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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161화 (1,151/1,794)

템빨 59권 - 18화

탈리마의 농업은 완전 기계화에 성공했다. 밭을 갈고, 씨앗과 모를 심고, 수확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사람이 아닌 인공 정령과 골렘 등의 각종 기계가 대신 해주고 있었다.

드워프가 게으르기 때문에 만든 시스템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드워프는 단지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서 농업 등의 생계 관련 사업을 기계에게 맡겼을 뿐이다.

공업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드워프는 그 독보적인 기술력이 무색하게도 오직 수공업만을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매주 5기 내외의 인공 정령과 골렘, 그리고 수백 개의 병장기를 생산한다는 건 그들의 노동 시간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탈리마를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엔 휴식을 모르는 종족이라는 표현이 한 번 이상씩 등장할 정도.

모루를 밥상 삼고 거푸집을 술잔 삼아 짧은 휴식 시간 동안 식사를 때우고, 그 외의 시간은 대부분 노동에 투자하는 그들 드워프는 진정한 워커홀릭이었다.

한데 그들이 오늘 단체로 파업했다.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거리로 뛰쳐나와 펠롯의 대장간을 둘러쌌다.

여제의 영혼 해방을 기념하는 축제조차 30분 만에 끝냈던 워커홀릭들을 사로잡은 인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우물우물, 꿀꺽.

따앙!

드워프도 식사는 휴식 시간에 챙기건만....

물에 푹 적신 빵을 1초 만에 욱여넣고 망치질에 열중하는 그리드.

그가 마주보고 선 용광로 속 불길은 꺼지는 법이 없었다. 제련은 섬세했고 담금질은 정교했다. 통달의 경지에 오른 망치질이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그리드 본인의 손을 그대로 본 뜬 듯한 모양의 작품.

얼핏 보면 인간형 골렘의 한 파츠에 속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리드가 만드는 작품의 최종 형태는 본래부터 손에서 끝나게끔 설계돼 있었다.

따앙! 따앙! 따앙!!

작품과의 교감능력을 높이기 위해선 수작업이 최고라는 펠롯의 조언을 새겨 들은 그리드는 하루 2개씩의 갓 핸드를 정성들여 제작했다. 만약 펠롯의 조언이 없었다고 해도 수작업을 고집했을 것이다.

수십 개의 관절을 복잡하게 표현해야하는 갓 핸드의 제작 난이도는 극악.

오토 제작 따위에 맡겨서야 제대로 만들어질 리 없다.

“씨발!!”

한동안 집중하는가 싶던 그리드가 거친 욕설을 토했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쌍욕이었다.

총 10개의 갓 핸드를 만드는 동안 에고가 단 1번도 깃들지 않았으니 짜증이 치밀 수밖에. 성질 같아서야 망치를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뼛속 깊이 대장장이인지라 차마 그러진 못한다.

‘이건 진짜 너무 심하잖아? 그래도 하나 정도는 떠줘야 정상 아니냐?’

<고급 에고 아이템 제작기술>에는 ‘일정 확률’로 제작 아이템에 에고를 부여한다는 내용이 표기되어 있다.

일정 확률의 체감 확률은 대략 10~30퍼센트.

물론 운이 나쁠 땐 10퍼센트도 안 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평균 20퍼센트에 수렴한다.

한데 그리드는 최악의 최악을 겪었다.

10개의 아이템을 제작해서 전부 실패.

5일 동안의 고생이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그나마 무기나 방어구를 만들었을 때 실패했다면 이렇게까지 멘탈이 나가진 않았을 텐데.’

무기와 방어구엔 에고가 없어도 큰 문제가 없다. 당장 그리드가 사용하는 장비들부터가 에고 아이템이 아니다. 장비 아이템의 가치평가 기준에서 에고는 부수적인 옵션에 불과했다.

하지만 갓 핸드는 경우가 달랐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갓 핸드는 고작 손 모형일 뿐이니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설령 레전드리 등급으로 만들어져봤자 기괴한 장식품에 불과한데 무슨 가치가 있을까?

‘S.A 이 뭣 같은 새끼들.....’

이제 막 습득한 스킬이다. 특전으로 성공 확률을 높여줘도 부족할 판국에 오히려 낮춰버릴 줄은 몰랐다.

‘효과가 어떤지 확인 정도는 하게 해주지. 쯧.’

멍청한 아들놈이 사랑방의 불청객을 죽이고자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세상을 하직한 마리벨 여제.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그녀의 영혼을 떠나보낼 때는 솔직히 홀가분한 마음이 컸었는데 고작 5일 만에 그리워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후회된다는 건 아니다.

만약 에고에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여제의 영혼은 끽해야 에픽 등급에 불과했다.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히든 특성을 지녔다곤 하지만 상처 입은 끝에 백치가 된 탓에 연산 능력이 너무 떨어졌다. 복잡한 명령을 즉각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고, 그 탓에 그리드는 최대 4개의 갓 핸드밖에 운영하지 못했었다.

여제의 영혼과 맞바꾼 에고 제작 기술엔 분명히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다만 그리드의 운이 너무 없다는 게 변수로 작용했을 뿐이다.

“하....”

그리드의 한숨이 깊어졌다.

10개의 갓 핸드를 만드는 동안 단 한 번의 성공도 거두지 못하다니....

설마 했던 최악의 상황이 그에게 커다란 탈력감을 안겨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로그아웃한 뒤 며칠 동안은 게임을 멀리하고 싶을 정도였다.

설령 100개의 갓 핸드를 만들고 실패했을지라도 좌절을 극복했겠지만, 애초에 극복해야할 좌절이라는 게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이딴 식일 거면 차라리 특정 행동으로 에고를 부여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겠네.’

화를 주체 못한 그리드가 끝내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그를 지켜보던 드워프들이 안타까워 탄식했다.

저토록 훌륭한 광물을 창조하고 저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역사상 최고의 대장장이조차 시련을 겪어야한다니....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고도 험난함을 느낌에 드워프들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리드의 좌절에 공감했다.

“그런데 저건 운이 너무 나쁜 거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설마 10개의 작품을 만드는 동안 단 1번도 교감을 성공하지 못할 줄이야....”

그리드의 에고 제작기술은 무려 고급.

수백 년의 수련을 쌓아온 드워프 장인들이나 습득할 수 있는 영역의 기술이다.

그리고 드워프 장인들은 10개의 병장기를 제작할 때마다 평균 3개의 에고를 탄생시켜왔다. 10개 다 실패할 확률은 정말로 희박해서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상황이었다.

그 희박한 확률을 그리드는 단 5일 만에 경험한 것이다.

“응?”

“저분은?”

혀를 내두르던 드워프들이 술렁였다. 좌우로 물러나는 그들을 지나친 흑발의 드워프가 펠롯의 대장간 문을 벌컥 열었다.

초월자.

드워프족 최강의 전사 앙트리노였다.

“소식은 들었네. 안타깝군. 기분 전환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나?”

“기분 전환?”

“엘리테르 광산에도 가보고 싶고, 마법공학 기술도 배우고 싶다며? 내가 안내해주겠네.”

“괜찮은 거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엘리테르 광산은 외부인이 방문해도 상관이 없네. 다만 문제는 마법공학사들의 태도였는데 다행히 그들도 그대의 견학을 기꺼이 반기는 눈치더군.”

허가를 얻기까지 5일이나 걸린 이유는 마법공학 단장이 샬롯 왕의 칙서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 번 일을 시작하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작업실에만 틀어박히기 일쑤였으니 5일 전에 보낸 칙서를 이제야 확인한 듯했다.

“흠....”

그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기뻐할 줄 알았던 그의 반응이 영 미지근 하자 앙트리노는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그리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고맙소. 하지만 당장은 안 돼. 일단 에고를 만들어보기 전까진 여기서 나갈 수 없어.”

“이번엔 꼭 성공하기를 빌지.”

털썩, 앙트리노가 대장간 한쪽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애용하는 도끼를 꺼내더니 숫돌로 갈기 시작했다.

날 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어지간한 인간 대장장이보다 훨씬 나을 정도. 과연 드워프다웠다.

‘좋아, 다시 해보자.’

그리드는 인연을 중요시 여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마다 무척 들떴고 짜릿함마저 느꼈다.

앙트리노 덕분에 화가 조금 누그러진 그가 여태껏 만들었던 10개의 갓 핸드를 주섬주섬 모았다. 통째로 용광로에 넣고 녹인 다음 새로운 갓 핸드의 재료로 사용할 심산이었다.

그때 대장간 밖이 난리가 났다.

“잠시! 잠시만!!”

“템빨왕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

“....?”

까치발을 들고 창문에 매달린 드워프들이 소리치자 그리드가 어리둥절해졌다.

자비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드워프들이 소리쳤다.

“그 작품들 말입니다! 폐기하지 말고 부디 우리에게 팔아주십시오!”

“이걸....?”

장비류로 분류되지 않는 잡템.

에고가 깃들지 않아 쓸 수 없는 10개의 갓 핸드를 그리드가 가리켜보이자 드워프들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걸 왜? 설마 어디 장식이라도 해놓게요?”

“당연하지요! 헥세타이아 신께 인정받은 전설의 대장장이의 손을 본 뜬 작품인데 당연히 대장간 한가운데 장식해놓고 신처럼 섬겨야지요!”

“나는 매일 그 손을 향해서 기도를 올릴 생각이네! 자손대대로 물려줄 작정이니 부디 내게 팔아주시게!!”

그리드와 파그마에겐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탈리마를 방문했을 무렵의 파그마는 아직 전설의 대장장이가 아니었던 반면 그리드는 이미 완숙한 전설이었다.

파그마가 탈리마에서 남겼던 작품들엔 별 흥미를 못 느꼈던 노년의 드워프들조차 그리드의 작품엔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게 그리드 본인의 손을 본뜬 작품이라면 더욱 더.

사실, 세상 모든 예술품 수집가들이 탐을 낼 작품이기도 했다.

전설의 대장장이의 손을 섬세하고 완벽하게 재현한 작품을 탐내지 않을 수집가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이 정도 예술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작품은 온 세상을 뒤져봐도 흔치 않다.

‘확실히....’

드워프들 덕분에 갓 핸드의 가치를 깨달은 그리드의 기분이 한결 더 좋아졌다. 지난 5일 동안 마냥 손해만 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제시.”

경매가 시작됐다.

제법 짭짤한 돈 벌이가 될 거라고 기대하던 그리드가 이내 귀를 의심했다.

“인공 정령 한 기와 맞바꾸고 싶소!”

“한 기? 이런 날강도 같은 놈을 봤나! 나는 인공 정령 세 기를 걸겠소! 이 세 기를 완성하는데 장장 124년이 걸렸으니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보오!”

“저는 거기에 아이언 골렘 다섯 기를 얹어드리겠습니다!”

“....”

그리드는 식객 케를에게 들은 바 있다.

인공 정령을 만들기 위해선 커다란 노력과 긴 시간, 그리고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공 정령의 제작 실패 확률은 70퍼센트 이상. 드워프 한두 명의 힘으로 인공 정령을 대량 생산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한데 지금 그리드를 둘러싼 드워프의 숫자는 무려 수천 명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진 듯했던 그리드의 기분이 천상의 구름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아!’

지금이 타이밍이다.

직감적으로 느낀 그리드가 드워프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다시 작업을 개시했다.

그의 열정은 용광로 속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고 그의 동작은 드워프 장인들이 교본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로 완벽했다.

따앙! 따앙! 따앙!!

탈리마의 시간이 멈춘다.

그리드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드워프들은 자리를 지켰고 도시 전체가 적막에 잠겼다.

“아름답군....”

대장간에 푸른 달빛이 내려앉을 무렵.

구도하는 수도승처럼 가만히 앉아 그리드를 지켜보던 앙트리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아이템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완성된 아이템에 매우 강렬한 영혼이 싹텄습니다.]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에 감명 받았습니다. 당신을 본받아 어떤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으리라.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당신의 적을 처단하고 당신의 곁을 지키리라.

“....!”

드디어 원하던 결과물을 얻게 된 그리드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하지만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그의 표정에선 금세 웃음기가 사라졌고 급기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마주하자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사고가 멈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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