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77화 (1,167/1,794)

템빨 60권 - 12화

그리드는 투구 위에 왕관을 겹쳐 쓰는 게 가능하다.

남들보다 장비 하나를 더 착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템빨왕다운 면모였다. 실상은 <최초의 왕> 칭호 효과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음, 깔끔하군.’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한 그리드가 흡족하게 웃었다.

산양의 뿔이 달린 면갑.

악마를 연상시키는 탈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은빛의 왕관만이 그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법진 위에 나란히 선 그리드와 피아로에게 스틱세이가 신호를 보냈고,

쏴아아아....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의 모습은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동대륙 시작의 도시 판게아.

그리드가 이곳을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땐 군대에게 장악당해 있었다.

하지만 이젠 평범한 도시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주인 잃었던 폐가 중 상당수가 새로운 주민들로 채워졌고 망가진 도로는 정비되어 마차들이 오갔다.

“이곳이 한속봉 공께서 다스렸던 마을이군요.”

피아로가 관심을 보였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낯선 문화에 반감을 품기보다 흥미를 갖고 관찰했다.

“저 곡물은 어떤 맛일까요?”

“....”

결국 논밭 앞에 멈춰 서는 거냐.

라인하르트의 논밭과 비교하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논밭을 시야에 담은 그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곳은 원래 도시였어. 상당히 큰 도시.”

수만 명의 주민이 있었고 4개의 대장간이 있었다. 지금은 템빨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이곳을 활력으로 가꿨었다.

장인들이 만든 도구를 사기 위해 줄 서서 찾아온 외지인들이 얀페이의 호객행위에 넘어가 이단도 입에 풀칠을 했을 정도다.

‘그래도 요즘 이단의 음식은 먹을만 하다던데.’

요리 못하는 요리사의 경지를 넘어서 독극물을 만드는 요리사로 성장(?)했던 이단.

포이즌 마스터라는 악명을 떨치며 템빨국 병사들을 중독 시킨 그는 템빨국에 의외로 큰 도움을 주었다.

이단의 요리를 지속적으로 먹은 템빨국 병사들은 중독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게 되었고 덕분에 오염 된 공간에서도 비교적 쉽게 활동했다.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들을 중독사시켜 ‘인세의 지옥’이라고 불리는 <뱀의 사원>을 템빨국의 말단 경비원들이 초토화시킨 사건은 정말 큰 이슈가 됐었다.

...그때 대량으로 들어온 뱀가죽을 엘리자베스의 공방에 공급했더니 엘리자베스가 기절한 사건도 있었고.

“한데 주둔 병력의 숫자가 매우 적은 듯합니다. 고작 이 정도로 치안이 유지될까 걱정이군요.”

“충분할거야. 초국의 백성들은 모두 주작 신의 가호를 받았거든. 외부인이 이곳에서 함부로 활개 쳤다간 병사들이 나서기도 전에 백성들에게 박살나겠지.”

그리드의 해석은 합리적이었지만 틀렸다.

판게아는 서대륙에서 유입되는 외인들이 반드시 거쳐야하는 지점이다.

초국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거점인 것이다.

이곳에 주둔하는 병력이 적다는 건 사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문제였다.

실제로 판게아의 병력이 줄어든 이유는 왕도 지원군으로 차출 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초왕은 백성들이 불안에 떨지 않게끔 병력 차출의 이유를 거짓으로 속였다. 어떤 축제를 위해서 지원 병력이 필요한 거라고 백성들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그 탓에 판게아의 백성들은 왕도의 변고를 모르고 있었다.

얼굴에 근심과 걱정이 전혀 없고 도시를 재건하고야 말겠다는 열정만을 불태웠으니 그리드도 딱히 상황을 의심하지 못했다.

“확실히.... 체력들이 엄청나군요.”

피아로도 쉬이 납득했다.

전설의 농부인 그가 봤을 때 판게아의 농부들은 매우 뛰어난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대륙 최강을 자부하는 템빨국의 정예 병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저기가 백린목 숲이야.”

그리드가 논밭에서 떠나지 못하는 피아로를 간신히 이끌어 이동했다.

“이 나무도 템빨국에서 재배해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어?”

현재 피아로의 관심은 황금 호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 입장에서 급한 건 황금 호두보다 백린목이었다.

백린목 장작이 필요할 때마다 동대륙을 방문해야한다니.... 솔직히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리드는 아직 황금 호두의 재배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은 백린목에 집중하는 게 맞았다.

“호오....”

눈꽃이 내려앉은 듯이 새하얀 껍질.

백린목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된 피아로가 자세히 살피며 연신 감탄했다.

“마치 제 부인의 마음씨처럼 희고 고운 나무로군요.”

“....”

“이 무슨 견고함이란 말인가.... 외유내강. 마치 제 부인을 보는 듯합니다.”

“....”

“실로 뜨거운 불길을 품었군요. 불의를 목격했을 때의 제 부인이 내지르는 발길질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적당히 해.”

최근 베니야루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드조차 며칠 동안 뛸 듯이 기뻤는데 피아로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부인 사랑이 지극함을 넘어 극성맞아진 피아로에게 그리드가 핀잔을 주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피아로가 헛기침했다.

“험험, 죄송합니다.”

“부부 사이가 좋은 건 기쁜 일이지만 어느 정도 조절은 해야지. 대장군씩이나 되는 양반이 푼수처럼 왜 그래?”

“네....”

피아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병사들이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아이린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그리드의 모습을.

장장 3시간 동안 아이린을 칭찬하는 그리드 탓에 귀에 딱지가 앉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불과 이틀 전에도 그랬고 말이다.

하지만 긴 말해서 뭣하랴.

지엄하신 왕의 말씀에 토를 달 순 없는 법이다.

‘옳으신 말씀이기도 하고.... 앞으론 조심해야겠군.’

너무 들떠 있었던 것 같다.

경각심을 품으며 쭈그려 앉은 피아로가 숲의 토질을 살폈다.

“모래의 입자가 굉장히 굵군요.”

“음...?”

여태까지 그리드는 숲이 아닌 나무만을 봤었다.

그의 목적은 오직 백린목을 채취하는 것에 있었으니 보는 관점이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로의 말을 듣고 흙을 만져본 그리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사토(磨沙土).’

그리드가 공사판에서 일할 때 알게 된 용어다.

군대 연병장에 깔리는 흙이 바로 이 마사토다.

마사토는 외래어이므로 순화해서 굵은 모래라고 부르는 게 옳다.

“화강암이 풍화되어 만들어지는 모래입니다. 보통의 흙보다 물을 덜 흡수하죠. 한데 이 모래가 표면뿐만 아니라 백린목의 뿌리가 있는 지점까지 깊숙이 자리 잡고 있군요.”

“....”

그리드가 별 대꾸가 없자 피아로가 눈치껏 압축시켰다.

“백린목을 재배함에 있어서 수분은 과하지 않은 게 좋다는 뜻입니다.”

“아, 그렇군. 생각해 보면 당연해.”

백린목은 눈처럼 하얗기 때문에 얼핏 차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실상은 매우 뜨거운 열기를 내포하고 있다.

백린목을 패는 순간 발생하는 거대한 폭발의 원인이 바로 그 열기에 있었다.

“표면이 흰 이유는 해풍(海風)에 섞인 염분 때문인가....”

“그건 아닐 거야. 이 나무는 바다가 없는 지역에서도 자라거든.”

“그렇군요....”

피아로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턴 말하는 것도 잊고 백린목과 주변의 환경을 철저히 조사해나갔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수긍하는 등, 의문과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피아로의 모습이 그리드는 든든했다.

피아로라면 이 나무를 서대륙에서 재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역시나.

반나절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연 피아로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마침 몇 개의 묘목이 있으니 챙겨가도록 하지요.”

“잠깐!”

삽과 호미를 꺼내는 피아로의 모습에 기겁한 그리드가 황급히 소리쳤지만 한껏 들뜬 피아로의 행동은 무척 빨랐다.

그리드가 말릴 틈도 없이 어린 백린목 주변의 흙을 파더니 뿌리를 캐냈다.

그리고 폭발은 없었다.

그리드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채취하지 못했던 백린목이 온전한 모습 그대로 피아로에 의해서 세상에 끄집어내졌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 과연 전설의 농부는 대단하다고....”

피아로가 농부로 전직했을 때 느꼈던 허탈감과 슬픔이 이제는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리드는 피아로가 검성이 아닌 농부가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건 무력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이쯤 되면 로드의 배필이 농부여도 좋을 것 같았다.

“곧 태어날 아이도 농부로 키울 거지?”

피아로의 자식은 분명히 뛰어난 재능을 타고날 것이다.

그리드는 피아로의 자식이 로드의 곁을 지켜주길 바랐다.

남자 아이라면 친구로, 여자 아이라면 배필로.

진지하게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빙그레 미소 지은 피아로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니요. 제 아이의 미래는 제 아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놔둘 생각입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술 명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피아로는 당연히 검의 길을 걸었고 검성이 되기를 꿈꿨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농부가 됐다.

그리고 그 선택엔 한 치의 후회조차 없었다.

피아로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깨달았다.

자식의 꿈을 부모가 강요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군....”

그리드가 공감했다.

그 또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 인물이니까.

실제로 그는 로드에게 목표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욕심은 있었다.

“딸이 태어나면 우리 로드하고 혼인시키자.”

그리드는 피아로의 딸을 로드의 배필로 삼고 싶었다. 피아로의 딸에겐 로드를 줘도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한데 의외로 피아로가 거절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

기뻐할 줄 알았던 피아로가 오히려 거부하자 그리드는 당황했다.

피아로는 충신 중의 충신.

단 한 번도 그리드에게 거역한 적이 없다. 심지어 쥬앙데르크를 지키라는 명령까지 수행했을 정도다.

한데 혼담을 거절할 줄이야?

멍해져선 굳어버리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했다.

“벌써부터 수백 명의 애인을 거느리고 다니는 바람둥이에게 제 딸을 맡겨 불행하게 만들었다가는 제가 제 명에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내 자식만큼이나 남에 자식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뭐라고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희망을 주었다.

“아들을 낳겠습니다. 아들을 낳아 왕자님의 둘도 없는 벗으로 키우겠나이다.”

“아.... 응, 그래.”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부디 아들을 낳아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환하게 미소 짓던 그리드가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여태까지의 전개 방식을 고려하면 피아로의 자식이 딸일 확률이 99.9퍼센트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나중 일은 그만 생각하자.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장작 패기에 집중했다. 그동안 피아로는 숲에 있는 백린목 묘목을 전부 채취해 뿌리를 천으로 감쌌다. 묘목은 무려 50그루가 넘었다.

다음 날.

“이제 황금 호두의 재배지를 찾으러 가자.”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한 그리드와 피아로가 판게아를 떠났다.

오래간만에 단 둘이 여행에 나선 두 사람은 과거를 회상했다.

10년도 더 전.

그리드가 막 레이단의 영주로 부임했던 시절에도 두 사람은 함께 여행했었다.

그리드에겐 추억이었고 피아로에겐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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