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63화 (1,153/1,794)

템빨 59권 - 20화

지능이 높은 동물일수록 철창을 원망하는 법이다.

그리드는 탈수가 마귀들의 왕이 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유를 원했던 건가.’

파멸의 갑옷, 환멸의 각반, 콰트로의 장갑, 사신의 부츠, 오목눈이 반지, 달의 목걸이, 세피어스의 귀걸이, 갈구노스의 오브, 그리고 탈리마의 수치.

그리드가 만마전에서 가져나온 아이템은 총 9개다.

신화 등급 아이템인 탈수를 제외하면 전부 전설(낮은 등급부터 시작해 진화해온), 혹은 비화 등급의 아이템이었는데 녀석들 대부분이 특별한 사연을 품고 있었다.

착용자의 육신을 옥죄고 끝내 뭉개버리는 파멸의 갑옷.

먼 옛날, 자신의 딸을 노리개로 삼은 사하란 제국의 황자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어느 드워프 장인이 만든 작품이다. 장인은 이 갑옷을 제국에 진상하여 황자를 파멸로 인도할 계획이었지만 아쉽게도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제작자의 원한과 살의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에고가 갑옷에 깃든 여파였다.

대놓고 발광하는 녀석을 과연 제국에서 받아주겠는가?

장인은 그 흉포한 녀석을 차마 제국에 보내지 못했다. 눈물을 머금고 만마전에 가둬버렸다.

차가운 달빛을 빨아들여 착용자의 피와 뼈를 얼리는 달의 목걸이.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일백 년을 독수공방했던 드워프 세공사가 만든 작품이다. 매일 밤마다 외로워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녀는 달빛 아래서 이 목걸이를 만들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고독해졌으면 좋겠다는 무의식이 사악한 에고를 탄생시켰다.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외견으로 사람들을 유혹했던 달의 목걸이가 일으킨 파장은 무척 컸다.

염룡 트라우카가 둥지를 옮기기 전.

탈리마를 방문한 어느 거상이 달의 목걸이에 한 눈에 매료되고 만 것이 문제였다. 기꺼운 마음으로 목걸이를 구매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부인에게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었고 부인은 남편의 눈앞에서 서서히 얼어 죽고 말았다.

피부가 아닌 뼈와 피부터 얼려가는 달의 목걸이의 무서움이었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부인을 잃고 오열하는 상인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던 드워프 세공사는 탈리마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로 참수 당했고 저주 받은 목걸이는 만마전에 봉인 당했다.

이 외에도 착용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환멸의 각반, 착용자의 손가락을 잘라 4개로 만들어버리는 콰트로 장갑, 착용자를 사지로 떠미는 사신의 부츠, 은밀한 새 폴더를 떠올리게 만드는(어디까지나 그리드의 관점에서) 오목눈이 반지, 온갖 비극을 속삭이는 세피어스의 귀걸이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자신들이 마귀가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었다.

또한 능력치를 제외한 상세 정보가 ‘알 수 없음’으로 표기된 갈구노스의 오브는 탈리마에서 만든 작품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물건으로 추정돼 어떤 사연을 간직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반면 탈수는 달랐다.

이 녀석의 정보는 너무나도 깔끔했다. 마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경위가 서술되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폭주를 일으켰고 만마전에 봉인돼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마귀들의 왕에 등극했다.

<탈리마의 수치>

등급:신화

내구력:3,600/3,600(자가 수복 가능)

*탈리마의 수치는 인간의 손길을 거부합니다. 이 아이템을 대상으로는 수리 시스템이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방어력:1~2,750

*탈리마의 수치는 본인의 의지로 방어력을 조정합니다.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화염 내성

*탈리마의 수치는 지상에서 가장 뜨거운 용암의 폭포를 수백 년 동안 견뎌왔습니다. 지상의 모든 불길은 이 아이템을 훼손시키지 못합니다. 단, 불길로부터 착용자를 지켜준다는 뜻은 아니므로 착각은 금물입니다.

★에고 아이템입니다.

본인이야말로 세상 모든 무구의 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스킬 <왕의 부정>Lv.1 생성

에고 없는 무구를 탄압합니다.

반경 10미터 내의 대상이 착용 중인 장비가 에고 아이템이 아닐 경우 강제로 무장 해제시킵니다. 최대 30개.

스킬 자원 소모:없음

스킬 지속 시간:3초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7분

*스킬 <왕의 명령>Lv.1 생성

에고 아이템에 강제력을 행사합니다.

반경 100미터 내의 에고 아이템을 탐색하고 지정해 특정 행동을 명령합니다. 명령권은 착용자가 아닌 탈리마의 수치에게 있습니다.

스킬 자원 소모:없음

스킬 지속 시간:강제력이 유지되는 동안. 강제력 유지 시간은 대상 아이템의 에고 등급과 성격에 따라서 다릅니다.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없음

*스킬 <왕의 지배>Lv.MAX 생성

착용자의 정신을 지배해 육체를 빼앗습니다.

왕의 지배가 유지되는 동안 착용자의 공격력과 모든 속도가 20퍼센트 상승하고 치명타 면역과 약점 공격 면역 상태가 됩니다. 단, 지배가 끝난 후 착용자는 반드시 사망합니다.

스킬 자원 소모:없음

스킬 지속 시간:착용자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24시간

드워프 왕가가 5대에 걸쳐서 제작한 투구입니다. 탈리마 최고의 대장장이 기술이 집약됐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탄생 배경만으로 전설이 될 자격이 있었고, 만마전에서 쌓아올린 악명을 통해서 신화로 거듭났습니다.

일부 악인들이 탈리마의 수치를 신격화하는 중입니다.

착용 조건:없음

무게:230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겠지.’

지능이 높은 탈수는 누군가의 소유가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며 사건사고를 일으킨 끝에 만마전에 봉인됐을 터.

추측해낸 그리드는 탈수를 딱히 동정하지 않았다.

물건이란 쓰이는 것에 의의가 있는 법이니까.

쓰이는 것이야말로 축복이고 행복임을 탈수 또한 머잖아 알게 되리라.

‘내가 가르쳐주마.’

그리드의 결의가 인벤토리 속 탈수를 콧방귀 뀌게 만드는 이 순간에도 앙트리노의 설명은 이어지고 있었다.

“인공 정령들이 갈고 닦은 길일세.”

해발 5천 미터에 이르는 화산.

그 중심부의 험난한 석벽을 타고 평탄한 지면이 이어져 있었다.

지상부터 5천 미터 위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

마차를 다녀도 무리가 없을 지경이니 도로라고 표현함이 옳아 보였다.

“그렇군요. 인공 정령이....”

토목 공사는 높은 기술력과 노동력을 요구한다. 특히 험난한 지형일수록 공사의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한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템빨국 건국 이후 몇 년 동안 라우엘이 주도한 토목 공사가 수백 건이었으니 어깨너머로나마 배운 것이다.

“사실은 탈리마에 노예제도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던 차였습니다.”

모든 주요 도시에 왕도로 통하는 도로를 닦는 게 목표였던 라우엘은 셀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을 혹사시켰다. 물론 합당한 보상을 해주긴 했지만 지친 노동자들의 신음소리가 템빨국 전역에 울려 퍼졌을 정도였다.

깎아지른 듯한 석벽을 타고 오르는 수십 킬로미터의 도로를 이만큼이나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선 보통의 노동력과 기술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도로를 건설하는 중에 떨어져 죽거나 지쳐 죽은 사람만 수백일 거라고 그리드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인공 정령의 업적이었다니....

인공 정령의 성능에 더 큰 기대감을 품게 된 그리드가 계산해보았다.

‘요람에서 매해마다 제공하기로 한 인공 정령이 50기에다가 갓 핸드랑 교환하기로 한 인공 정령이 총 52기.... 그냥 몇 달 정도는 대장간에 틀어박혀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탈리마는 백린목보다 갓 핸드의 가치를 조금 더 높이 평가했다.

갓 핸드가 신에게 인정받은 대장장이의 손을 본 따 만든 작품이라는 이유도 이유지만 탐욕이라는 광물에 큰 매력을 느끼는 눈치였다.

당연하다.

탐욕은 헥세타이아 신조차 눈독을 들였던 파브라늄의 진화형.

지상 최고의 광물이라고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오직 그리드만이 제련할 수 있는 광물이었지만 드워프들은 개의치 않았다. 본래 보물이라는 건 소장만 해도 배가 부른 법이니까.

에고 깃든 갓 핸드를 충분히 확보할 겸, 한동안 탈리마에 머물며 갓 핸드를 생산할까 고민하던 그리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드워프들의 재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안 돼.’

인공 정령의 생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드워프가 평생 제작하는 인공 정령의 숫자는 4기에서 6기 수준. 그들의 자산은 한정적이므로 갓 핸드의 값을 제대로 치르고 싶어도 못 치르는 사태가 금방 닥쳐올 것이다.

드워프와의 개인적인 거래는 천천히 지속적으로 하는 편이 좋았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시장에 한꺼번에 풀어버리면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기도 하고.’

쓸모없는 갓 핸드를 기꺼이 사주는 호갱님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기 위해선 조급해해선 안 된다....

우선은 요람에서 확보하는 인공 정령만으로 템빨국을 더 나은 국가로 만들어 보자며 마음을 달랜 그리드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산길의 중턱.

짙은 어둠에 잠식된 광산의 입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했네. 바로 이곳이 엘리테르 광산일세.”

에테르 다이아몬드.

빛과 마력을 빨아들이는 물질이다.

에테르 다이아몬드로 만든 안경은 마안족 왕의 마안마저 차단할 정도. 그 안경 덕분에 마안족 왕은 세상을 보았다. 평생 장님으로 살아야할 신세를 면했다.

하지만 안경의 내구력은 영원한 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강력한 마안족 왕의 마안을 언제까지고 버틸 수 없었다.

그리드는 마안족 왕을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안경을 만들어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마법에 절대적인 카운터로 작용하는 에테르 방어구 세트를 생산해서 보급할 계획이기도 했다.

무려 2년도 더 전부터 세웠던 계획이다.

하지만 염룡 트라우카와 12위 대악마의 손이라는 장애물들 탓에 지금에 이르러서야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게 됐다.

“어두우니 발밑을 조심하게.”

왜 조명을 설치하지 않았느냐는 어리석은 질문 따위 그리드는 던지지 않았다.

에테르 다이아몬드는 빛을 흡수하는 광석.

조명을 설치해봤자 무의미하다.

이곳이 새카만 어둠에 잠식된 이유다.

‘좋아. 생각보다 훌륭해.’

앙트리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벽을 어루만지는 그리드의 입 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세상에 유일한 엘리테르 광산.

지난 세월 동안 에테르 다이아몬드의 매장량이 대부분 소모됐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풍성했다.

그리드의 생각을 뻔히 읽은 앙트리노가 사정을 밝혔다.

“자네도 알다시피 에테르 다이아몬드 원석을 제련하는 건 좀처럼 힘든 일일세. 염룡 탓에 왕궁 화로의 화력이 약해진 후부터 탈리마는 사실상 에테르 다이아몬드의 활용을 포기했어.”

“그랬군요.”

그리드 또한 백린목이 없었다면 쉽게 제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에테르 다이아몬드는 까다로운 광석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화로가 다시 화력을 되찾을 테니 이 광산도 다시 활성화 되겠네요.”

“자네가 백린목을 공급해주기로 했지만 글쎄....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군. 트라우카가 당장 내일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니 앞으로 양국의 교류가 원활할지 의문일세. 그리고 애초에 에테르 다이아몬드의 활용도가 그리 높지도 않고.”

“교류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탈리마 측에서 이동 마법의 차단만 해제하면 텔레포트로 왕래가 가능할 테니까.”

“염룡이 호구로 보이는가? 텔레포트로 진입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놈의 결계에 차단당하고 잡아먹힐 걸세.”

‘브라함의 텔레포트도 안 통하나? 헉!’

드래곤과 전대 전설 간의 격차를 아직도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광산의 끝.

어둠 사이에 드러난 틈새 너머로 시뻘건 눈동자가 끔뻑거리며 그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소처럼 거대한 눈동자였다.

그리드는 시스템으로 인한 상태이상이 아닌 실제적인 공포를 느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