납득하기 어렵군요. 씽은 그분께 어떤 것도 해드린 게 없건만 어찌 혈맹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신 거겠죠. 인류는 언젠가 반드시 협력해야합니다. 지옥의 악마들과 천상의 신들.... 이 세상엔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가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

씽왕은 양반들을 직접 만나고 겪어왔다.

인류가 언젠간 반드시 협력해야한다는 왕비의 주장에 공감했다.

“전하! 전하아!!”

수백 명의 무사들이 복도로 밀려들어왔다.

궁전이 습격당하고 10분이 채 안 되서 도착한 지원 병력이었다.

사태가 정리된 후 도착했으니 늦은 것처럼 보이지만 왕궁의 규모를 생각하면 정 반대다.

그들의 출동은 신속했고, 굳이 그리드가 없었어도 씽왕을 탈출시키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물론 많은 희생이 뒤따랐을 테지만 말이다.

무사들의 면면을 쭉 살펴본 그리드가 말을 이었다.

“템빨왕 전하께서는 씽이라는 강국과 함께 앞으로의 난관을 헤쳐 나가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혈맹이라 칭하신 거고요. 전하께선 달갑지 않으신가요?”

“그럴 리가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씽은 분명히 강하다.

하지만 여러 사태에서 증명됐듯, 양반이나 그랜드마스터 등의 초월자를 감당할 여력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영원히 현무의 치마폭에 숨어 지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씽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힘을 지닌 템빨왕과 템빨왕비가 이끄는 템빨국과 협력하여 더 나은 미래를 그리고 싶었다. 백성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안겨주는 것이야말로 그의 바람이자 의무였기 때문이다.

[템빨국과 씽이 혈맹을 맺었습니다.]

[두 나라는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좋아.’

그리드가 감격에 떨었다.

초국에 이어서 씽까지.

동대륙의 4개 국가 중 절반을 회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처음 동대륙에 방문했을 때까지만 해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다.

노고가 보답 받은 것 같아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입 꼬리를 올리는 그에게 씽왕이 호의를 베풀었다.

“왕비님을 환영하는 연회를 준비해놓겠습니다. 우선 방으로 안내해 드릴 터이니 여독부터 푸시기 바랍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리드는 씽왕과 대화하는 내내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 말 한 마디를 해도 궁리한 뒤 입을 열곤 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이 아이린으로 변장하고 있단 사실도 망각하지 않고 언행에 신경 쓸 수 있었다.

한 손을 살포시 가슴에 얹고 조신하게 인사하는 그리드의 모습은 영락없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정신까지 여성이 된 건 아니었다.

“돌아버리겠네.”

궁녀들의 안내를 받아 귀빈실에 입장한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에 준비 된 옷가지들이 너무 하늘거리거나 노출도가 높은 까닭이었다.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치마라던가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저고리가 있는가 하면 옆트임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치파오도 있었다.

모두 씽의 정통 예복이었는데 그리드가 입기엔 부담이 컸다.

“이거 입고 밥 먹으면 양념 다 묻겠는데....”

그나마 노출도가 적은 의상은 소매통이 너무 넓어서 수박이 들어갈 것만 같다.

치파오가 가장 편해 보였지만 허리라인과 허벅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지라 입고 싶지 않다.

‘아이린의 예쁜 다리를 아무한테나 보여줄 순 없지.’

결국.

“역시 전하의 예상대로 그랜드마스터가 근처에 있었습니다. 한데 전하, 그런 차림새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될 게 뭐 있어? 나한텐 이게 예복인데.”

그리드는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갑옷을 무장했다.

전신을 금속으로 꽁꽁 에워싸서 목과 얼굴을 제외한 신체부위의 노출을 최소화시켰다.

답답하진 않았다.

그리드는 거의 늘 갑옷을 무장하고 다녔으니까.

애초에 그의 모든 아이템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지라 불편할래야 불편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그랜드마스터는 뭘 하고 있었지?”

그리드의 명령으로 전투 내내 은신하고 있었던 피아로는 예정대로 네오 적기사들의 뒤를 추적했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그랜드마스터의 모습을 엿봤다.

“지발이라는 사내와 함께 도시 외곽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위치를 보아 씽왕의 퇴로를 차단할 속셈이었던 것 같더군요.”

“어울리지 않게 부지런하군.”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의 정체는 6악 지크.

나태의 죄를 짊어진 존재다.

뱀파이어들이 그렇듯, 그의 활동엔 많은 제약이 발생했다. 어떤 사건에 직접 개입하는 게 사실상 힘들었다.

한데 직접 나서서 씽왕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 일이 그만큼 중요하단 뜻이겠지.’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지크의 입장에서 오존과의 만남은 염원을 이루기 위한 첫 단계였으니까.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면서라도 나태를 극복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겠군.’

그랜드마스터는 쥬앙데르크의 편에 섰던 그리드를 적대하지 않고 도리어 아군으로 회유하려고 했었다.

그리드에게 호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리드의 힘을 필요로하는 눈치였다.

그럼 더 쉽다.

설득할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오존과 힘을 합치는 순간 칠악성이 오명을 벗을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는 사실을 전해줘야 한다.

“마마, 준비는 다 되셨나이까?”

“그래.”

마음을 다잡던 그리드가 마침 찾아온 궁녀들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

“템빨 왕비?”

그랜드마스터 앞에 무릎 꿇고 보고하는 네오 적기사들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지발이 귀를 의심했다.

스스로를 템빨 왕비 아이린이라고 밝힌 여성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수잔의 목을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이린에겐 전투 능력이 없는 거로 아는데?’

아이린은 플레이어 사이에서 엄청난 유명인이다.

NPC 최초로 플레이어와 혼인한 여인.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고 빼어난 미모까지 지닌 탓에 집중 조명된 횟수가 많다.

그리고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그녀의 취미는 꽃꽂이다.

스테임 공작의 혈통을 이었음에도 검이나 마법엔 문외한이라고 했다.

‘그동안의 순수한 모습들은 죄다 연기였나?’

아니, 연기였다고 하기엔 억지다.

만약 그녀가 고강한 실력자였다면 임모탈의 습격으로부터 칸을 지켜내는 등 여러 가지 활약을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어떤 활약을 펼친 적이 없다. 오히려 야탄교에 납치당한 전력이 있을 정도이니 도리어 연약하다고 표현함이 옳았다.

‘...그럼 갑자기 강해졌다는 건가?’

확실히, 템빨국은 강해지기에 여러모로 좋은 환경을 갖췄다.

대현자 스틱세이와 메르세데스, 그리고 피아로.

대륙 전체를 뒤져도 찾기 힘든 네임드 중의 네임드들이 템빨국엔 득실거렸으니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속성으로 강해지는 게 가능할 수도 있었다.

거기에 그리드의 템빨까지 등에 업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심지어 아이린 본인의 혈통도 나쁘지 않아.’

스테임 공작 또한 에트날 왕국의 기둥 중 하나였던 인물.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봤을 때, 아이린이 어느 날 갑자기 강해졌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수잔을 압도할 정도로 강해졌다는 게 납득이 안 되는군.’

룬어.

레벨 제한 때문에 지발은 아직도 습득하지 못한 그 스킬을 수잔은 제법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경지에 올랐었다.

수잔 본인은 자신이 메르세데스와 비견될 정도로 강해졌다고 자부했고, 객관적으로 봐도 칠공작 중 하나였던 취공 수준까진 성장한 듯 보였었다.

한데 그녀를 압살했다고?

의문에 휩싸인 지발에게 그랜드마스터가 질문했다.

“납득하기 힘든 결과인가?”

“네, 뭔가 이상합니다. 템빨국의 모든 자원이 아이린 왕비를 강화시키기 위해 투자됐다고 감안해도 짧은 시간 내에 그토록 강해졌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그럼 그녀가 템빨 왕비가 아니라는 뜻이겠군.”

사실 굳이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그랜드마스터는 서대륙의 중요 인물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어쩌면 지발 이상으로 아이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의심했다.

템빨 왕비가 수잔보다 강할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 누구일까? 저곳에 있는 훼방꾼은.”

악이 되겠노라 결심했다.

수천 년 동안 지켜온 자아를 상실할 각오로 힘겹게 내린 결단이었다.

한데 결단을 내리자마자 방해를 받고 일이 틀어졌으니 불쾌하다.

드물게 눈살을 찌푸린 그랜드마스터가 멀리 보이는 양저우의 왕궁을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한편 왕궁의 그리드는....

‘....이러다가 체하겠네.’

미인의 삶을 체험하고 있었다.

씽의 귀족들은 무척 예의가 발랐고 템빨 왕비의 고강한 실력을 두려워하는 눈치였지만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계속 왕비의 모습을 엿봤다.

물론 감히 흑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본능적으로, 혹은 순수하게 아이린이라는 여인에게 매료됐을 뿐이며 이를 티내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그리드 당사자의 눈에는 다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치파오라도 입었으면 난리 났겠군.’

그리드의 기분이 복잡 미묘해졌다.

자신의 부인이 평소에도 계속 이런 시선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이 불안했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유혹당하고 있을 그녀를 당장 곁으로 소환해 곁에 둬야만 안심이 될 것만 같았다.

‘....아니, 그건 완전히 의처증이잖아.’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낸 그리드가 곁에 앉은 피아로에게 다짐해보였다.

“피아로. 나는 아이린이 결코 한눈 팔 수 없게끔 멋진 남자가 될 거야. 반드시.”

“전하....”

피아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여인의 모습으로 멋진 남자가 되겠노라 다짐하는 주군의 모습이 왠지 측은했던 까닭이다.

“저는 전하를 볼 때마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

“....?”

피아로의 반응을 보자 어째선지 기분이 불쾌해지는 그리드였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화제도 돌릴 겸 씽왕에게 용건을 꺼냈다.

“이곳 양저우에서 황금호두를 재배한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괜찮으시면 저희가 재배지를 한 번 둘러보고 싶은데 안내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씽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에 그리드의 표정은 굳고 말았다.

“다만 재배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황금호두는 오직 자연적으로 자생하는 식물로 인위적으로 기르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뭐? 이런 제길.’

그리드는 낭패했고,

“호오라.”

피아로는 도리어 두 눈을 반짝였다. 뭔가 도전의식을 불태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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