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21화
제12위 대악마 슈트리오.
산을 헤치고, 집채를 짓누르며 진격했던 녀석의 손은 인류에게 아득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존재란 말인가....
무언가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 요새를, 도시를, 그리고 나라를 무너뜨려가는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것의 ‘전부’를 떠올리는 순간 세계의 파멸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였다.
그리드 또한 공포를 느꼈다.
나중에야 TV를 통해 목격한 당시 현장의 광경.
이미 지나갔을 뿐인 과거에 그리드는 압도당했다.
그만큼 슈트리오의 손의 존재감이 컸다.
크릉.... 쿠르르릉....!!
쓰나미에 산이 갈려나갈 때 이런 소리가 날까?
숨소리가 지독하게도 요란하다.
‘이놈은....’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는 눈동자.
거대하고 시뻘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드는 곧바로 눈치 챘다.
슈트리오의 눈이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놈이 이쪽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역시 이놈하고도 싸우게 되는 걸까?’
그리드가 슈트리오의 손을 보고 느꼈던 두려움은 놈과 싸워야할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봤기 때문이었다.
대악마는 인류의 적이며, 템빨국은 인류의 편에 속하고 있었으니까.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이렇게 커다란 놈하고....’
손과 눈동자의 크기를 통해서 가늠해 보건데, 라드볼프의 마장기와도 비할 바가 아니다. 슈트리오의 본신은 드래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질량만으로 만물을 위협하는 초거대 생명체.
여태까지 만나온 대악마의 규격은 모두 인간과 비슷했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유난히 특별하다.
‘마신이라는 별명도 그렇고.... 지옥에서도 특별한 존재인 건가?’
당연한 말이지만, 대악마의 격은 신(神)보다 아래다.
물론 어중간한 신보다는 상위 대악마의 무력이 더 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에게는 여러 가지 권능이 있다.
대악마와 직접적으로 싸워 이기진 못할지언정 대악마를 토벌할 용사를 지목하고 성장을 돕는 식의 권능을 구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악신 야탄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제1위 대악마 바알조차도 그 이름에 감히 신을 씌우진 않았다.
한데 슈트리오는 대악마이되 마신이라고 불리고 있다.
심지어 순위가 비교적 낮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뭐, 당장 중요한 건 놈의 정체 따위가 아니다.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난 그리드가 매무새를 정돈했다. 표정이 무척 엄숙하다.
앙트리노는 연장자답게 눈치껏 굴었다.
“아, 미안하네. 내 잠시 한눈을 팔고 말았다네. 우리가 어디까지 대화했었지?”
다른 생각에 잠긴 바람에 너의 추태를 보지 못했다. 작게 비명 지르며 엉덩방아 찧는 모습 따위, 정말로 못 봤다.
앙트리노의 태도에는 세심한 배려가 담겨있었다.
고맙고 민망해서 헛기침을 뱉은 그리드가 이쪽 세계를 훔쳐보고 있는 슈트리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녀석은 분명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워낙 크다보니 정확히 무엇을 보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다.
나를 보는 것 같기도, 나를 자각조차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저건 12위 대악마의 눈입니까?”
“맞네. 몇 년 동안 손으로 말썽을 부리더니 이제는 눈깔 새파랗게 뜨고 째려보고 있지. 마음 같아서야 당장 저 눈깔에다가 도끼를 찍어버리고 싶어.”
“저였으면 처음 본 날 바로 도끼로 찍어버렸을 텐데요.”
“나라고 안 그래봤겠나?”
앙트리노가 즉시 도끼를 꺼냈다.
사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다. 애초에 말을 많이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굳이 직접 그리드의 안내인 노릇을 자처한 이유는 순전히 존중의 의미였다.
탈리마를 수호해온 최강의 전사.
일국의 기둥이 그리드를 직접 귀빈으로 모심으로써 그리드의 입지를 다져주는 것이다.
휘릭!
앙트리노의 손을 떠난 도끼가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간다.
신속함과 정확도 모두 훌륭했다.
그리드의 방어력을 위협할 정도의 위력까지 깃들어 있었다.
쾅!
하지만 슈트리오의 눈은 무사했다.
지옥의 틈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기 때문.
스윽.
장벽에 가로막혀 맥없이 미끄러지는 도끼를, 앙트리노가 자신의 손으로 회수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도끼에 끈이라도 달린 것처럼 도끼가 앙트리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으니 말이다.
얼핏 허공섭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탈리마.
저건 허공섭물이 아닌 에고 아이템의 성능이었다.
‘처음부터 눈에 띄었었지.’
파그마의 눈을 활성화시킨 그리드가 앙트리노의 도끼를 관찰했다.
상위 에고가 깃든 전설 등급의 아이템.
제작자는 마리벨 여제다.
그녀가 생전에 만들었던 전투 도끼가 앙트리노라는 최고의 전사와 함께하는 세월 동안 전설로 칭송받게 된 듯했다.
‘역시.’
그리드는 재차 확신했다.
영웅과 템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애초에 인간인 이상 도구를 다루는 게 정상이고 더 좋은 도구를 갈망함이 옳았다.
한데 왜 유독 게임에서만큼은 템빨이 비난 받았을까?
불과 몇 년 전까지 세상을 지배했던 잘못 된 인식에 새삼 의문을 품으며, 그리드는 말했다.
“두 세계가 단절돼 있군요.”
앙트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정상적인 현상이지.”
지상과 지옥은 별개의 차원이다.
본래 함부로 왕래할 수 없다.
하지만 슈트리오의 손은 지상을 침범했었다.
야탄교에서 찾아와 차원 간의 봉인을 풀기 전부터, 이미 슈트리오의 손은 제멋대로 틈새에서 튀어나와 광산을 헤집어 놓았다.
마침 그 사실을 떠올린 그리드가 질문했다.
“허면 슈트리오의 손은 무슨 수로 지상에 물리력을 행사했던 겁니까?”
어깨를 으쓱인 앙트리노가 자신의 발 앞에 선을 그었다.
“우리도 전혀 모르겠더군. 놈의 손이 여기까지밖에 닿지 않는 걸 확인한 뒤부턴 그냥 신경을 끊었네.”
“....”
대악마의 손이 튀어나와서 활개를 치는데 신경을 끊었다고?
그리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앙트리노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가치가 있는 광산도 아니었고.... 자네도 알잖은가? 우리들 드워프는 본래 별거 아닌 일 따위엔 관심이 없는 종족일세.”
“나라 안에 대악마가 나타났는데 별거 아닌 일이라....”
“험험, 사실은 염룡을 믿었던 게 컸지. 어차피 이곳은 염룡의 영역이므로 슈트리오의 손이 필요 이상으로 활개 칠 수 없다고 판단한 걸세.”
철천지원수인 염룡 덕분에 도리어 안심했다니.
역시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눈앞의 이 친절한 드워프 역시 고작 며칠 전엔 내게 도끼를 휘둘렀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그리드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앙트리노의 이어지는 말이 흥미로웠다.
“저놈이 스스로 손을 자르면서까지 이쪽 세상에 넘어올 줄은 몰랐어.”
“스스로 손을 잘랐다고요? 원래부터 분리돼 있던 게 아니고요?”
앙트리노가 조금 전에 그은 선을 툭툭 건드렸다.
“그렇다네. 놈의 팔뚝이 워낙 두꺼운 탓에 틈새를 통과하지 못했었거든.”
“....”
“야탄교가 연 문을 통해서 다른 대악마들이 넘어오는 모습을 보고 다급히 손이라도 잘라 내보낸 것 같은데.... 참으로 무서운 집념 아닌가?”
맞다.
지상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생길 지경이다.
‘아무래도 저놈과 싸우는 건 기정사실이 되겠군.’
역시 강해져야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템빨을 갖추는 게 최우선이다.
그리드가 앙트리노에게 양해를 구했다.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좀 캐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일세.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켜준 은인에겐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드려야지. 마음껏 챙겨가시게.”
다만 아쉬운 사실은, 에테르 다이아몬드의 채굴이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다. 원석이 워낙 단단하고 뿌리 깊이 박혀있는 탓에 작업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어지간히 숙달된 광부도 하루에 3~4개의 원석을 간신히 캐내는 정도.
아무래도 채광에 덜 익숙한 대장장이는 훨씬 더 힘들 것이다.
“광부들을 소집할 테니 좀 기다려주시게. 몇 명이나 와 줄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는 대부분 대장장이가 되길 꿈꾼다. 대장장이 외 직업군의 숫자는 한정적이었고 광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탈리마의 광부들은 당연히 매일 바빴다. 자신들보다 월등히 숫자가 많은 대장장이들의 주문을 맞추기 위해선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탈리마엔 온갖 종류의 광산이 있으므로 안 그래도 숫자가 적은 광부들은 탈리마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소집하는 건 쉽지 않다는 뜻.
하지만 앙트리노는 자신과 그리드의 위상을 믿었다. 그리드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만사 제치고 달려와 줄 광부가 몇 명 정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염치없지만 부탁하지.’
요람의 걸작, 인공 정령 <듀라스>를 소환한 앙트리노가 녀석에게 쪽지를 전달하려는 순간이었다.
깡!
그새 곡괭이를 꺼낸 그리드가 채광을 개시했다.
앙트리노는 곧 손이 저려 울상 지을 그리드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깡! 깡! 까앙!!
“....!?”
그리드의 곡괭이질은 멈추지 않았고 석벽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던 에테르 다이아몬드 원석은 자신의 속살을 점차 수줍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어, 어떻게? 설마 기스의 기술까지 계승한 겐가?”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전설의 광부.
실로 이상적인 듀얼 클래스다.
굳이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세상 모든 광물을 구할 수 있고 그것으로 또 세상 모든 물건을 제작할 수 있으리라.
‘핵세타이아 신에게 인정받은 이유가 있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는 앙트리노에게 그리드가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템빨입니다.”
채광 속도, 채광 성공 확률 300퍼센트 상승.
최고급 광물 획득 확률 200퍼센트 상승.
채광 시 스태미나 소모 저하.
그리드가 사용 중인 곡괭이의 주요 옵션이다.
극검을 위해 꾸준히 곡괭이를 연구하고 제작해온 끝에 탄생시킨 전설 등급의 곡괭이었다.
“템....빨.”
맥락을 통해서 템빨의 뜻을 이해한 앙트리노가 열망을 품었다.
전사.
고립된 탈리마에선 이제 쓸모없는 존재다.
반면 광부는 다르다.
광부는 언제나 필요하고 부족했다. 탈리마에 가장 보탬이 되는 직업군 중 하나였다.
앙트리노가 제2의 삶을 꿈꿨다.
“혹시.... 혹시 내게도 광부가 될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는가?”
“....네?”
이날.
광산에서 즉석으로 새로운 곡괭이를 제작한 그리드는 탈리마 최강의 전사 앙트리노와 함께 광물을 캤다.
네임드 NPC답게 스탯이 높은 앙트리노는 지치는 법이 없었고 덕분에 그리드는 단 하루 만에 목표치 이상의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크릉.....
왠지 점차 숨소리가 작아지는 듯했던 슈트리오가 슬금슬금 틈새로부터 떨어져나갔다. 그러더니 급기야 어둠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본인이 병풍이 됐다는 사실을 마치 인지한 것처럼 보였다.
‘관종한텐 무관심이 약이지.’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은 걸 참은 그리드가 자루에 가득 담은 에테르 다이아몬드를 챙기며 말했다.
“우선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와 함께 트라우카의 결계를 뚫고 탈리마를 왕래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해본 뒤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허허, 친구가 무슨 전설의 마법사라도 되는가? 설령 전설의 대마법사라고 해도 쉽지 않을 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적당히 마음을 비우는 걸 추천 드리겠네.”
경험자의 조언이었다.
탈리마는 외부와의 교류를 포기한 지 오래다.
고립된 삶에 적응하는 단계였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후훗.... 그때까지 난 훌륭한 광부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겠네. 자네가 필요로 할 때면 내 어떤 광물이든 구해주도록 하지.”
염룡 트라우카는 당장 오늘 돌아올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언제 다시 자리를 비울지 모른다.
백년, 천년이 지나도 그리드와 재회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앙트리노는 감상에 젖은 약속을 꺼내고 말았다.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그 약속 잊지 않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죠.”
왜 갑자기 광부 타령일까?
그리드는 의아했지만 어쨌든 감사할 따름이었다.
스파앗!!
귀환 주문서의 빛줄기와 함께 그리드는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