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22화
“아바마마!”
환한 미소를 머금은 소년이 달려온다.
푸른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
흰 피부를 돋보이게 만드는 새카만 머리카락.
거리에 출몰할 때마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홀리는 라인하르트 최고의 명사, 템빨왕자 로드의 등장이었다.
“로드!”
달려오는 로드를 그대로 품에 안은 그리드가 녀석의 물결 진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올해 14살이 된 로드였지만 그리드의 눈에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꼬맹이에 불과했다.
“헤헷.”
“체통을 지키셔야죠.”
햇살 아래 고양이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그리드의 가슴에 뺨을 비비는 로드.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는 소년에게 훈육담당 교사가 다가와 훈계한다.
어두운 표정으로 슬그머니 물러나는 로드를 번쩍 들어 올린 그리드가 목말 태웠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체통은 무슨.”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나 아이린 왕비께서 슬퍼하실 것이옵니다.”
“됐어, 됐어. 매일 이러는 것도 아닌데 아이린이 이해해줘야지.”
교사에게 축객령을 내린 그리드가 로드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해 레벨과 스탯에 제한이 걸려있긴 했지만 S등급 이상의 스킬을 무려 13개나 습득한 상태였다. 스탯의 종류도 10개가 넘을 정도로 다양했다.
과연 대륙급 천재의 위용.
라우엘의 바람대로 템빨국을 지탱할 비밀병기로 거듭날 기세다.
하지만 그게 과연 기꺼워할 일일까 싶다.
그리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될까.’
피아로, 브라함, 메르세데스, 그리고 템빨단원들과 크라우젤.
시대를 아우르는 천재들을 곁에서 지켜봐온 그리드는 알고 있다.
그들 또한 나와 똑같다.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단지 재능 덕분이 아닌 노력의 결과였다.
남들보다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또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떠 공부하고 단련했기에 지금의 그들이 있는 것이다.
로드도 마찬가지라는 뜻.
철 들기도 전부터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온 이 아이는 과연 행복할까?
생각해본 그리드가 진지하게 질문했다.
“로드야, 넌 꿈이 뭐냐?”
“당연히 아바마마처럼 되는 거죠! 최강의 전사! 그리고 최고의 대장장이가 돼서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에요!”
“.....”
혹시 주입식 교육의 폐해는 아닐까?
로드는 주변 사람들의 바람을 자신의 꿈인 것으로 착각하는 걸 수도 있다.
마음이 아파진 그리드가 조금 더 깊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여자 친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죠!”
“.....”
그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힐끔, 주변을 둘러보니 수백 명의 미녀가 쭈뼛쭈뼛 인사해왔다.
레베카의 딸 후보들.
소녀 시절부터 로드를 보살펴온 그녀들이 어느새 성숙한 미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드가 숙고 끝에 질문했다.
“감당은.... 되겠니?”
“그럼요!”
알고 대답하는 거 맞나?
로드의 표정이 워낙 해맑아 당황한 그리드가 이내 근심을 접었다.
‘대륙급 천재다. 200명이든 300명이든 충분히 감당할 수도 있어.’
아무래도 돈을 많이 벌어놔야 할 것 같다.
손주들 용돈 주다가 개털되고 싶지 않으면.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4개의 작은 인형을 꺼냈다.
탈리마에서 가져온 인공 정령들이다.
“귀여워!”
로드의 여자 친구들이 너나할 것 없이 감탄을 터뜨렸다.
불, 물, 흙, 바람.
각자의 속성에 어울리는 색상으로 개성을 표현하는 인공 정령들의 생김새가 워낙 귀엽고 깜찍한 까닭이었다.
“이게 뭔가요?”
로드는 스틱세이에게 정령술을 배웠다.
혹자는 그리드를 궁극의 잡캐라고 평가했지만 그리드가 봤을 때 진정한 궁극의 잡캐는 로드였다.
“인형들에게서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역시 알아보는 구나. 인공 정령이라는 거다. 탈리마의 마법공학이 만들어낸 정수지. 실제 정령과 달리 물질로 분류되긴 하지만 말은 훨씬 잘 듣는 녀석들이니까 곁에 두도록 해. 반드시 쓰임새가 있을 거다.”
“네! 이 아이들하고 친구가 될게요!”
활짝 웃은 로드가 인형들을 품에 안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좋은 냄새라도 나니?”
“아뇨? 아바마마의 품에 있던 애들이라 아바마마의 냄새가 나요.”
로드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다소 무딘 면이 있었다.
‘천재라서 후각도 발달한 건가? 확실히, 냄새를 잘 맡는 것도 쓸모 많은 재능이겠지.’
Satisfy의 몬스터는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냄새도 저마다 달라서 후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몬스터의 습격에 잘 당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질 낮은 독 또한 악취를 풍기는 경우가 있고.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곧 데미안 성하께서 방문하실 시간이거든요.”
데미안은 벌써 몇 년째 로드에게 신성 마법을 가르쳐주는 중이다. 매주 한 번씩 직접 라인하르트를 방문해 과외를 해주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 어서 가보렴.”
로드와 작별한 그리드는 이어서 아이린을 찾아갔다.
탈리마에서 겪었던 일들을 최대한 재미있게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이린의 표정은 내내 편치 못했다.
그리드가 탈리마로 떠나기 전.
홀로 고위 대악마를 상대로 사투를 벌였다는 소식을 그녀 또한 접했기 때문이다.
“부디 무리하지 마세요.”
“....명심하겠소.”
최근 미국의 어떤 종교단체는 Satisfy의 NPC에게도 영혼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탄생한 그들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될 거라고 염려한다는데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소리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종종 헷갈리고 불안했다.
자신이 이들을 살아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존중하고 교감할수록 이들에게도 진짜 영혼이 깃드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자고이래 물건에도 신(神)이 깃든다고 믿은 문명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물며 대상이 인간과 똑같은 NPC라면 마냥 억측은 아닐 수도...
“후....”
이러지 않기로 다짐해놓고 또 너무 깊이 생각해버렸다.
날숨과 함께 괴리감을 털어낸 그리드가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유라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미안. 마법공학총의 제작법은 조금 더 나중에야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본래 그리드는 요람에서 마법공학총의 제작법을 배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과학자 마가렛이 실험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정을 연기해야 했다.
여제의 영혼 해방을 기념하는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하니 재촉할 도리가 없었다.
-그게 왜 사과할 일인가요? 신경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고마워.
유라와 대화를 끝내고 조금 더 걷자 대장간에 도착했다. 주변을 경계하겠다는 메르세데스를 놔두고 입장하자 판미르를 비롯한 대장장들이 반겨주었다.
장인들을 불러 모은 그리드가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이걸 제련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하진 않겠군.... 다만 성공 확률은 20퍼센트가 채 안 될 듯하네.”
드워프 장인들조차 꺼려하는 재료다웠다.
판미르의 솔직한 고백에 감사를 표한 그리드가 장인들에게 10개씩의 에테르 다이아몬드 원석을 나눠주었다.
“도전해보세요.”
“탈리마에서밖에 못 구하는 광물 아닌가? 이런 귀한 물건을 우리에게 맡겼다간 손실이 너무 클 텐데....”
“여러분의 성장에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억만금을 잃더라도 손해가 아니죠.”
그리드는 처음부터 대부분의 광물을 손쉽게 제련해왔지만 보통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기껏 비싼 돈 주고 구해온 광물을 제련에 실패해서 날려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장장이 플레이어는 자신이 쉽게 제련할 수 있는 광물만 매입해서 제련하고, 아이템을 만드는 식으로 돈을 벌었다.
재산을 불리는 현명한 방법이다.
하지만 성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쉽게 성공하는 제련보다야 실패 확률이 높은 고난도의 제련이 스킬 경험치를 훨씬 더 많이 줬기 때문이다.
“항상 고맙네.”
“별 말씀을.”
판미르와 장인들에게 웃으며 화답해준 그리드가 대장간을 떠났다.
다음으로 그가 만난 사람들은 라우엘과 라빗이었다.
“이것들을 적절하게 사용해줘.”
“이건 케를 옹의....”
원탁 위에 놓인 총 98기의 인공 정령.
그것들의 성능을 확인해본 라우엘과 라빗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각 분야에 상당한 노동력이 확보되겠군요.”
“인건비를 아낄 수 있게 됐단 사실에 기쁩니다.”
“앞으로 매해 52기의 인공 정령이 추가로 확보될 거야. 그런 줄 알고 있어.”
“혹시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건 불가능할까요?”
“그건 안 돼. 기술이랑 관계없이 종족이 드워프여야만 만들 수 있다는군.”
“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바쁘다, 바빠.
인공 정령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극한의 효율을 뽑을 수 있을지 상의하는 라우엘과 라빗을 뒤로한 그리드가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브라함의 서재였다.
햇살이 내려앉는 창가에 기대 독서 중인 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뱀파이어가 햇빛을 좋아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흥,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라.”
“그게.... 혹시 텔레포트로 드래곤의 결계를 통과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동 마법을 차단하는 마법진하고 좌표를 교란하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는 것 같던데.”
“학원의 귀쟁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지. 그놈이 천 년, 만 년을 더 살아도 드래곤의 결계는 통과하지 못할 거다.”
평소 그리드는 학원의 귀쟁이 즉, 아카데미의 교장 스틱세이를 이동수단으로 삼아왔다. 아무리 그리드라도 브라함에게 텔 셔틀을 시킬 정도의 배짱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브라함은 스틱세이의 텔레포트를 염두에 둔 질문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리드가 재차 물었다.
“브라함 당신의 텔레포트는요?”
브라함이 드디어 책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그의 홍옥 같은 눈동자는 평소처럼 차가웠다. 찬바람이 부는 듯하다.
“마법 중 상당수가 드래곤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폴리모프와 텔레포트이고.”
“그럼.... 당신의 텔레포트로도 어림없다는 겁니까?”
낭패다.
앙트리노의 우려대로 탈리마와 교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던 그리드가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브라함의 눈빛이 변했다. 뜨거운 열망이 그의 눈동자에 자리 잡았다.
“내 마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용살(龍殺)이다.”
지옥을 응징해 어머니의 넋을 기리겠다는 목적은 자식 된 도리에 기인한 것이고, 마리로즈를 죽이겠다는 목적은 일종의 오기에 불과했으나 드래곤 사냥은 대마법사 브라함의 염원이다.
드래곤으로부터 살아남은 것.
고작 패주 따위가 업적으로 남은 브라함은 종종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들었지만 위선에 불과했다. 사실 브라함은 과거를 없애고 싶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던 과거의 자신을 용납하기엔 그의 자아가 너무 강했다.
“나는....”
덥썩!
가까이 다가온 브라함이 그리드의 손목을 붙잡는다.
이어서.
스파아앗!!
그리드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뀌었다.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공동.
정체모를 공간에 그리드와 브라함은 서게 됐다.
“여긴....?”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를 놀라게 만든 광경은 공동 한쪽에 가득 쌓인 보물산 따위가 아니었다.
곳곳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 중인 4기의 인공 정령.
탈리마에서 가져온 인공 정령들보다 훨씬 더 짙고 아름다운 색상을 지닌 녀석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드는 눈치 채고 말았다.
“서, 설마.”
역시나.
[플레이어 최초로 <염룡 트라우카의 둥지>에 입장하였습니다!]
“오, 이것들 꽤 좋아 보이는데?”
“....!”
그리드가 기함했다.
탈리마의 수호신.
다름 아닌 인공 정령왕 4기를 브라함이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당해서 넋을 잃은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말했다.
“드래곤의 결계? 흥, 이 몸께서는 뚫으신지 오래다.”
....아니, 뭐가 그렇게 당당한데?
태클 걸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떠드는 도둑놈의 모습을 그리드는 그저 바라만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