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15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눈치 챘겠지만, 드워프의 종족 특성은 근력과 손재주가 전부가 아니다.
죽음마저 초월하는 집념.
바로 그 집념이야말로 드워프의 진정한 저력이었고 작품과의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본인의 작품이 불멸의 명작으로 남길 바라는 집념이 염원을 이루어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 것이다.
에고 웨폰이 고결함의 상징이었던 이유다.
오직 최고만을 꿈꾸는 에고 웨폰의 습성은 우뚝 선 거목처럼 올곧았으니 주인 되는 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왔다. 한때 세상은 에고 웨폰과 그것의 주인을 신성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머잖아 세상은 알게 됐다.
소위 <마검>이라고 분류되는 사악한 무구들 또한 에고를 지녔다는 사실을 말이다.
키아아아아아━!
“....!”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만마전의 입구가 열리고 드러난 깊은 통로로부터 짐승의 비명 같은 것이 들려온 까닭이다. 소름끼치도록 날카롭고 사악한 소리였다. 차라리 대악마의 비명이 더 듣기 편할 정도.
‘....바람 소리였나?’
후웅. 후웅.
어둠 속에 메아리치는 바람의 울림을 그리드가 재차 확인할 때였다.
“인간의 성격이 모두 다르듯이 에고의 성격 또한 모두 다르다.”
그리드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앙트리노가 입을 열었다.
복잡하게 땋은 수염을 매만지는 그의 손 역시 다른 드워프 장인들의 손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이 세계에서 섬섬옥수라는 표현은 오직 드워프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제작자가 어떤 마음을 품고 광물을 제련하는가. 제작자가 어떤 목적을 담아 광물을 단련하는가에 따라서 올곧고 정의로운 에고가 탄생하기도, 악의와 살심을 품은 에고들이 탄생하기도 했지. 여기서 후자의 경우를 우리는 마귀라 칭했고 이곳 만마전에 봉인해왔다.”
“....”
그리드는 <통한의 가시>를 떠올렸다.
본래 통한의 가시는 흔히 볼 수 있는 한 자루의 프람베르그에 불과했다.
하지만 제작자 그리드에게 방치당한 채 대장간 한편을 쓸쓸하게 장식했던 녀석은 그리드에게 점차 원한을 품었고,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인 이벨린의 피를 매개로 각성해 자아를 깨웠다.
그리드를 향해서 원한을 불태우는 놈의 자아란 무척 흉포한 것이었다.
이곳 만마전에 봉인돼 있다는 마귀들 또한 놈처럼 각자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슬금슬금.
드워프 전사들이 그리드를 천천히 포위해왔다.
일족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만마전이 외부인에게 노출되게 생기자 영 꺼려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들을 물린 건 의외로 샬롯 왕이었다.
“모두 비켜서라!”
눈에 핏대를 세운 샬롯 왕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처럼 하얀 턱수염이 그대로 녹아내릴 기세다.
“약속은 약속이다! 저자가 만마전의 문을 열었으니 만마전의 출입을 허하노라!”
이는 호의 따위가 아니었다.
샬롯 왕은 역전을 꾀하고 있었다.
“단, 파그마의 후예여.”
“뭐지?”
“짐이 그대에게 만마전의 출입을 윤허한 것은 그대가 여제의 영혼을 해방하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여제의 영혼을 해방하지 않고 다른 수작을 부린다면 짐은 그대를 정당하게 징벌할 것이다. 또한 그대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여제의 영혼을 기필코 돌려받겠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하니 너 또한 약속을 지켜야한다.
이와 같은 명분을 앞세우는 샬롯 왕에 의해서 그리드는 퇴로를 잃었다.
만약 여제의 영혼을 해방하지 못했다간 목숨이 위험할뿐더러 탈리마와의 교류가 요원해질 것이었다.
‘잔머리 굴리기는.’
여느 드워프처럼 주변을 살피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놓는 수가 좋다.
적으로 두면 참 피곤할 스타일이다.
‘....대신 같은 편이 되면 든든하겠지만.’
그리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어차피 처음부터 엎질러진 물이었다.
갓 핸드의 자아가 드워프 여제의 자아였다는 시점부터 탈리마와의 관계는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을 되 담을 기회가 찾아왔다.
작금의 상황을 굳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좋다. 다만 당신도 한 가지 약속해줘야겠어.”
“뭐지?”
“내가 여제의 혼을 해방하면 여태까지의 모든 무례를 사죄해라.”
“....알겠다.”
샬롯 왕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 또한 그리드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핵세타이아 신에게까지 실력을 인정받은 대장장이....
염룡 트라우카에 의한 고립이 무색하게도 희미하게나마 들려온 그리드의 명성을, 샬롯 왕 또한 똑똑히 들었었다.
그가 진짜로 여제의 혼을 해방시킴으로써 파그마와 자신이 별개임을 증명해 보인다면 대우를 해줌이 옳았다.
‘하지만 만마전의 포식자가 과연 너를 도와줄까?’
만마전의 가장 끝에 던져진 괴물이 있다.
다른 에고를 모조리 먹어치우고 부정을 키우는 포식자가.
자신이 소화할 수 없는 에고는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는 영리한 놈인지라 여제의 영혼에 간섭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놈에게 여제의 영혼을 끄집어내라고 강제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왕가의 혈통뿐이다.
‘아쉽지만 네겐 파그마의 업을 짊어질 의무가 있다. 파그마를 대신해서 나락으로 떨어져라. 너의 희생이 동포들의 한을 풀리라.’
힐끔.
샬롯 왕이 사자머리 펠롯에게 눈짓하자 펠롯이 그리드에게 설명해주었다.
“만마전의 통로를 따라 걸으면 총 10개의 방이 나올 것이오. 방마다 갇혀있는 수천 개의 무구들이 온갖 방법으로 당신을 유혹하려들 테지만 무시하고 오직 앞만 보고 전진하시오. 복도의 끝에 있는 존재가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켜줄 것이오.”
말이야 쉽다.
하지만 아무나 쉽게 하지 못할 일이라는 게 문제다.
드워프야 남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것이 기본 패시브기 때문에 무구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귀가 얇은 족속 아닌가. 심지어 욕심도 많아 수천 개의 에고가 제안하는 온갖 유혹을 쉽게 넘겨듣지 못할 것이다.
‘부디 덜 악독한 놈들에게 걸리길 기도할 뿐.’
그리드에게 높은 호감을 품게 된 펠롯은 그리드를 믿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부디 그리드가 여제의 혼을 해방시켜주길 바랐다. 그래서 기회를 준 것이지만 솔직히 결과는 기대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펠롯의 태도를 통해서 만마전이 만만치 않은 곳임을 눈치 챈 그리드가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탈리마의 모든 드워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허리를 굽혀 만마전에 입장했다.
***
[플레이어 최초로 <만마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최초 발견 보상으로 만마전 입장 기간 동안 화염 내성이 50퍼센트 상승합니다.]
[최초 발견 보상으로 만마전 입장 기간 동안 정신 공격 내성이 50퍼센트 상승합니다.]
[최초 발견 보상으로 <아이템 무게 삭제권(1시간)>을 획득하였습니다.]
다소 생뚱맞은 보상 내역.
보통의 최초 보상과 비교하면 매우 초라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 이유가 있겠지.’
역시나.
[지하에 들끓는 용암의 열기가 당신의 살갗을 태우기 시작합니다.]
30분쯤 걸었을까?
언젠가부터 바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싶더니 열기가 덮쳐왔다.
하지만 전설의 대장장이인 그리드에게 이 정도 열기는 초급자용 사우나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어이! 거기 너! 램스 해적단의 보물이 묻힌 섬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돈 많아.”
-내게 마력을 불어넣어라! 그럼 네게 최고의 마법을 가르쳐주겠다!!
“네가 브라함보다 마법 잘 쓰냐?”
-나를 목에 걸고 다니면 이성을 유혹할 수 있다고?
“유부다.”
그리드는 방마다 갇혀 있는 에고 아이템들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에고 아이템들이 제시하는 유혹의 수준이 그를 상대로는 너무 낮았다.
부와 권력, 그리고 무력과 인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아쉬울 게 없는 그리드였으니 당연했다.
‘정신 내성 버프도 필요 없었겠군.’
솔직히 많이 긴장했었는데 별거 아닌 것 같다.
안심하며 계속 걷던 그리드는 어느새 10번째 방문의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10번째 방문에서 들려오는 수천 개의 목소리 중 하나가 그리드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한데 어딘지 익숙하다.
‘이게 무슨 말이었지?’
그리드가 정신을 집중했다.
다른 수천 개의 잡다한 목소리들은 모조리 무시하고 도무지 해석 불가능한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이런 해괴한 언어를 도대체 어디서 들었던 건지 기억을 되짚어봤다.
그러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고독 속에 미쳐갔던 어느 누군가의 일기장.
바로 무패왕의 일기장을 떠올린 것이다.
그렇다.
이 언어는 홀로 수백 년을 존재한 끝에 인간의 말을 잃었던 마드라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강제로 데스나이트가 됐던 마드라가 미쳐버린 시기에 휘갈겨 쓴 일기장의 내용을 그리드는 일종의 절규라고 해석했었다. 끝끝내 인간의 말까지 잊어 머릿속을 지배하는 온갖 고통을 비명처럼 휘갈긴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은 언어였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언어.
쿵!
녹슨 철문.
더 이상 해독이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던 일기장의 힌트를 코앞에 둔 그리드가 흥분해서 그것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굳건히 잠긴 철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리드가 여태까지 지나온 다른 방문들 너머에선 온갖 비웃음이 들려왔다.
-어차피 문도 못 여는 녀석이었잖아?
-거봐. 내가 드워프 치곤 보폭이 크다고 했잖아.
-기껏 찾아온 놈이 전혀 쓸모없는 놈이었군.
끊이지 않는 비웃음 속에서.
찰랑.
그리드가 열쇠를 꺼냈다.
만능 열쇠였다.
철컥!
낡은 자물쇠.
열쇠구멍이 심하게 훼손돼 결코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커다란 자물쇠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풀렸다.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구!
-끼얏호! 나를 쥐어라, 인간! 네가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
10번째 방에 갇혀있던 무구들이 신나서 떠들어댔다.
놈들은 침입자의 방문을 격하게 환영했다. 침입자를 숙주로 삼아서 이곳을 탈출할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
그리드는 여전히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조금 전 들었던 언어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순백의 오브였다.
-(%!#[email protected]~!
“....”
가까이서 들으니 더욱 더 명확해진다.
오브의 외침은 일기장 회상 장면에서 등장했던 무패왕의 절규를 꼭 빼닮아있었다.
이건, 언어다.
확신을 품은 그리드가 손을 뻗어 오브를 손에 쥐었다.
[<갈구노스의 뼈로 만든 오브>를 선택하였습니다.]
[email protected]$#@$!!
[<갈구노스의 뼈로 만든 오브>가 코웃음 칩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갈구노스뿐이라고 말합니다.]
[<갈구노스의 뼈로 만든 오브>가 당신에게 저주를 겁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파그마의 후예>의 클래스 효과로 <갈구노스의 뼈로 만든 오브>를 착용하였습니다.]
[<갈구노스의 뼈로 만든 오브>의 소유권을 획득하였습니다.]
[email protected]#$$?!
[<갈구노스의 뼈로 만든 오브>에 <드워프의 낙인>이 찍혀있습니다. 드워프의 낙인 효과로 무게 게이지가 최대치가 됩니다. 모든 속도가 대폭 감소합니다. 더 이상 아이템을 소지할 수 없습니다.]
“역시, 다 쓸모가 있었어.”
그리드는 10개의 방을 모두 지나왔고 그중 그리드의 흥미를 끄는 아이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템 무게 삭제권을 꺼낸 그리드가 그것을 미련 없이 사용했다.
‘스틱세이에게 가져가보자.’
스틱세이는 대현자다. 지식의 축복을 받는 그라면 이 녀석과의 대화를 통해서 언어를 분석하고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믿어 의심치 않은 그리드가 가벼운 걸음으로 10번째 방을 떠났다. 그리고 한참을 더 걸은 끝에 드디어 만마전의 종착지에 이르렀다.
용암이 흐르는 절벽이 보였다.
절벽 아래엔 쇠사슬로 꽁꽁 묶인 투구 하나가 있었다.
얼굴 전체를 덮는 형태의 투구였는데 용암 속에서도 녹아내리지 않았고 입 모양은 웃고 있었다.
-하핫! 하하핫!! 여제의 영혼을 인간이 가져왔다고? 이건 또 무슨 희극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