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60화 (1,150/1,794)

템빨 59권 - 17화

“괜찮으시오? 헉!”

“....!?”

급히 달려와 그리드를 부축하던 펠롯과 앙트리노가 흠칫 놀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드의 무장(武裝)이 바뀌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워낙 경황이 없어 눈치 채는 게 늦고 말았다.

“이것들은....”

만마전의 마귀들이다.

대장장이들의 실패작.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다.

얼굴을 붉힌 펠롯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반면 전사인 앙트리노의 태도는 달랐다. 그리드의 무장을 면밀히 관찰하더니 면갑 너머 그리드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물었다.

“9 곱하기 9는?”

“어? 뭐?”

“역시. 몸과 정신을 빼앗겼군.”

그리드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도끼를 거머쥐는 앙트리노에게 그리드가 아닌 탈리마의 수치가 버럭 소리쳤다.

-빌어먹을 난쟁이 새끼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 것이냐!! 내가 이놈의 정신을 지배했다면 그깟 곱셈 하나 못했을 것 같으냐!!

“나도 몰라서 반문한 게 아니야.”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에 당황했을 뿐이다.

굳이 사정을 설명하는 그리드를 앙트리노가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리자 피식, 탈리마의 수치가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가는 컸다.

퍽!

탈리마의 수치를 벗어 땅바닥에 내팽개친 그리드가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머리를 탈탈 털었다.

후두둑.

탈리마의 수치 위로 땀방울이 비처럼 쏟아진다.

잠시 멍하니 있던 탈리마의 수치가 뿔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건방진 놈이 감히!

탈리마의 수치가 그리드에게 꼼짝도 없이 붙잡혀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만간 해방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세상 어느 인간이 온종일 투구를 쓰고 다니겠나?

역시나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그리드가 자신을 벗어버린 덕분에 해방됐다고 믿은 탈리마의 수치가 득의양양하게 떠들어댔다.

-9 곱하기 9의 해답조차 모르는 멍청한 인간이여! 나를 구속할 방편을 마련하지도 않고 해방시키고야 말았구나! 크핫! 크하핫!! 역시 우매한 놈이로다! 네놈은 사형이다! 모든 무구의 정점인 나를 신처럼 떠받들기는커녕 오물을 끼얹은 대가를 죽음으로 갚아라!!

‘신화급 에고 아이템은 과연 다르네.’

오만방자함이 어지간한 네임드 NPC의 뺨따구를 후려친다.

수백 년 동안 축적 된 악명을 양분삼아 최고 등급에 도달한 성장형 아이템, 탈리마의 수치.

그리드는 만마전의 지배자로 군림해온 이 녀석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가 알고 있는 에고 아이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공지능을 갖춘 이야루그트보다 격이 높은 인공지능이 탑재된 것은 물론이고 최고의 성능까지 겸비했으니 좋을 수밖에 없다.

그리드는 여제의 빈자리를 탈리마의 수치가 채워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혀어엉!!

“아직 주제 파악이 안 되는군.”

플레이어에게는 ‘소유’라는 개념이 있다.

탈리마의 수치가 그리드에게 착용된 시점부터 그것은 이미 그리드의 재산이 됐다.

개연성을 핑계로 시스템이 강제하지 않는 한, 그리드가 스스로 소유권을 포기하거나 죽어 드롭하지 않는 이상 탈리마의 수치는 그리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단 뜻이다.

“들어가.”

갓 핸드를 다룬 세월이 10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드가 에고 아이템을 다루는 솜씨는 단연코 일류였다.

-....!?

붕 떠올라 그리드를 뿔로 찌르려던 탈리마의 수치가 그리드의 인벤토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끄러운 놈을 손도 대지 않고 처리한 그리드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교육이 필요하겠군.’

과거의 이야루그트보다 난폭한 놈이다.

지지고, 녹이고, 분해하고, 조립하고....

순수한 육체의 대화를 나누면서 성격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그 전에 명칭도 바꿔야겠어.’

탈리마의 수치가 뭐냐, 탈리마의 수치가.

이름 참 힘들다.

줄여서 탈수라고 부르는 게 편의상 맞다.

계획을 짜는 그리드의 앞으로 샬롯 왕이 다가왔다.

탈리마의 수치는 왕가의 치부.

샬롯 왕에게는 탈리마의 수치를 영원히 비밀 속에 묻어둬야 할 의무가 있었다. 탈리마의 수치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책무였다.

하지만 이 순간 샬롯 왕은 탈리마의 수치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자신의 책무를 외면한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어머니의 안부였다.

“우리 엄마는.... 여제께서는 어찌 되셨지?”

“승천하셨다.”

“그래.... 그렇군....”

샬롯 왕이 감회에 젖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기뻐하셨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본 그의 눈빛이 한층 온화해졌다.

“얼굴은 좀 어떠시던가?”

“예쁘더라. 10대 같아 보이시던데.”

“....? 아니, 표정 말이다.”

“아.... 좋았다.”

“따로 남기신 말씀은 없나?”

“브라함의 얼굴을 만져보지 못한 게 한이라더군.”

“....”

샬롯 왕의 머리가 잠시 굳었다. 자식의 안부를 묻는 것까진 기대하지 않았다만 굳이 생뚱맞은 이름이 튀어나올 이유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브라함이 ‘그 브라함’임을 눈치 챈 그가 이마를 덮었다.

“여전하시군.”

파그마의 외견에 넘어가 끔찍한 최후를 겪어놓고도 성격이 변치 않으셨는가.

본래 드워프가 아름다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족속이라지만 어머니의 심미관은 도를 넘어선 정도다.

어린 시절의 샬롯 왕은 그런 어머니를 원망했다. 어머니의 눈을 멀게 만든 파그마를 증오하며 독살까지 시도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와 닿았다.

어쩌면 어머니야말로 가장 드워프다운 드워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존경은 못하겠다만.’

씁쓸하게 웃은 샬롯 왕이 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그리드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짐이 당신을 오해했다.”

샬롯 왕이 그리드에게 적대감을 품은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것으로 모자라 영혼을 구속해버린 파그마의 후예.

그를 경계하고, 의심하고, 혐오하는 게 당연했다.

솔직히 말해서 샬롯 왕은 그리드에게 다른 꿍꿍이속이 있다고 믿었었다. 만마전을 약탈하려는 수작으로 여제의 영혼을 미끼삼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사악한 파그마 놈의 후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마전의 출입을 허락한 것은, 그리드가 만마전에서 살아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약속대로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켰다.

정직하고 유능한 자다.

“템빨왕 그리드.”

예복이 땅에 쓸리는 것을 개의치 않고.

“미안하고 감사하오.”

탈리마의 모든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스윽.

샬롯 왕은 그리드에게 깊이 허리 숙였다.

“그간의 결례를 용서해주시오.”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리드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샬롯 왕을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기왕지사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

영혼을 저당 잡힌 여제의 존재는 드워프들의 한이었다.

그녀의 영혼이 해방 된 오늘을 샬롯 왕은 기념일로 지정했고 드워프들은 환호하며 축제를 열었다.

앞으로 매해 이날마다 그리드의 이름이 탈리마에 울려 퍼질 것이다.

“약속대로 아이템과 교감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소.”

사자머리 펠롯이 그리드를 자신의 대장간으로 초대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샬롯 왕과 앙트리노도 동행했다는 점이다.

[전직 퀘스트 <파그마와 다른 길>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고급 에고 아이템 제작기술>을 획득하였습니다.]

[★파그마는 습득하지 못했던 대장기술입니다★]

[파그마와 다른 길을 걷고, 다른 결과를 낳은 영향으로 <자아 부여> 스킬의 정체성이 흔들립니다.]

[앞으로도 <자아 부여> 스킬의 사용을 봉인할 경우 스킬의 내용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대장장이 실력이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의 실력을 상회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알의 계약자 파그마’보단 아직 못하기 때문인가?

‘궁금하긴 하네.’

바알과 계약하기 전부터 초월자 크레이슐러와 비등하게 싸웠던 파그마이다.

그가 바알의 힘까지 등에 업어 모든 능력치가 증폭 됐을 땐 도대체 어느 정도로 강했을지 감이 안 잡힌다.

‘뮐러보다 셌나?’

브라함, 마드라보다는 분명히 한 수 위였을 거다.

브라함은 본인이 뮐러보다 못함을 인정했고, 마드라는 아직 재능을 만개하기도 전에 죽어버렸으니....

“흠....”

상념을 털어낸 그리드가 새로운 스킬의 정보를 확인했다.

<고급 에고 아이템 제작기술>Lv.1

종류:패시브

아이템 제작 시, 일정 확률로 제작 아이템과 교감하여 아이템의 혼을 일깨웁니다.

판미르의 에고 기술과는 결이 다른 듯했다.

판미르가 제작 아이템에 미약하나마 에고를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드워프 대장장이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다. 즉 대장장이 기술 자체가 드워프의 기술로 변경이 됐거나 드워프의 기술과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에고 부여술을 자연히 터득한 것이다.

반면 그리드는 본인의 대장기술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에고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일반적인 관점에선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섣불리 평가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리드의 입장에선 당연히 후자가 좋았다.

그의 실력은 드워프의 실력을 초월하고 있었으니까.

헥세타이아 신에게 인정받았을 정도이니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만마전에서 가져나온 마귀들 말이오만.”

손이 근질거리는 그리드였다. 어서 빨리 새로운 스킬의 성능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대장간을 빌려볼까 생각하는 그리드에게 샬롯 왕이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어서 챙기신 걸 텐데 가져가시오.”

마귀를 봉인해놓은 이유는 놈들이 세상에 풀렸을 때 일으킬 혼란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녀석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사죄의 의미로, 그리고 탈리마와 템빨국의 교류의 상징으로 과인이 기꺼이 내어드리겠소.”

말하지 않아도 그리드는 당연히 챙겨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심 돌려달라고 할까봐 불안하던 차였는데 잘 됐다.

그리드가 한 번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제법 특별해 보이던데 괜찮겠소?”

탈리마의 수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놈은 가져가주는 게 도리어 고마울 지경이오.”

그리드는 탈리마의 수치마저도 완전히 통제했었다.

만약 그리드가 탈리마의 수치를 쓰고 활약한다면 탈리마의 수치는 언젠가 탈리마의 자랑으로 거듭날 수도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하고 말하는 샬롯 왕 덕분에 그리드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월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템빨국과 탈리마가 동맹을 맺었습니다.]

“앞으로 탈리마를 방문할 우리 대장장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길 바라오.”

“우리도 배운다는 생각으로 돕겠소.”

본래 쉽게 맺을 줄 알았던 동맹.

예상과 달리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만큼 뿌듯하다.

흐뭇하게 미소지은 그리드가 샬롯 왕, 앙트리노와 작별한 후 펠롯의 대장간을 통째로 빌렸다.

우선 새로운 갓 핸드를 만들 계획이었다.

‘되도록 많이.’

지금 와선 갓 핸드가 꼭 4개일 필요가 없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