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0권 - 14화
시대는 변했다.
동대륙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의 모습을 보는 건 이제 흔한 일이다.
“....”
부바트 또한 고민 끝에 활동 거점을 동대륙으로 옮겼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하늘의 부름> 퀘스트를 계기로 동대륙을 방문했던 랭커 중 상당수가 그대로 씽에 자리를 잡았다.
서대륙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실하게 구축했다면 또 모를까, 서대륙보다 풍부한 사냥터와 퀘스트를 제공하는 동대륙에서의 생활을 마다할 이유가 그들 입장에선 전혀 없던 것이다.
“....폭풍전야군.”
누구와 싸워도 한 번쯤은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전투의 달인.
황소처럼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부바트가 사나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에 고정돼 있었다.
차오즈에서의 공로와 실력을 인정받아 귀족의 작위를 얻었다지만, 아직 품계가 낮아 감히 왕 앞에서 고개를 들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대소신료가 모인 대전에서 부바트의 위치는 말석.
옥좌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불길하여 도통 잠을 못 이루겠소.”
회의를 소집해놓고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던 씽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현무를 수놓은 황금포가 오늘따라 화려하지 않고 초라하다. 근심걱정으로 누렇게 뜬 씽왕의 안색과 닮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귀인의 도움을 받아 잊었던 옛 신을 되찾고 환국으로부터 독립했건만.... 앞으로는 환국을 잊고 평화를 영위하겠노라 다짐했건만 외지에서 온 불청객이 자꾸만 싫은 기억을 들쑤시는구려. 그들의 의도가 불순하고 나라에 해악을 끼칠 것 같으니 대책을 논의해야겠소.”
지발 일당을 말하는 것이다.
한 달 전 나타난 그들 일당은 씽의 백성들에게 환국에 대해 묻기를 반복하며 민심을 동요시킨 것으로 모자라서 감히 씽왕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단순하다고 밝혔다.
환국의 위치를 안내해달라는 것.
안 될 일이다.
씽은 현재 현무의 가호를 받고 있는 상태.
가호 덕분에 가짜 신(양반)의 출입을 금할 수 있게 됐지만 이 효력을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선 절대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가짜 신을 잊을 것.
씽의 백성들은 그들을 언급하지 말아야할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떠올려서도 안 됐다.
오랜 세월 현무 신을 잊었듯이 그들을 잊어야만 그들의 신격이 약화되고 현무 신의 권능이 강해졌다.
“불청객들 탓에 양저우 곳곳에서 환국과 양반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 현무 신의 가호가 약해질까 두렵구려. 이 사태를 도대체 어찌 진정시켜야한단 말이오?”
“으음....”
대소신료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누구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부바트의 속이 타들어갔다.
‘뭘 고민하는 거지? 놈들을 그냥 추방해버리면 간단하지 않나?’
부바트가 작금의 분위기를 폭풍전야라고 느꼈던 이유는 조만간 혈투가 발생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씽왕과 대소신료들이 고작 20명도 안 되는 지발 일당을 어찌해야할지 몰라 전전긍긍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이들은 어째서 지발 일당을 추방하자거나 없애자는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걸까?
부바트는 답답했지만 일단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회의에 진척이 없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소신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불청객들을 쫓아내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닐지요?”
“허!”
“저런 무례한 자를 보았나!”
말석의 부바트가 감히 멋대로 떠들자 대소신료들이 학을 뗐다. 바로 옆에 있던 어떤 귀족은 부바트의 옆구리를 찌르며 연신 고개를 저어보였다.
하지만 부바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까지 치켜들고 씽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그들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처단함이 옳다고 봅니다.”
부바트는 씽에서 살아가겠노라 결정했다. 그리고 이미 선택한 이상 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잠자코 지켜만 볼 순 없었다. 매번 이런 한심한 상황을 겪다간 현타가 올 수도 있었으니까.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도 부바트는 꿋꿋이 씽왕을 바라보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내려 보던 씽왕은 이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군. 귀공은 양반들을 많이 만나보지 못한 탓에 아직 안목이 부족하겠어. 그러니 작금의 사태를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겠군.”
“....?”
안목?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바트에게 씽왕이 설명해주었다.
“불청객들 중에는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강자가 존재한다네. 무력으로 그와 대적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지. 씽 전체가 멸망할 걸세.”
씽왕과 대소신료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양반들에게 지배당해왔다. 양반을 곁에서 섬기다 보니 강자를 감지하는 일종의 육감 같은 것이 생겼다.
그러므로 알 수 있었다.
성문을 두드리던 불청객들의 가장 후위에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 그는 괴물이다.
양반조차 초월하는 괴물.
멀리서 그 모습을 엿보았을 땐 무신이 강림한 줄로만 알았을 정도다.
“그런....”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부바트가 입을 다물었다.
서대륙의 어지간한 국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이 씽을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지발의 곁에 있었다고?
‘그리드가 브라함을 얻었듯이 지발도 전대 전설을 동료로 얻은 건가?’
부바트는 이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마스터의 존재를 아는 플레이어는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대단하군.... 동등한 레벨이었다면 이기지 못했겠어.’
근접 전투 직업군은 최소 1개 이상의 스턴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일단 대상에게 접근해서 스킬을 적중시킬 수만 있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대상을 스턴 시켰고 이때 치명상을 입히는 게 가능했다.
여기서 문제는 스킬을 적중시켜야한다는 부분에 있다.
스킬 자체가 빗나가면 스턴이 발생할 확률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궁성 지슈카는....
타닷. 탓.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지발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계속해서 반 보, 한 보씩 뒤로 물러나며 간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유지했다.
단지 피하기만 할뿐이라면 지루한 술래잡기에 불과했겠지만,
피잉-! 피핑!!
지슈카는 간격을 벌릴 때마다 동시에 화살까지 쏴서 지발에게 데미지를 누적시켰다.
근접전 최약체 직업인 궁수가 어이없게도 근접 직업군의 카운터로 진화한 것이다.
전투 내내 헛칼질만 하다가 고슴도치가 된 지발이 드디어 구석까지 몰린 지슈카의 턱 끝에 검을 겨눴다가 내려놓았다.
“하.... 졌다.”
현재 지슈카는 레벨이 초기화된 상태.
그런 것치곤 왠지 화살이 많이 아팠지만, 어쨌든 시기적으로 30레벨쯤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의 그녀에게 이기는 건 당연한 일.
지발은 자신과 지슈카의 레벨이 동급이었을 경우를 가정해야했다.
“네 레벨이 300만 넘었어도 코너에 몰아넣기 전에 내가 죽었겠지.”
“네가 마장기를 소환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야.”
“뭐냐? 어울리지 않게 남을 배려해서 말하는 거냐?”
아그너스만 없었으면 미친개라는 별명은 지슈카의 것이었을 거라는 설이 있다.
그 정도로 지슈카의 성격은 포악했다.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체다카 길드 시절의 지슈카를 사냥터에서 만날 때마다 트러블을 겪었던 기억을 떠올린 지발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팔짱 낀 지슈카가 싱긋 웃었다.
“그리드의 취향을 연구하다 보니까 성격이 좀 변하네.”
“천하의 지슈카가 고작 남자 때문에.....”
“변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
사실 지발도 망나니로 유명하긴 했었다.
통합랭킹 2위에 올라 엄청난 권력과 재력을 거머쥐었던 그는 미국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오만방자했다.
하지만 다 옛날이야기다.
자신의 부족함을 실감하고 정진하는 중인 지발은 이제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웠다.
갑옷에 박힌 화살을 어느새 다 뽑아낸 그가 지슈카에게 악수를 건넸다.
“어쨌든 축하한다. 전설이 된 거 말이야.”
“고마워.”
처음엔 경쟁 관계였고, 이후엔 악연이었다.
지슈카와 지발은 지난 6년 동안 서로에게 이를 드러냈었다. 방송에서 대놓고 서로를 비방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간 두 사람은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시대가 변했듯이 사고도, 성격도 변했다.
철이 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수도 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퀘스트가 밀려서 정신없이 바쁘거든.”
“그래, 잘 가라.”
지슈카가 먼저 발길을 돌렸고 지발은 순순히 그녀를 떠나보내려고 했다.
지슈카의 앞길을 가로막는 그랜드마스터의 출현은 지발의 의도와 전혀 달랐다.
“....!?”
지슈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등을 돌리자 바로 눈앞에 서있는 장신의 남자.
마른 듯하면서도 그리드만큼이나 넓은 어깨를 지닌 그 사내의 머리 위에 떠있는 ‘지크프렉터’라는 이름은 지슈카도 알고 있었다.
“그랜드마스터....!”
그리드는 말했었다.
칠악성의 화신이자 제국의 흑막이었던 그랜드마스터는 임철호 회장이 공인한 최강의 NPC라고.
상상을 넘어서는 경지에 있는 브라함이나 피아로보다 한 수 위라는 뜻이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단 사실에 지슈카는 긴장했다.
“....흥미롭군.”
당장이라도 잠에 들 듯, 혹은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른한 그랜드마스터의 시선이 지슈카의 가슴에 꽂혔다.
불쾌감을 주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지슈카가 주먹을 말아 쥐는 순간 그랜드마스터가 중얼거렸다.
“인간이 파마의 화살을 품다니.”
“....!”
지슈카가 경악했다.
조금 전 그녀가 사당에서 얻은 화살.
그것은 그녀의 예상과 달리 영웅왕의 투기, 혹은 검성의 검기와 같은 개념에 속하는 ‘자원’으로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한데 그랜드마스터는 단번에 꿰뚫어 본 것이다.
얼어붙어 있는 지슈카를 스쳐지나가면서,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는 속삭였다.
“무신을 조심해라.”
***
수군수군.
양저우 외성 관문.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인파가 술렁였다.
햇볕 한 번 보지 않은 듯이 흰 피부와 눈꽃처럼 빛나는 은발.
서대륙의 동화책에 등장하는 공주가 저런 식으로 묘사되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드는 이국적인 외모의 미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너무나도 가녀린 그녀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묵색의 검으로 간신히 지탱한 채 버티고 있었다.
“도대체....”
맑고 푸른 눈동자에 원망이 담겨있다.
꽈드득, 이를 간 은발의 미녀가 곁에 선 중년의 남성에게 버럭 소리쳤다.
“도대체 몇 번을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이런 빌어먹을! 사람 죽일 작정이냐!!”
“.....”
고아한 외모와 달리 목청이 크고 말투가 거칠다.
사람들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은발 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리드.
아이린의 모습으로 변장한 그리드였다.
판게아에서 이곳 양저우에 도착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피아로와 무려 19번이나 대련한 그는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 왜 사람이 적당히를 몰라? 일주일 내내 스태미나가 바닥나서 뭘 할 수가 없잖아!”
“....죄송합니다. 전하의 새로운 무구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만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에휴....”
예전부터 피아로는 강자와의 싸움을 즐겼다.
소위 말하는 전투광이다.
그래, 광.
미쳤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무구를 역으로 지배하는 탈수, 스스로 움직이며 브레스를 내뿜는 염룡검, 그리고 천재적인 수준으로 지능이 발달한 갓 핸드를 동시에 다루며 몬스터를 학살하는 그리드에게 피아로는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급기야 그리드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최초에 그리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드 또한 현재 자신의 수준을 가늠해보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그게 실수였다.
여태껏 체험하지 못한 극악 난이도의 결투에 매료된 피아로는 반쯤 이성을 잃어버렸다. 단 한 번의 결투론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려선 그리드에게 쉴 새 없이 결투를 졸라댔다.
그 탓에 지난 일주일 동안 녹초가 된 그리드는 양반 가람과 싸웠을 때보다 더 큰 고통과 공포를 느꼈다.
피아로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바람에 결투가 거듭될수록 새로운 약점을 공략 당했으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크게 지쳤다.
뭐, 덕분에 탈수와 염룡검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됐으니 엄청난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힘든 일정이었다.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드래곤 레어에서 광물을 캐온 것으로 모자라서 이젠 팀킬까지 걱정해야 한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풀썩.
그리드가 급기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버티고 설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각 없이 다리를 벌리는 그에게 험험, 헛기침으로 주의를 준 피아로가 질문했다.
“정말로 지금 모습으로 씽왕을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어. 말 했잖아. 언젠간 사람들이 아이린을 신격화하게 만들 거라고. 일단은 명성부터 쌓아놔야지. 이번 활동 기간에는 끝까지 아이린의 모습으로 있을 거야.”
어차피 정체는 템빨왕비라고 밝힐 계획이다.
씽왕에게 템빨왕 그리드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자각이 있다면 아이린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판단하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종용했다.
“허면 일단 옷차림부터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
“어? 아.... 그래.”
치마는 도무지 안 되겠다.
가랑이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낯선 것은 둘째 치고 몸가짐에 제약이 너무 많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양반다리를 하고 있었음을 자각한 그리드가 주변 남성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봐준 후 조신하게 다리를 오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