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0권 - 13화
Satisfy를 오픈과 동시에 접했던 1세대 플레이어들.
그들 중 상당수가 Satisfy를 기존의 게임과 비슷하게 인식했다.
결국 전투야말로 핵심적인, 그리고 궁극적인 컨텐츠일 거라고 확신하고 전투 직업군으로 전직했다.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그 속에 존재하는 사회의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전투 직업군으로 전직한 사람 중 무려 70퍼센트에 육박하는 사람이 직업을 궁수로 선택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전투와 실제로 동반되는 통증에 두려움을 느낀 여파였다.
그리드, 크라우젤, 유라 등의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1세대 플레이어가 어처구니없게도 ‘최약의 세대’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이유다.
***
지발.
한때 최대 규모 길드의 장이었던 그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여러 사건 끝에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에게 선택 받아 칠악성 아니, 칠선인의 부활을 돕는 사도로서 활약 중이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이제 좀 적응되는군.”
동대륙, 씽.
중세의 중국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국가다. 높은 탑이 많은 것을 보아 대리국(大理國)을 모티브로 삼은 듯하다. 동서양의 문화가 혼합됐던 초국과도 느낌이 많이 달랐다.
처음에는 여러모로 낯설어 어색했던 지발이지만 이젠 상당히 적응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펄럭이는 도포의 불편함을 잊었고 포권지례가 자연스러워졌다. 지네와 뱀으로 만든 요리를 보고도 기겁하지 않게 됐다.
다만 문제는....
“또 다시 거절의 의사를 밝혀왔어. 짜증나는데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어때?”
일에 진척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토벌당한 히드라.
덕분에 비교적 쉽게 동대륙으로 넘어온 지발 일행의 목적은 환국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국 왕실과 씽국 왕실 모두 지발 일행에게 비협조적이었다. 환국의 위치를 알려주기는커녕 환국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치를 떨며 문전박대했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수확이 없자 여기사 수잔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이 상태로는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환국에 다가가지 못할 거라고.”
쫓겨난 신들이 세운 나라.
그곳 환국을 방문해야만 지크프렉터의 원대한 계획에 첫 번째 단추가 꿰어진다.
하지만 환국의 위치를 알고 있을 초왕과 씽왕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으니 낭패다.
쿵!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걷어찬 수잔이 이를 갈았다.
“처음부터 실력 행사를 했어야해. 무력으로 두 나라를 굴복시켜서라도 환국의 정보를 얻었어야 한다고.”
초국과 씽국은 본래 환국의 식민지였을 확률이 높다.
두 나라 곳곳에 환국을 섬겼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환국으로부터 독립해 적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지발 일행이 두 나라에게 감시당하고, 경계당하는 이유다.
수잔은 본인들의 상황이 썩 나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랜드마스터께서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셨잖냐.”
“지켜만 봐서야 대체 무슨 소용이야? 이건 쓸데없는 시간 낭비야. 지발 네가 지크 님을 설득해봐. 응? 너는 지크 님의 총애를 받고 있잖아.”
‘네가 자꾸 그러니까 그랜드마스터의 신임을 못 얻는 거지.’
수잔이 이마의 상흔을 시도 때도 없이 붉히는 이유는 그녀가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다른 네오 적기사들과 달리 진득한 면이 없다.
그녀의 친척인 메르세데스와 비교하면 거의 어린애 수준이고.
쯧, 혀를 찬 지발이 설명했다.
“그랜드마스터께서 조금 더 지켜보자고 말씀하신 이유는 쫓겨난 신들이 초국과 씽을 어떻게 여기는지 판단하기 위해서야. 우리가 두 나라에 섣불리 무력을 행사했다가 쫓겨난 신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게 되면 좋을 게 없으니까.”
“하? 쫓겨난 신들이 두 나라를 아까기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그럴 리가 없잖아? 두 나라 모두 주작인지, 현무인지 하는 요상한 괴물들을 신이라고 떠받들고 앉았는데 쫓겨난 신들이 뭐가 예쁘다고 두 나라를 챙기겠어?”
“속사정은 모르는 거니까. 정 답답하면 네가 직접 그랜드마스터께 따져보던가.”
“따지라니, 무슨...! 그냥 답답해서 하소연해본 것뿐이야! 나는 지크 님을 의심하지 않아!”
쾅!
뜨끔해서 얼굴을 붉힌 수잔이 그대로 방을 떠나버렸다.
다시 혼자 남은 지발이 한숨 쉬었다.
‘답답하긴 하군.’
사실 지발의 생각도 수잔과 같았다.
환국이 초국과 씽국을 적대하고 있을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두 나라가 환국을 적대하는 마당에 환국이라고 두 나라를 곱게 볼 리 만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지발은 그리드의 서사시들을 통해서 동대륙의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다.
당장 지크프렉터가 씽을 초토화시킬지언정 쫓겨난 신들의 분노를 살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하는 법이다.
환국이 초국과 씽의 백성들을 살려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했다.
그랜드마스터의 신중함을 비난해선 안 됐다.
벌써 2년 가까이 그랜드마스터를 섬겨온 지발은 단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다.
‘이번 퀘스트는 특히 중요하다. 차분하게 때를 기다려야.... 응?’
마음을 다스리며 창밖을 바라보던 지발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씽의 수도 양저우.
셀 수 없이 많은 인파가 오가는 도심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미녀가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지슈카?’
지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최근 출연했다는 전설의 궁수.
여론의 예상과 달리 ‘포비아의 후예’가 아닌 ‘궁성’이라는 클래스로 탄생한 그 새로운 전설의 정체가 지슈카임을 지발이 모를 리 없다.
‘궁금하다!’
지발은 전성기 시절의 크라우젤과 경쟁했던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최고의 랭커 중 하나였다.
혜성처럼 등장한 그리드에게 몇 번이나 고배를 마시고 지존의 꿈을 접었다지만 그의 피는 여전히 뜨거웠다.
새로운 전설과의 결투를 체험하고 양분으로 삼아 발전하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샘솟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레벨이 초기화됐을 텐데.’
크라우젤의 경우가 그랬다.
떠올린 지발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인파 속에서도 지슈카를 찾는 건 쉬웠다.
지슈카는 다른 양갓집 규수들처럼 검은 천을 복면삼아 얼굴에 두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니까.
사내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쫓다보니 자연히 그녀의 뒤를 미행할 수 있었다.
‘세간의 평가는 박하다만.’
궁성의 잠재력을 랭커들은 낮게 평가하는 중이다.
역사에 기록 된 포비아의 활약이 다른 전설들보다 훨씬 적기도 했고, 실제로 궁수라는 직업 자체에 명확한 한계점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전투 직업군 플레이어 중 43퍼센트가 궁수라는 직업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궁수는 많은 사람이 플레이하는만큼 타 전투 직업군과 비교해서 너무 많은 약점이 노출됐고 강점이 매우 적은 편에 속했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는 점과 공격력이 높다는 점.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근접전과 방어력이 취약하고 공격 시 딜레이가 발생하는 등 단점이 훨씬 더 많은 직업이었다.
단체전에선 쉽게 활약하는 반면 1대1 전투에선 굉장히 약한 편에 속했다.
물론 지슈카는 예외였지만, 그녀 또한 동급의 다른 직업군 랭커와 싸웠을 때 승률이 낮은 게 현실이었다.
‘과연 어떨지 봐볼까?’
지슈카는 인적이 드문 장소로 이동했다.
성벽 바깥의 대나무 숲까지 나가 허름한 사당 앞에 섰다.
‘퀘스트 중인가....’
사당의 간판에는 궁(弓)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활을 잘 쏘는 신을 모셔놓은 사당이라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지발은 굳이 지슈카를 방해하지 않고 멀리서 숨죽인 채 지켜봤다.
그의 목적은 순수했다.
단지 궁성의 실력을 체험해보고 싶을 뿐이었다.
악의적으로 지슈카를 훼방 놓거나 적대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짤랑.
지슈카가 사당 안에 들어가고 5분쯤 흘렀을까.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위치는 사당의 남쪽.
거리는 약 350미터.
쩌엉!
“....!”
지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소리가 울린 즉시 사당에서 쏘아진 화살이 조금 전 맑은 소리를 퍼뜨렸던 작은 종을 맞춰 떨어뜨린 까닭이었다.
‘저런 속사와 명중률이 가능하다고?’
숲 한가운데다.
종이 있는 위치와 사당 사이 간격에만 해도 수백 그루의 대나무가 빼곡히 서있었다.
한데 사당에서부터 쏘아진 화살은 그 모든 나무의 틈새로 이동해서 350미터 거리에 있는 종을 정확히 쏘아 맞췄다.
종소리가 나고 불과 3초 만에.
소리가 난 즉시 종의 위치를 파악하고 1초가 안 되는 시간 동안 시위를 조준해 활을 쐈다는 소리인데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솜씨였다.
‘저 화살을 지슈카가 쏜 게 맞다면....’
만약 그렇다면 지슈카는 근접전에서도 제약 없는 기량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궁수가 근접전에 취약한 이유는 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활을 조준하기까지 동작과 시간이 소모되기 때문.
날아오는 공격에 대처하는 동시에 반격하기가 사실상 힘들다.
기존까지의 2D, 3D 게임에 등장했던 궁수와 달리 무빙 샷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것이다.
민첩 스탯을 기형적으로 성장시킨 지슈카는 ‘속도’와 ‘회피력’을 이용해 어설프게나마 무빙 샷을 구현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래봤자 평균 두 걸음을 물러나서야 화살을 한 번 쏘는 수준에 그쳤다. 집요하게 접근해서 무기를 휘두르는 상대가 2번 이상 공격할 때 간신히 1번 반격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바뀐 듯했다.
저 정도 반사 신경이면 한 걸음, 두 걸음이 아니라 반 보 뒤로 물리는 순간에 화살을 1~2발씩 쏠 수 있을 것 같았다.
짤랑.
새로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엔 사당의 북쪽.
거리는 400미터다.
쩌엉!
다음은 사당의 동쪽.
거리는 500미터다.
쩌엉!
‘....미쳤군.’
40초.
불과 40초 동안 숲에선 총 7번의 종소리가 울렸고 사당 안의 지슈카는 8개의 종을 모조리 쏘아 맞췄다. 종국에 이르러선 900미터 거리에 있는 종까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화살의 위력이 강해졌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 지발이 사당의 입구를 주시했다.
저벅.
고요 속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사당 안의 지슈카가 곧 모습을 드러낸다는 신호였다.
지발은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 발소리는 속임수였고 소리 없이 쏘아진 3발의 화살이 지발의 어깨와 가슴에 꽂혔다.
“큭....?”
통합랭킹 2위 출신으로 그랜드마스터 밑에서 온갖 퀘스트를 수행해온 지발의 레벨은 380을 넘어섰다.
한데 레벨이 초기화됐을 지슈카의 공격을 허용한 것으로 모자라 적게나마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당황하는 지발의 귓전에 지슈카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사당 밖으로 나온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는 스토커 싫어하는데.”
“몰래 미행한 건 미안하다. 나는 단지....”
“싸워보고 싶은 거지? 나도 그래.”
‘어느새?’
지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늘에서 화살의 비가 떨어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마치 도화지 위에 물감을 뿌리듯, 지슈카는 너무나도 손쉽게 대량의 화살을 쏴 영역을 지배했다.
***
황금 호두의 가치는 매우 높다.
동대륙에서도 왕족들이나 접할 수 있는 진귀한 영약이었다.
황금 호두의 재배지나 원산지는 당연히 고급 정보에 속했다.
보통의 플레이어는 황금 호두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인맥이 있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인맥이.
“씽이라. 다행이군.”
초왕이 친히 내려준 차를 마시며 정보를 얻은 그리드.
그는 지체하지 않고 씽으로 향했다.
씽왕 또한 그리드에게 호의적일 것이므로 그리드의 마음은 무척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