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0권 - 03화
“괜찮아요?”
“그까짓 거 물약 좀 마시면 바로 낫지.”
걱정스럽게 묻는 그리드에게 극검이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그 환한 미소가 그리드의 얼굴을 도리어 더 어둡게 만들었다.
죽어도 부활하는 마당에 어지간한 상처쯤이야 쉽게 회복 한다지만 고통은 느낀다.
비록 한도가 정해진 고통에 불과하다지만, 기꺼이 받아들일 수준은 아니다.
20억 플레이어 중 상당수가 비전투직업군을 선호하거나 궁수, 마법사 등의 후위를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부턴 무리하지 마쇼.”
그리드가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감춰질 리 없다.
극검은 그리드의 1호 팬을 자처하는 만큼 그리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거참. 지는 맨날 모가지 날아가면서 다른 사람 손 부러진 정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는.”
“한 달에 한 번 죽을까 말까인데 무슨 맨날 모가지가 날아갑니까? 그리고 죽으면 안 아픈데 골절은 아프잖아요.”
“한 달이든, 매일이든 너 정도 되는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가 문제.... 알았다, 알았어. 잘 알아 들었으니까 표정 풀어. 갓리드 님은 걱정 그만 해.”
결국 항복하는 극검에게 피식 웃어준 그리드가 손에서 반짝이는 화석을 바라보았다.
<염룡의 숨결이 깃든 화석>
등급:신화
2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염룡 트라우카의 숨결을 받아 탄생한 광물입니다.
어느 이름 모를 광부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완전하게 채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무게:10
“드래곤의 숨결은 때때로 물질의 성질을 바꾼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질이 성질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소멸하게 마련인데 이 녀석은 용케 버텨냈군.”
그 큰 레어에 어째서 단 하나의 화석만이 자라났던 것인가.
이유를 설명한 브라함이 화석을 톡톡 두드린다.
마치 기특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천하의 브라함이 보기에도 신화 등급 광물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과연 어떤 검이 탄생할까?’
화석의 아쉬운 부분은 ‘철’이 아닌 ‘돌’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이 무슨 석기시대도 아니고 돌로 만든 장비의 가치는 낮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드는 전설의 대장장이다. 재료를 탓하지 않았다. 길바닥의 짱돌도 강철처럼 날카롭게 벼르는 게 바로 그의 실력이다.
하물며 태초부터 존재해온 염룡의 숨결이 빚어낸 화석이라면....
“며칠 동안 작업에 집중할게요.”
언제든지 탈리마를 왕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 그리드에겐 근심 따위 없었다.
대장간을 향해 거침없이 직진하는 그리드를 극검이 응원했다.
***
‘전에 왔을 때하곤 완전히 다르잖아?’
오래간만에 동대륙을 방문한 지슈카의 감상이었다.
한동안 서쪽 외인들을 경계하며 근심걱정에 시달렸던 초국의 백성들이 이제는 활력이 넘쳤다. 어딜 가나 플레이어들을 살갑게 대하며 환영해 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드의 힘인가 싶었다.
‘내가 레벨 몇 개 올리려고 발악하는 동안 그리드 너는 세상을 바꿔놨네.’
과연 대단한 사람이다.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흐뭇하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한 지슈카는 단 이틀 만에 초국의 왕도에 도착했다.
‘하루만 쉬었다가 출발하자.’
아직 갈 길이 멀다.
지슈카의 목적지는 씽의 포관.
그곳의 신사에서 <파사(破邪)의 화살>을 구하는 게 그녀가 진행 중인 퀘스트의 내용이다.
‘굳이 그딴 걸 얻어야할 이유는 모르겠지만.’
파사의 화살은 이름 그대로 부정한 존재를 멸하는 화살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언데드나 유령, 악마 등의 존재에게 추가 데미지를 입히는 화살인 것이다.
지슈카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서대륙에는 언데드와 악마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미스릴 화살이 이미 대중화된 상태였으니까.
‘물론 파사의 화살이 미스릴 화살보다 상위 개념이겠지.’
신성이 깃든 화살이라고 들었다.
파사의 화살이 미스릴 화살보다 당연히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슈카가 사용하는 미스릴 화살보다 더 좋을까?
지슈카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다.
왜냐면 그녀가 사용 중인 미스릴 화살은 아니, 그녀가 사용하는 모든 화살은 그리드가 만들어준 그리드제 화살이니까.
이미 보통의 미스릴 화살보다 3배 이상 강력한 미스릴 화살을 소지하고 있는 지슈카의 입장에서 파사의 화살에 매력을 느낀다는 건 불가능했다.
한데 고작 그런 걸 얻겠답시고 며칠이나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기분이 영 별로다.
전직 퀘스트만 아니었으면 진즉 관뒀으리라.
“....흐음.”
10층짜리 누각.
왕도 카라스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풍등객잔에 입장한 지슈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미 거리에서부터 이질감을 느껴온 그녀다.
카라스의 백성들은 표정이 하나 같이 어두웠다. 마치 어떤 재난이라도 겪은 눈치였다.
‘왜 유독 왕도의 분위기만 어두운 거지?’
초국의 다른 지역들은 모두 분위기가 밝았다.
하지만 정작 가장 부유한 왕도의 백성들이 이런 꼴이라니 의아하다.
경계심을 품은 지슈카가 점소이를 불렀다.
“메뉴판. 앗.”
초국은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굳이 동양의 색채가 짙은 객잔을 방문해 놓고 영어를 말해도 되는 걸까....
지슈카가 순간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네이. 차림표 대령했습니다요.”
“점소이가 되려면 영어는 기본인 건가....”
“네?”
“아니, 혼잣말이야.”
15살쯤 되려나.
소년 점소이에게 빙그레 웃어준 지슈카가 팁으로 은전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지슈카의 미모를 보고 눈 호강을 하고 있던 점소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녀를 상전처럼 모셨다.
곧 음식을 내오는 점소이에게 지슈카가 질문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편치 않은데.”
“아, 그게 말이죠.....”
미모와 팁의 힘은 굉장했다.
소년 점소이는 지슈카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벌써 일주일 째 밤마다 좀비와 해골들이 나타나 도시를 헤집고 있거든요. 왕도의 모든 백성들이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어제 집 앞 마당에 나타난 좀비를 쫓아내느라고 밤새 빗자루를 들고 싸워서 한 숨도 못 잤네요.”
“이렇게 방비가 철저한 왕도 한복판에 언데드가 출몰한다고?”
“한복판 정도가 아니라 구석구석에서 기어 나와요. 나라님께서 이르시기를 사악한 도사가 왕도 안에 머물며 술수를 쓰는 거라고.... 그러니 손님께서도 조심하세요. 요즘 백성들의 외인에 대한 시선이 썩 좋지 않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초국의 수호신은 주작이다.
그리드가 주작을 부활시킨 덕분에 초국 전역에 축복이 내렸고, 주작의 신성한 불꽃엔 모든 사악한 것을 멸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
한데 매일 밤마다 언데드가 활개를 친다고?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언데드를 풀어놓는 건 분명한데....’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실력자이기에 주작의 불꽃을 견디는 언데드를 소환한단 말인가?
이건 정말 상식을 넘어서는 수준의 실력이다.
‘....가만?’
지슈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점소이가 ‘강시’가 아닌 ‘좀비’를 언급한 것에 초점을 맞췄다.
“해골과 좀비가 나타난다고 했지?”
“네.”
“동대륙에도 원래 좀비가 있었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거의 보기 힘들었죠. 동대륙 출신의 도사들은 좀비가 아닌 강시를 만들어서 부리니까요.”
결국 이 상황은 서대륙 출신의 네크로맨서가 만든 작품이라는 뜻이다.
어떤 미친놈의 얼굴을 떠올린 지슈카가 점소이에게 재차 물었다.
“병사들도 많이 지쳤겠네?”
“네.... 벌써 일주일 째 밤에 잠을 못자고 거리를 순찰하며 언데드를 퇴치하고 있으니까.... 병사님들 모두 힘들어 보이세요.”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거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난 지슈카가 객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객잔의 위치와 주변의 지형지물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는지 관찰하고 파악했다.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방향은 객잔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저기 방 비어있어?”
“네, 저곳은 항상 비어있어요. 보시다시피 꼭대기 층 전체를 쓰는 방이라 숙박료가 워낙 비싸거든요. 타지의 귀족이나 거상들도 꺼려할 정도로요.”
“내가 며칠 빌릴게.”
“네? 아니요, 손님. 저 방은 하루 숙박료만 금전 수십 개....”
호구 한 명 잡아보겠답시고 배짱 장사하는 사장의 배를 불려줘선 안 된다.
차마 대놓고 말하진 못하고 설득하려는 점소이에게 지슈카가 작은 보따리를 던져주었다.
“그거면 충분할 거야.”
“....헉!!”
보따리를 열어 본 점소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라스 최대의 객잔에서 일해온 소년조차도 이토록 많은 양의 금화는 처음 보았다.
지슈카는 한숨 쉬고 있었다.
‘기껏 좀 모았더니 바로 또 다 써버리네.’
그리드에게 갚아야할 돈이 아직도 꽤 남았는데 난감하다.
하지만 지슈카는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이고, 어서 옵쇼, 어서 옵쇼! 풍등객잔이 공주마마를 모십니다!”
“식사는 룸서비스로.”
“여부가 있겠습니까!”
‘돈 독 오른 귀신 같으니.’
후다닥 달려 나와 절을 올리는 객잔 주인을 냉랭하게 쏘아본 지슈카가 숙소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장 테라스로 나가 매의 눈을 발동했다.
‘좋아.’
예상대로다.
카라스 전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궁궐 등의 주요시설을 향하는 경로까지 모조리 다.
“뒤졌어, 너.”
씨익, 짙은 미소를 머금는 지슈카의 두 눈이 사냥감을 포착한 매의 눈처럼 번뜩였다.
***
돌은 열에 약하다. 철과 달리 불에 녹지 않고 쪼개지거나 타들어간다.
돌로 물건을 만들기 위해선 제련과 단련을 할 게 아니라 세공을 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리고 이건 신화급 광물.’
칼날의 모양으로 깎아 만드는 것만으로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가 되리라.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끄응!”
이내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깨닫고 말았다.
염룡의 숨결이 깃든 화석은 징을 아무리 때려 박아도 깰 수 없었다. 아예 흠집조차 생기질 않았다.
‘이걸 어쩌라는 거지?’
그리드의 고생은 계속됐다.
스태미나가 바닥날 때까지 쉬지 않고 화석에 징을 박아댔다. 즉흥적으로 고등급의 톱을 만들어 갈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화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억.... 허억....”
망치를 내려놓는 그리드의 손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이제 어찌해야하나....
자신의 방법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그리드는 궁리해보았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생각에 집중했다.
급기야.
꼬끼오!!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대장간 거리에 울려 퍼졌다.
국왕이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감히 퇴근하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대장장이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동시에 그리드의 뇌리에 번개가 쳤다.
염룡의 숨결이 깃든 화석.
녀석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에 노출돼 왔을 것이다.
그것도 무려 200년이나.
과연 녀석을 돌이라고 보는 게 옳을까?
화르륵!!
백린목이 타오른다.
용광로의 온도를 최대치까지 올린 그리드가 망설이지 않고 화석을 던져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