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16화
기사의 면갑은 고결함을 뜻하고 산양의 뿔은 악마를 상징한다.
한데 용암폭포 속의 투구는 기사의 면갑에 산양의 뿔을 붙인 모양새였다.
‘어지간히 악취미군.’
제작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리드가 투구를 관찰하는 사이, 투구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군. 네놈은 파그마의 후예인가? 내게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켜달라고 부탁할 심산이고?
“맞다.”
과연 대가리 아니, 투구라서 그런지 머리가 잘 굴러간다.
묘하게 납득한 그리드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켜줘.”
스스슥.
그리드의 곁을 맴돌던 갓 핸드들이 용암폭포를 향해서 서서히 날아갔다.
녀석들에게 둘러싸인 투구의 이름은 <탈리마의 수치>였다.
-큭큭큭, 희극이 아닌 비극이었군. 어지간히도 쪼개놨구나. 과연 파그마의 후예 아니랄까봐 인정사정없어.
“쪼개놔?”
-여제의 영혼 말이다.
4개의 갓 핸드를 훑은 탈리마의 수치의 붉은 안광이 이어서 그리드의 장비들을 차례대로 살폈다.
탈리마의 수치의 시선을 받는 아이템마다 공통점이 있었다.
파브라늄 즉, 탐욕으로 만든 아이템이라는 점이었다.
“아...!”
그리드가 이해하고 말았다.
본래 여제의 영혼은 파브라늄이라는 하나의 광물에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파브라늄은 그리드에 의해서 몇 차례나 쪼개지고 새로운 형태로 거듭나길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여제의 영혼이 무사했을까?
그럴 리 없다.
천하의 브라함조차도 영혼이 파괴됐던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여제의 영혼은 처음부터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을 거야.’
그리드가 파브라늄을 수집하기 시작했을 무렵.
그때부터 이미 파브라늄은 수십 개의 파편으로 조각난 상태였다.
그리드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여제의 영혼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는 뜻.
여제의 영혼(파브라늄)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현재 여제의 영혼의 상태는 어떻지?”
-걸레짝이지 어떻긴 뭘 어때? 거의 본능만 남은 백치다.
“....”
죄책감이 그리드를 덮쳤다.
하지만 그리드는 여제의 영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해악을 끼친 게 아니다.
애써 죄책감을 털어낸 그리드가 질문을 이어갔다.
“영혼을 치유시킬 방법은 없나?”
-영혼을 해방시키면 어차피 승천하게 될 텐데 굳이 치유시킬 필요가 있나?
“승천?”
-육신을 잃은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회수되는 게 정석이거든. 그건 무구를 육신으로 삼는 우리들 에고 또한 마찬가지고.
“영혼 스스로의 의지로 승천을 거부한다면?”
-하핫, 자의적으로 승천을 거부하는 건 괴물들이나 가능한 경지다.
다행이다.
어쨌든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그녀는 천국에 오를 것이다.
안도한 그리드가 탈리마의 수치를 재촉했다.
“그럼 어서 해방시켜줘.”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여제의 영혼이 해방되는 순간 네놈의 무구들은 평범한 고철덩어리로 전락하고 말 텐데?
아이템의 기능 자체가 저하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이 불가능한 평범한 아이템이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리드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자아를 주입하면 된다.”
이번 퀘스트만 무사히 클리어하면 에고 제작법을 습득할 수 있다.
그때부턴 탐욕으로 만드는 아이템들에 별개의 에고가 깃들 것이다. 무기에는 보다 공격적인 에고가, 방어구에는 보다 신중한 에고가.
지금보다 나빠질 건 없었다.
-새로운 자아? 큭큭, 여제의 영혼을 대체할 새로운 장난감이라도 발견했나 보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파그마와 달라.”
타인의 영혼을 물건에 가둬놓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애초에 그리드는 <자아 부여> 스킬을 꺼림칙하게 여기고 멀리해왔다.
결연한 의지가 담긴 그의 눈빛을 빤히 바라본 탈리마의 수치가 철컥! 철컥! 자신을 구속하는 쇠사슬을 요란하게 흔들어댔다.
-하하핫! 파그마의 후예가 파그마를 부정하는 거냐! 재미있구나! 뭐,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생물 출신의 영혼을 무구에 강제로 때려 박아봤자 2류에 불과하니까.
대화가 잘 통한다.
탈리마의 수치가 협조적인 태도로 나오자 내심 긴장하고 있던 그리드가 안도했다.
하지만 곧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야. 내게 널 도와줘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철컹━!
탈리마의 수치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의 길이는 생각보다 길었다. 용암폭포를 꿰뚫고 나와 절벽 위 그리드의 코앞까지 날아온 것을 보아 족히 50미터는 거뜬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다가오지 못하는 걸까.
그리드와 코끝이 닿기 직전에 멈춘 탈리마의 수치가 음침하게 속삭여왔다.
-너, 방문 하나를 열어놓고 왔더라?
철컹!!
한껏 팽창했던 쇠사슬이 수축한다.
이에 당겨진 탈리마의 수치가 다시금 용암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소리쳤다.
-나는 네놈의 몸을 지배해서 이곳을 탈출하겠다! 크큭! 크하하하핫!!
그리드는 잊지 말아야했다.
만마전에 갇힌 무구들은 모두 악귀라고 불리는 사악한 존재들.
그들을 신뢰해선 안 됐다.
오직 힘으로 억압하는 방법 외에는 그들을 통제하는 게 불가능했다.
콰르르르르릉!!
“....!”
탈리마의 수치의 태도변화에 당황하던 그리드가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장내를 울리는 굉음이 발생한다 싶더니 족히 2천 자루에 이르는 병장기가 통로를 가로질러오는 모습이 보였다.
10번 방에 있던 에고 아이템들이다.
각종 무기와 방어구, 그리고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그리드를 향해서 쇄도했다.
“이런 염병.”
하여튼 쉽게 되는 법이 없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갓 핸드를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노에와 랜디, 템빨골들을 소환했다.
“무기를 집중 공략하도록 해.”
“냐옹.”
“응!”
딱딱! 딱딱딱!
상대는 모두 에고 아이템.
착용자가 없음에도 병장기들은 스킬을 사용했고 액세서리는 마법을 날려 왔다. 갓 핸드가 무기를 다루고 매직 미사일을 쏘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
“칫!”
쏟아지는 무구의 폭격 속에서 그리드의 몸에 차츰 상처가 늘어났다.
하지만 전황은 썩 나쁘지 않았다.
웨폰 브레이커의 특성을 지닌 방어구들의 대활약 덕분이었다.
그리드를 공격하는 대부분의 무기가 그리드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역으로 부러져 용암에 녹아 사라졌다.
랜디의 활약도 대단했다.
카오스 산맥에서 레벨이 크게 오른 랜디는 이제 그리드의 스탯을 50퍼센트까지 복제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하이랭커를 웃도는 공격력으로 무기들의 내구력을 빠르게 손상시켜나갔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탈리마의 수치가 버럭 외쳤다.
-나는 드워프들의 염원! 모든 무구의 정점! 내가 명하노니 영혼 없는 인형들은 물러날지다!!
“....!?”
그리드와 랜디가 흠칫 놀랐다.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이 멋대로 착용 해제되고 있었다.
‘광범위 무장 해제 스킬이라고?’
탈리마의 수치의 권능에 감탄을 넘어서 경악하는 그리드의 맨 몸 위로,
철컥! 철컥철컥!
갑옷과 각반, 장갑과 부츠, 그리고 온갖 장신구와 망토가 제멋대로 달라붙어 착용됐다.
에고 아이템들의 목적은 단순했다.
자신들의 의지로 그리드의 육체를 움직이는 것.
즉, 지배하는 것이다.
채앵!!
마침 탈리마의 수치를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들이 끊어지고 있었다.
절세의 에고 소드들이 쇠사슬을 베어버린 결과였다.
-큭큭....! 크하하핫!! 이 지긋지긋한 감옥을 드디어 탈출하는구나!!
콰르릉!!
용암을 떨쳐낸 탈리마의 수치가 가속했다.
그리고 신체의 지배권을 빼앗긴 채 허우적거리는 그리드의 머리통을 노리고 날아가 안착했다.
철컥!
그리드의 머리 위로 탈리마의 수치가 씌워진다.
산양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뿔이 붉은 휘광을 흩뿌렸다.
-이제 네놈의 몸과 정신은 나의 것...?
수백 년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손에 넣은 인간의 육신.
기쁨에 전율하며 대소를 터뜨리던 탈리마의 수치가 거짓말처럼 웃음을 그쳤다.
웃음이 나올 리가 없다.
-이, 이게 무슨?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한 감각.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당황한 탈리마의 수치가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부질없었다.
녀석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앞서 그리드에게 착용 된 다른 에고 아이템들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리드의 시야엔 알림창이 갱신되고 있었다.
[직업 효과로 <파멸의 갑옷>을 착용하였습니다.]
[직업 효과로 <환멸의 각반>을 착용하였습니다.]
[직업 효과로 <콰트로의 장갑>을 착용하였습니다.]
[직업 효과로 <오목눈이 반지>를 착용하였습니다.]
[직업 효과로 <달의 목걸이>를....]
[직업 효과로....]
....
...
[직업 효과로 <탈리마의 수치>를 착용하였습니다.]
“....뭐하냐?”
-이, 이런 미친!
드워프는 오만하다.
본인들의 작품이 최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를 증명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것.
모든 드워프의 염원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드워프 왕가는 이를 실천했다.
작품이란 혼자서 만드는 것이다, 라는 드워프의 불문율을 깨고 하나의 작품을 대물림하면서 만들어나갔다.
처음엔 검이었다.
2대가 일생을 바치자 걸작이 탄생했다.
다음은 방패였다.
3대가 일생을 바치자 대작이 탄생했다.
다음은 투구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명작을 탄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5대가 일생을 바쳤고 괴물이 탄생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관념과 욕심이 주입된 결과였다.
왕가가 무려 5대에 걸쳐서 완성시킨 결과물이 추악하기 이를 데 없자 왕가는 이를 수치로 여기고 만마전에 봉인해버렸다.
하지만 이 순간 봉인이 풀려버렸다.
‘모든 아이템을 조건 없이 착용한다.’는 그리드의 직업 특성에 의해서 말이다.
-벗어! 나를 어서 벗어라!!
지배해야할 인간에게 도리어 지배당하다니?
탈리마의 수치가 발악했지만 부질없었다.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켜라.”
-노, 노옴....! 내가 네놈 따위의 말을 들을 것 같....!
“쓸데없는 저항이다.”
탈리마의 수치는 이제 그리드의 것이다.
탈리마의 수치가 아무리 거부해봤자 무의미하다는 뜻.
그리드는 탈리마의 수치에 귀속 된 고유 스킬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했다.
“영혼 제어.”
‘물질에 깃든 영혼’을 통제하는 힘.
드워프 왕가의 욕망이 빚어낸 그 힘에 의해서 갓 핸드와 모든 탐욕에 깃든 여제의 영혼 조각들이 세상 밖으로 끄집어졌다.
쏴아아아아아....
쏟아져 나온 빛의 파편들이 하나로 결집되기 시작한다.
이내 귀여운 드워프 소녀의 형상을 갖춘 그것에게 그리드가 씁쓸한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동안 감사했다.”
작별의 시간이다.
***
‘지금쯤 끝났겠군.’
탈리마 인근에 트라우카가 둥지를 틀기 전.
드워프는 만마전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라고 믿었었다.
용암의 열기와 에고들의 유혹, 그리고 탈리마의 수치라는 괴물의 존재....
<낙인>을 통해 에고를 억누를 수 있는 드워프 왕족이 아닌 이상 만마전에 들어가 봤자 개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샬롯 왕은 만마전에 들어간 그리드가 벌써 2시간째 소식이 없자 당연히 죽었으리라고 여겼다.
“봉인진으로 이동하겠소.”
봉인진.
만마전에서 죽은 이의 시신과 영혼을 일시적으로 묶어두는 공간.
플레이어들의 ‘부활 포인트’와 일정 부분 닮은 그곳으로 샬롯 왕과 드워프들이 이동했다.
그들은 곧 나타날 그리드의 주검을 기다렸다.
펠롯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고 앙트리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드의 죽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한데 좀 묘했다.
“....?”
“....?”
1시간, 2시간, 3시간.... 심지어 반나절이 지나도 그리드의 주검이 나타나질 않았다.
급기야 밤이 찾아오자 당황한 샬롯 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봉인진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아직 살아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럼 봉인진이 망가진 건가?’
더더욱 그럴 리 없다.
봉인진은 마법공학의 정수다.
“이 무슨....”
드워프들의 혼란이 커질 때였다.
콰르르르르릉!!
만마전의 출입구가 있는 곳으로부터 소음이 들려왔다.
태산이 무너진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굉음.
만마전의 출입구가 열렸다는 소식이다.
“....!”
설마 살아서 돌아왔다고?
정말로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키기라도 했다는 건가?
‘도대체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무슨 수로 만마전의 괴물을 설득한 거지?
넋이 나간 샬롯 왕이 체통조차 잊고 만마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온 백성들과 함께 목격하고 말았다.
괴물을 머리에 뒤집어 쓴 그리드의 모습을 말이다.
“허억.... 허억.... 개무거워.”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그리드를 펠롯과 앙트리노가 달려가 부축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