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0권 - 08화
[불사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30,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그리드한테 들었던 거하곤 다르네.”
전 체다카 길드원들이 으레 그렇듯, 지슈카 또한 그리드의 전직담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온갖 고난 끝에 북쪽 끝의 동굴에 도달해서 파그마의 기서를 손에 넣기까지....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인 그리드의 전직담은 체다카 길드원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것이었고, 당시 이야기를 자꾸만 듣고 싶어 하는 동료들에게 그리드는 몇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해주곤 했었다.
“그리드는 전직 직후엔 불사 효과를 못 누렸다고 했는데.”
지슈카는 달랐다.
궁성으로 전직한 그녀는 처음부터 불사 효과를 누렸다. 덕분에 아그너스의 일격을 견디고 반격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결과는 패배였지만 말이다.
아그너스는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강했다.
단신으로 초국 왕도의 군대를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은 것으로 모자라서 <날아오르라!>를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몇 수나 위야. 기습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어도 이런 천운을 누리지 못했겠지.’
데스나이트를 전부 소모한 아그너스가 망자의 군단을 다시 일으킨 타이밍을 노린 게 유효했다.
초국의 백성들과 병사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처음부터 나서서 당신들을 돕기에는 내 실력이 역부족이었어. 미안해.’
처음부터 전선에 합류했다면 개죽음을 당했을 공산이 크다.
데스나이트와 리치의 집중 포화를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란스티어와 만나는 상황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런 괴물이 우리와 같은 플레이어라니....’
지슈카는 20억 플레이어를 대표하는 실력자 중 한 사람이다. 종합 전투력이 열 손가락 안엔 꼽힐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슈카조차도 아그너스의 소환수 중 하나에 불과한 란스티어에게 벽을 느꼈다. 만약 아그너스가 마법을 난사하지만 않았어도 지슈카는 란스티어에게 패배했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아그너스에게는 리치 무무드와 몇 기의 데스나이트가 더 있었다.
정체불명의 마법사 소년도 합류한 눈치였고.
아그너스 혼자서 수십 명의 하이랭커를 도륙할 수 있다는 게 지슈카의 판단이었다.
‘거의 그리드급....’
물론 이거 하나만큼은 단언 할 수 있다.
아그너스는 그리드보단 약하다.
놈의 언데드 군단은 그리드의 아이템 군단을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2년, 3년 후에도 이 구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면 글쎄.... 아그너스의 잠재력이 너무 높다.
현재 아그너스는 직업 특성을 별로 개화하지도 못한 눈치였으니까. 그리드와 비교해서 사용하는 스킬의 개수부터 적은 게 증거다.
‘뭐, 지가 아무리 세져봤자.’
그리드의 곁에는 내가 있다.
이 ‘궁성 지슈카’ 님께서 그리드를 지켜줄 것이다.
....라고 다짐하며 의욕을 불태우는 지슈카의 현재 레벨은 1이다.
그리드와 달리 전직 직후부터 불사 혜택을 누리긴 했지만 레벨이 초기화된 것은 그리드와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전직 직후 그리드는 계속되는 레벨 다운을 겪었다고 들었지만,
[히든 퀘스트 ★탄생의 증명(1)★이 진행됩니다.]
지슈카는 도리어 레벨을 복구할 기회를 얻었다.
탄생의 증명은 총 6단계까지 진행되는 연계 퀘스트였고 1단계를 클리어할 때마다 잃었던 레벨이 수십 개씩 복구되는 형태였다. 6단계까지 전부 완료할 경우 최소 350레벨까진 복구할 것 같았다.
타인의 기술을 계승하여 전설이 된 그리드와 달리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전설이 됐기 때문에 얻은 혜택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크라우젤의 레벨 복구 속도도 느린 편이었다.
‘유저들의 평균 레벨이 오른 만큼 조치가 취해진 건가?’
최상위 랭커들은 400레벨을 목표로 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1레벨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하라는 건 사실상 게임을 접으라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반면 그리드가 전직하고 레벨이 초기화됐던 시점의 랭커들은 200레벨대에 불과했고 크라우젤의 레벨이 초기화됐던 시점의 랭커들은 300중반 레벨을 노리는 시점이었다.
레벨이 초기화 되도 충분히 따라잡을 여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 300후반 레벨대의 경험치 보유량은 차원이 다르다. 특히 380레벨 이후부터 지옥이었다.
심지어 지슈카는 레벨을 380 이상까지 찍었던 인물이다.
그녀에게 다시 1레벨부터 시작하라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어쩌면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전직 타이밍이 S.A그룹의 예측보다 빨랐던 걸 수도....’
과연 대단한 사람들이다.
내 목표가 될 자격이 있다.
그리고 난 머잖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피식,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린 지슈카가 <천리안>을 활성화시켰다.
매의 눈의 진화 버전 스킬이다.
마치 인공위성처럼 변한 지슈카의 시야가 카라스 전역을 한 눈에 담았다.
카라스의 모든 지형지물과 상황이 지슈카에게 소상히 전달됐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네.’
전혀 새로운 형태의 시야는 천하의 지슈카에게도 약간의 긴장감을 심어주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그녀가 약 3킬로미터 전방에 있는 궁전을 주시했다.
초국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는 아그너스의 모습이 보였다. 언데드화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일보직전 같았다.
기회를 놓칠 지슈카가 아니다.
끼긱.
주작궁의 시위를 당긴다.
그러자 여태까진 없던 락온 시스템이 활성화됐다.
정조준 후 조준이 흐트러져도 시스템이 대신 정조준을 유지시켰다.
‘미쳤는데?’
표적을 조준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급격히 감소된다.
파앙-!
활을 쏘는 속도가 빨라진다.
푸욱-!!
궁성의 화살은 총알보다 빨랐고 미사일만큼 정밀했다.
단.
[대상에게 13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 나.”
전설 클래스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었다.
고작 1레벨 지슈카의 공격력으로는 300중반 레벨을 가뿐히 넘기는 아그너스에게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그래도 지슈카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초국 병사들의 창에 꿰뚫린 아그너스가 잿빛으로 산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슈카는 녀석의 죽음에 분명하게 일조했다.
조금 전 당한 죽음을 바로 갚아준 셈이니 속이 다 후련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
‘저 녀석 성격상 또 다시 쳐들어올 거 같은데.’
아그너스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왕궁을 습격했을 리 없다.
그리고 놈은 한 번 문 사냥감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놈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아그너스라도 수천의 병력을 다시 모으려면 최소 열흘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냥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게 아닌 이상 데스나이트 몇 기만 믿고 쳐들어오진 못할 것이다.
‘그때까지 최대한 레벨을 복구하고 파마의 화살을 구해와야겠어.’
계획하는 지슈카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존을 꿈꿔온 그녀의 입장에서 다른 경쟁자와의 충돌은 즐거운 일이다.
상대방을 박살 낼 기회이니까.
***
“완성 됐어. 어때? 마음에 들어?”
“....네, 당연히 마음에 들죠. 가보로 삼고 싶을 지경이네요.”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또 찾아와. 네겐 항상 고맙다.”
“저야말로 항상 감사드리죠....”
그리드의 신작 방패와 갑옷을 품에 안은 데미안.
평소 같으면 날 듯이 기뻐했을 그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대장간을 떠났다.
마냥 기뻐하기엔 마음의 짐이 너무 컸다.
설마 검 한 자루에게 패배할 줄이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는 데미안과 달리 그를 배웅하는 그리드의 표정은 방긋방긋 해맑았다.
‘상상 이상이군.’
염룡검의 위력은 굉장했다.
혼자서 판단하고 행동하며 용언을 읊고 브레스를 쏘는 녀석의 강함은 어지간한 랭커를 초월했다.
염룡검의 구조상 그리드가 아닌 플레이어는 염룡검과 싸워서 이기는 게 불가능했다.
우선 내구력이 무한이라는 점이 첫 번째 무기였다.
플레이어에게는 생명력과 스태미나라는 한계가 있는 반면 염룡검에겐 한계가 없었다. 지치지도 않고, 망가지지도 않고 계속해서 상대방을 몰아붙였으니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었다.
별도로 합산되는 스탯이 없어 부족한 공격력은 브레스의 고정 데미지가 메워주고도 남았고 대상을 무력화시키는 거짓 용언의 효과야 두말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하지만 염룡검의 가장 큰 강점은 ‘오직 그리드만을 주인으로 허락한다는 점’에 있었다.
염룡검과 소모전을 계속해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데미안은 염룡검의 제압을 노렸고, 급기야 염룡검의 손잡이를 거머쥐는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통구이가 됐지.’
결과적으로 염룡검과 싸우는 대상은 염룡검을 이길 수단이 없다.
마법적인 힘으로 구속하거나 도망쳐서 무승부를 만드는 건 가능했지만 승리를 쟁취하기란 불가능했다.
탈수에 이어서 염룡검까지....
그리드는 정말이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13위 대악마 벨레드와 다시 싸워도 어느 정도 동수를 이룰 자신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시간을 확인한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궁성의 탄생을 알리는 월드 메시지가 떠오르고 벌써 이틀이 지났건만 지슈카가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쯤 궁성의 위력을 보여줄 거냐고 물어봐도 ‘조만간’이라는 짤막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솔직히 그리드는 많이 서운했다.
전설이 되자마자 달려와서 축하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1레벨부터 다시 시작하느라고 엄청 힘들 텐데.’
지슈카는 호감 가는 이성이기 이전에 친구였고 동료였으며 템빨국의 가장 큰 전력 중 하나였다.
그리드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몇 달이고 쩔을 해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워낙 강한 지슈카는 역시나 혼자서 레벨을 복구할 계획 같았다.
‘쯧, 의지 좀 해줄 것이지.’
내가 힘들 땐 많은 도움을 줘놓고, 정작 본인이 힘들 때 도움 받는 건 왜 신세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한숨 쉰 그리드가 궁전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백린목을 보충하기 위해 동대륙으로 떠나려다가 굳어 섰다.
“허억, 허억.... 그리드.”
“....페이커?”
템빨국을 보위하는 그림자.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살신 페이커가 상처투성이가 된 몰골로 나타나 그리드의 곁에 쓰러졌다.
“페이커! 야!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란 그리드가 페이커를 부축하다가 흠칫 놀랐다.
이건 죽는다.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독이 페이커의 전신에 퍼져있었다.
“황....”
“잠깐! 말하지 마! 금방 루비를 불러올....”
“황제....”
“페이커!”
“황제가.....”
툭.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페이커의 손이 차디찬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진다.
페이커를 끌어안은 그리드가 절규했다.
“페이커어어어어어!!”
쏴아아아아....
페이커의 시신이 잿빛으로 산화했다.
그리고 2초 뒤.
“황제가 살아있다.”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부활한 페이커가 그리드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무안해서 험험, 헛기침한 그리드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는 거야? 바사라 황제는 원래 멀쩡히 살아 있잖아?”
“쥬앙데르크 말이다. 이클립스가 그자를 확보하고 있다. 낌새가 좋지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