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0권 - 10화
베인은 이클립스의 부흥을 꿈꿨다.
단지 그 이름만으로 세상을 공포로 물들이고 좌지우지했다는 이클립스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의 첫 번째 노력은 병신 같은 제자들을 포기하지 못했던 전대 란스티어의 등에 비수를 꽂은 것이고, 두 번째 노력은 부족한 재능으로나마 란스티어의 술법을 독학했다는 것이며, 세 번째 노력은 황궁에 잠입해서 황제의 신임을 얻은 것이었다.
베인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모든 순간이 위기였다. 거대한 바위를 등에 짊어진 채 외줄을 타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외줄 아래로 떨어질 뻔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베인은 끝끝내 버텨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기회를 잡았다.
반역자 에단이 쥬앙데르크에게 던진 칼을 첸슬러가 대신 맞고, 이때 폭주를 일으킨 사하란의 검이 쥬앙데르크와 첸슬러를 동시에 휩쓸어버린 순간.
황궁에 잠입한 이후 10여년 만에 최초로 란스티어의 술법을 공개한 베인은 그림자에 스며들며 직감했다.
고난은 끝이다.
쥬앙데르크의 적기를 흡수하여 란스티어의 술법을 완성하리라.
어둠의 왕으로 군림하며 세계를 지배하리라!
위태로운 외줄이 견고한 석교로 거듭남을 느끼며, 지나온 삶에 화룡점정을 찍기 일보직전까지 왔음을 확신한 베인은 벅찬 감동과 희열에 휩싸였다.
에단이 일으킨 혼란에 의지하여 쥬앙데르크의 신변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그는 곧바로 이클립스의 본거지로 달려갔다. 그리고 20년도 더 전부터 준비해온 시설에 쥬앙데르크를 구속하고 적기를 착취했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자신의 몸에 거대한 에너지를 받아들였다.
그러던 중에 전대 란스티어의 망령이 나타난 것이다.
안 그래도 불완전한 란스티어의 술법을 독학하여 기술에 허점이 많은 자신과 달리 놈의 기술은 체계적이고 빈틈이 적었다. 놈 또한 당연히 상위 술법은 쓰지 못했지만 파괴적인 체술과 현란한 그림자술의 조화가 마치 전대 란스티어의 솜씨를 연상시켰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카심의 제자다.”
“....!”
이럴 수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업보에 발목을 붙잡히다니.
차라리 힘들었던 순간에.
그러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이놈과 조우했다면 차라리 덜 억울했을 텐데!
“놈을...! 놈을 반드시 찾아내 죽였어야 했는데!!”
제자들의 목표가 분명하고 끈기가 진득하니, 비록 재능은 부족할지언정 각자의 분야에서만큼은 극의에 이를 거라던 전대 란스티어의 주장이 떠오른다.
두 제자를 모두 란스티어로 추대하고 협력하게 만들면 25대 란스티어보다 강력하고 빈틈이 없는 란스티어가 탄생할 거라던 전대 란스티어의 개소리가 자꾸만 귓전에 맴돈다.
안 돼, 이제 와서 놈의 말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나는 이미 놈을 부정했었고 그렇기에 배신했었다.
촤르르르르륵!!
포효하며 옛 기억들을 떨쳐낸 베인이 그림자를 빙판 삼아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그의 의도는 페이커의 후위를 점령하는 것에 있었지만 페이커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베인이 타고 있는 그림자를 통제하여 가시밭길로 만들었으니 흠칫 놀란 베인은 도약하여 그림자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다른 그림자로 숨어들어 암습을 준비하는 그의 전신을 수십 개의 그림자 비수가 난도질했다. 그가 숨어든 그림자 자체가 수십 개의 칼날로 변한 여파였다.
‘이놈....!’
그림자에 행사하는 지배권이 나를 아득히 웃돈다.
이미 내가 지배하고 있는 그림자를 빼앗길 정도니 싸움이 성립되질 않는다.
더군다나 빠르다.
그림자를 통제하는 속도가 나보다 2배 가까이 빠르다.
대신 신체 능력은 내 쪽이 2배 이상 높았지만....
콰작!!
“큭!”
체술의 수준이 다르다.
배 이상 빠르게, 배 이상 강하게 발차기를 날려봤자 상대방이 부드럽게 회피하고 반격을 도모하였으므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벽.
전대 란스티어를 기습하는데 성공하고도 목숨을 빼앗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을 때 느꼈던 거대한 벽을, 베인은 이 순간 페이커를 통해서 엿보게 되었다.
베인이 란스티어의 술법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했을 벽이다.
만약 그가 란스티어의 술법을 사용하지 않고 본인 고유의 기술로 승부를 노렸다면 적기를 흡수하는 과정에 많은 체력이 소모된 상태라고 하나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베인은 잘못 판단했다.
자신의 기술 따위보단 불완전하나마 란스티어의 술법을 쓰는 편이 훨씬 더 강한 실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사실이기도 했다.
다만 상대방이 란스티어의 술법에 정통했다는 게 문제다.
“이제 와서 포기할 것 같으냐!!”
쿠오오오!
베인의 몸 위로 붉은 오라가 피어올랐다.
아직 완전히 체화하지 못한 쥬앙데르크의 적기를 무리해서 끄집어낸 것이다.
주변의 그림자가 핏빛으로 물들었고 베인의 그림자 통제 속도는 전보다 2배 가까이 빨라졌다. 지배권도 올라 더 이상 페이커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빼앗기지 않았다.
쩌정!
쩌저저저저저저정!!
흐름을 읽을 수 없는 전투가 시작했다.
깊은 동굴의 복잡한 지형이 만들어낸 수천 개의 크고 작은 그림자에서 베인과 페이커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불똥이 튀었다.
“....”
“....”
철이 들기 전부터 베인에게 납치당해 세뇌당하고 감정을 거세당한 이클립스의 어쌔신들이 표정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도 태연했던 그들이 수십 년 만에 혼란을 느꼈다.
란스티어가 즉 주인이라고 세뇌 당해온 그들의 눈앞엔 지금 두 명의 주인이 있었으니까.
그렇다.
이클립스의 어쌔신들은 베인과 페이커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란스티어의 술법을 근거로 베인을 주인으로 인식해왔던 그들의 사고가 혼선으로 꼬였다.
그 탓에 베인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쿨럭!”
“큭....”
수십 회?
아니, 어쩌면 벌써 수백 회일까.
몇 분 동안 쉬지 않고 그림자를 넘나들던 베인과 페이커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저항 불가의 저주를 지닌 ‘란스티어의 독’에 서로가 중독된 까닭이었다.
수백 차례의 공방을 나눈 결과 그들의 몸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고 피부는 검게 질려있었다.
이제부턴 속도전이다.
눈앞의 적을 빠르게 쓰러뜨려야만 해독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림자 병사여.”
촤르르르르륵!!
페이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수천 개의 그림자를 동시에 지배하여 창 세운 병사로 일으켰다.
병사들은 페이커의 방벽이 되어주는 동시에 베인에게 창을 겨눴다.
아직 베인은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아니, 도달할 수가 없는 경지였다.
한 번에 대량의 그림자를 지배하여 병사로 일으키는 이 술법은 카심이 란스티어의 술법을 재해석해서 만든 카심 고유의 기술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베인에겐 적기가 있었다.
적기는 물질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
페이커가 일으킨 수천 명의 그림자 병사 중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림자 병사여! 쿨럭!”
본래 타인의 힘이었다.
아직 완전히 체화하지 못한 적기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베인이 내상을 입고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에서 검은 피를 쏟아냈다. 당장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의 몸 상태와 달리 전장의 상황은 그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붉은 그림자 병사들이 페이커의 그림자 병사들을 기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푹푹!
푹푹푹!!
그림자 병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창을 꽂았다.
아군 진형 곳곳에서 나타난 붉은 그림자 병사들에게 먼저 습격을 당한 검은 그림자 병사들이 빠르게 쓰러져갔다.
스륵.
어지럽게 얽히는 전장에서 베인과 페이커의 모습이 사라졌다.
고요한 걸음으로 그림자 병사들을 넘나든 끝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의 신형이 상공에서 맞부딪친다.
“우오오오오!!”
베인의 기합이 크게 메아리쳤다.
주변의 그림자를 주먹 끝에 모아 그대로 내지르는 그의 체술은 전대 란스티어조차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에 올라있었다.
적기를 등에 업은 그는 벌써 몇 번이나 한계를 초월하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깔끔하게 뻗어나가는 팔의 감각을 느낀 베인이 확신했다.
‘내가 이겼다!’
이놈을 쓰러뜨리는 순간 전대 란스티어를 넘어선다.
거대한 위업이 나의 격을 초월시키리라.
씨익.
희미하게 미소 짓는 베인의 시야를,
“탐(貪).”
한 점으로 모인 그림자가 집어삼켰다.
그림자 술법과 다루카의 술법, 거기에 란스티어의 술법까지 착안해서 창조한 카심의 궁극기.
주변의 모든 사물을 집어삼키는 그것은 이론상 최강의 물리력을 행사하는 스킬이었다.
꽈득!
꽈드드득!!
“끅....? 끄아아아아아악!!”
머리부터 발끝까지.
베인의 신체 전부가 검은 점에 집어삼켜진다.
거역할 수 없는 압력이 그의 몸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리며 탐욕스럽게 먹어치웠다.
“킥! 키캬캬캬악학!!”
꽈드득! 꽈득!!
끔찍하고 기괴한 소음과 비명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진다.
전장을 지배하기 직전까지 갔던 붉은 그림자 병사들이 일제히 멈춰 서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허억.... 허억.....”
페이커의 탐은 카심의 탐과 비교해서 수준이 매우 낮다.
생명력이 15퍼센트 이하까지 떨어진 대상에게만 작용했다.
란스티어의 독이 퍼센트 데미지를 입히는 도트 스킬이 아니라 고정 데미지를 입히는 도트 스킬이었다면 베인을 상대로 탐을 쓸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커는 결국 승리했다.
애초에 란스티어의 독을 믿고 베인과의 싸움에서 승산을 점쳤던 거기도 했다.
결국 철저한 계산 끝에 거머쥔 승리라는 뜻이다.
[전설의 어쌔신 란스티어로 전직합니다.]
[레벨이 1로 초기화 됩니다.]
본래라면 기쁘게 받아들였어야할 알림창이 떠오른다.
타이밍이 나쁘다.
“....”
“....”
무력해진 페이커의 주변을 수백 명의 어쌔신들이 포위했다.
이클립스 소속의 어쌔신들.
지난 수십 년 동안 베인이 직접 키운 인형들이다.
무감정한 눈빛으로 페이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들이 한 걸음, 두 걸음 더 페이커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서슬 퍼런 단도를 뽑아 쥐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손등을 긋고 피를 뿌려 페이커의 그림자를 적셨다.
“새로운 란스티어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
“....”
베인과의 일전을 회상하던 페이커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동대륙으로 떠나기에 앞서 가족과 시간을 나누고 있는 그리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은 그가 어둠 속 어쌔신들에게 명했다.
“오늘부로 이클립스는 템빨그림자단의 산하에 들어간다.”
“충.”
천 년의 세월 동안 존재했던 암살집단.
역사상 최강의 조직이 템빨국에 완전히 흡수됐다.
이클립스라는 불길한 이름을 버리고 템빨그림자단이라는 찬란한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왜... 어째서....”
라우엘은 슬피 울었지만 페이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젠 템빨이라는 이름이 그의 자부심이었고 긍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