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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69화 (1,159/1,794)

템빨 60권 - 04화

“오늘도 먼저 식사 중인 거야? 미안, 내가 조금 더 일찍 일어났어야했는데.”

활짝 웃는 얼굴과 나긋한 말투.

봄볕보다 따사로운 저 눈빛의 주인이 아그너스라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광견이라는 별명이 그에겐 다소 가혹한 잣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무슨.’

아그너스의 상냥한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하던 의원 헤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자(死者)를 연인처럼 대하는 인간이 정상일 리 없잖은가.

역시 저 인간은 소문처럼 미친 게 분명하다.

“....오늘 밤에도 사람들을 괴롭힐 건가요?”

어느덧 한 달.

의원 헤라는 포로의 신세로 아그너스에게 붙잡혀 있었다.

물론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다.

그녀는 플레이어이며, 플레이어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건 국가 단위의 법규와 특정 NPC들의 권능뿐이니까.

하지만 헤라는 아그너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처음 한 주는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었고, 이후로 지금까지는 흥미가 동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어쩌다가 저 썩어가는 인형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악취가 진동하는 식당에서, 아름다운 드레스로 썩어가는 피부를 감춘 인형의 뺨에 입을 맞추던 아그너스가 힐끔, 헤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햇살을 품은 듯했던 금안이 수은처럼 차갑게 식는다.

“당연한 걸 묻는군. 이 땅 위에 산 자가 우리 셋이 될 때까지, 밤의 행군은 멈추지 않아.”

“셋.... 당신하고 나, 그리고 또 누구요?”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인형과, 그늘 뒤에 숨어 보석을 세공 중인 리치의 모습을 번갈아 본 헤라가 용기를 내 질문했다.

아그너스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농담하는 거냐?”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의 손이 인형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음을 확인한 헤라는 이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나 카를린’이라는 이름을 머리 위에 달고 있는 저 시신을, 아그너스는 살아있다고 믿는다.

땡강!

아까부터 위태롭게 보이던 포크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루나 카를린의 손에 쥐어져 있던 포크다.

그녀의 앞에 놓인 접시엔 손대지 않은 음식이 담겨있다.

하지만 아그너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다 먹었구나. 이만 치울게.”

와르르.

남은 음식물을 식기와 함께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아그너스가 리치 파울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파울드의 외관이야말로 산 자와 별 차이가 없었다.

피부가 이상하리마치 하얗게 식어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숨을 쉬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는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완성 됐나?”

“그래.”

파울드가 지난 일주일 동안 공들여 만든 반지를 아그너스에게 건네주었다.

부조리의 반지.

모든 자원 소모량을 절반이나 감소시키는 파울드의 역작이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해 더욱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아그너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오늘 밤은 더 많이 부릴 수 있겠군.”

밤은 반드시 찾아온다.

이 땅을 적시고 있는 성스러운 불길을 사그라뜨리는 차가운 밤.

그때가 도래하면 망자들이 기어 나와 산 자들을 해칠 것이다.

그리고 매일 하루가 지날 때마다 산 자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고 망자들의 숫자는 늘어날 테지.

차갑게 웃은 아그너스가 멀리 보이는 궁궐을 노려보았다.

“그러게 순순히 내놨어야지.”

***

열기를 이불 삼아 철을 어루만지는 족속이 바로 대장장이이다.

대장장이는 결코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도껏이어야지....

쿠오오오오오!!

“으읏....!”

그리드가 풀무질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붉게 물든 용광로가 대장간을 진탕시켰다.

레이단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질색하며 뒷걸음치는 대장장이들의 몸이 곧바로 땀에 흥건히 젖는다.

누군가는 곧바로 옷을 벗어던졌다.

열기를 견디지 못한 옷이 불타오를까봐 염려한 것이다.

그만큼 뜨거운 열기였다.

“이....건.”

대장장이 랭킹 1위.

장인 판미르조차 견디지 못하고 점점 뒤로 물러섰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간 안에서 숨 쉬는 자유조차 빼앗긴 그는 다른 대장장이들처럼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견뎌내며 눈에 담았다.

최고의 대장장이가 일으킨 최고의 불꽃을, 자신의 눈동자와 뇌리에 각인시켰다.

앞으로 그의 삶의 목표는 이 순간의 재현이리라.

“쿨럭, 쿨럭....!”

급기야 견디지 못한 판미르마저 대장간을 떠났고,

“후욱.... 후욱....”

그리드의 풀무질은 더욱 더 가속했다.

그의 앞에 우뚝 선 용광로는 이제 완연한 주황빛으로 물들어 녹아내리기 직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풀무질을 멈추지 않았다. 빠르되 규칙적으로, 마치 검무를 출 때처럼 가벼운 동작을 연계하여 풀무를 밟아나갔다.

용광로 속 화석은 여전히 처음 모습 그대로다.

200년 동안 염룡의 숨결을 견뎌온 자신을 고작 이 정도 불길로 지배하려는 거냐고 비웃는 듯했다.

주륵.

주르륵.

용광로의 표면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용광로 속 화석은 여전히 멀쩡했다.

시뻘건 화염 너머 녀석의 작태가 고고하다.

그리드에게 어서 절망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리드의 입 꼬리는 도리어 올라갔다.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

와르르!

그리드의 인벤토리 속에는 아직도 꽤 많은 백린목이 남아있다.

최소 300개 이상의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물량이다.

그 수백 개의 장작을, 그리드는 모조리 화로에 쏟아 부었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후환을 생각하지 않고 이 순간에 집중했다.

그래야만 저놈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에서였다.

전설의 대장장이. 아니, 신과 대적했던 대장장이기에 가능한 계산이다.

콰르르르르릉!!

전보다 비할 수 없이 뜨거운 열기가 치솟는다.

전설의 대장장이라는 이유로 견딜 수 있는 영역의 열기가 아니었다.

그리드가 화공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주작의 가호가 그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면.

이 대장간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단 1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쾅! 쿠콰콰콰콰콰쾅!!

용광로가 폭발했다.

초고온의 열기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해봤자 결국 인류의 작품에 불과한 것이다.

신들이 뿌린 씨앗에서 자라난 백린목의 진정한 열기를 인류의 작품 따위가 견딜 리 만무하다.

콰르르르르르륵!!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해일처럼 밀려나와 그리드를 덮쳤고 대장간 전체를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대장간이 폭발했다.

라인하르트 대장간 지구에서도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수백 석의 용광로를 수용해온 초대형 대장간이 허무하리마치 쉽게 잿더미로 변해 흩어졌다.

“으아악!!”

“이, 이럴 수가....!”

판미르의 말을 듣길 천만다행이다.

대로 건너편까지 물러나 대장간을 지켜보던 대장장이들은 다행히 큰 상처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신적으로 입은 충격은 감당히 불가능할 정도로 컸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큰 불꽃을 일으켰기에 대장간이 폭발한단 말인가?

삐익! 삐익!!

도시 곳곳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넋을 잃은 대장장이들의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보다 한 발 빨리 도착한 치안대는 폭발의 현장에 진입하려다가 말고 멈춰 섰다.

여기사 로이먼의 명령 때문이었다.

“대기하도록.”

“.....”

일대가 숨을 죽인 듯이 고요해졌고,

쏴아아아아....

폭발과 함께 불길에 집어삼켜졌던 대장간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뼈대밖에 남지 않은 건물.

새카맣게 타들어간 그 폐허의 한가운데에 그리드가 서있었다.

주륵. 주르륵.

용광로였던 것에서부터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주황빛의 고체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틀.

보자기를 거두며 힘겨운 걸음을 옮긴 그리드가 모루를 꺼내 고체를 받아냈다.

모양을 잡는 틀 따위, 그는 사용하지 않는다.

까앙!!

고요 속에 망치질이 시작된다.

단조와 담금질이 반복된다.

콰르륵!!

충격을 받을 때마다 사나운 불길을 토해내며 그리드의 얼굴을 덮치던 고체가 차츰 형태를 갖춰나갔다.

그것의 정체가 ‘검’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지켜보던 사람들은 몇 시간이 지나서야 눈치 채고 말았다.

그만큼 고되고 오랜 작업이었다.

까앙! 까앙! 까앙!!

느리지만 확실하게, 형태가 완전해져간다.

치이익!!

몇 차례나 담금질해도 시뻘겋게 번뜩이던 칼날이 차츰 검게 식어간다.

까아! 까앙! 까앙!!

불길이 잠잠해진다.

드디어 그리드의 손길을 받아들인 화석은, 이제 완연한 칼날로 변모하여 날카롭게 연마되기 시작했다.

“우.... 우와아....”

“저게 우리와 같은 인간의 작품이라니....”

연마 끝에 빛을 되찾은 칼날이 유리처럼 투명하다.

단조 과정에서 생겨난 물결 모양의 자국이 희미하게 보여 칼날을 한층 아름답게 가꾼다.

“....꿀꺽.”

거리의 대장장이들은 직감했다.

저 아름다운 칼날을 자신의 손으로 빚어내는 순간을 매일 밤마다 꿈꿀 것이며,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임을 아침마다 깨닫고 절망할 것임을.

감탄 후 다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찌링.

그리드가 손가락으로 칼날을 퉁기자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으로 살면서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청아한 울림이었다.

대장장이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전율하기 시작했다.

거리에 모인 수천, 수만 명의 사람 모두가 그리드가 막 만들어낸 작품의 가치를 감히 추측하지 못했다.

그리드의 귓전엔 낯선 음성이 스며들고 있었다.

앞으로 자주 듣게 될, 새로운 신검의 목소리였다.

-염룡에게도 굴복치 않았던 나를 굴복시킨 인간이여. 그대가 멸한 후에도 나의 주인은 오직 그대뿐이리.

[<염룡검>의 제작을 완료하였습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하고 대륙 전역 명성이 1,000 오릅니다.]

“....!”

“....!”

“....!”

대장장이들도, 치안대의 병사들과 기사들도, 그리고 평범한 백성들까지도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드가 방금 막 제작한 아름다운 검이 스스로 떠올라 그리드의 곁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덥썩.

검을 쥔 그리드가 저 높은 하늘을 향해서 휘둘러보았다.

염룡검을 환영하는 인사였다.

서걱.

가벼운 검격이 허공을 벤다.

염룡검의 투명한 검신이 붉게 물들었고, 붉은 검광이 잔광으로 남았다.

콰르륵!

잔광에 불이 붙었다.

이어서 거대하고 흉포한 불꽃으로 변모하더니 하늘을 향해서 승천했다.

콰르르르르릉!!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

붉게 물든 하늘을 등진 그리드가 염룡검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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