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14화
“큭큭....! 크하하하핫!!”
괴력난신(怪力亂神).
당대의 인간들에겐 매우 생소한 낱말일 것이다.
하지만 불과 300년 전까지만 해도 괴력난신 앙트리노의 위명은 대단했다.
4등신의 신체에 응집 된 용력으로 거력을 발휘했던 앙트리노는 드워프라는 종족의 버팀목이 되는 최강의 전사였다. 오직 그가 있기에 드워프의 부(富)가 지켜질 수 있었다.
뮐러가 말년에 끼적이다 관뒀던 <미완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부딪치는 검마다 모조리 부러지니 난처했다.’라는 문장 속 상대방의 정체 또한 바로 앙트리노였다.
적어도 힘에서만큼은 전대 전설들과도 견줬던 인물이 앙트리노인 것이다.
여전히 활력을 유지하여 새카만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그의 입장에선 그리드가 애송이에 불과했다. 파그마보단 낫지만 앙트리노 생애 만나봤던 다른 전설들과 비교하면 몇 수나 아래라는 느낌이 강했다.
‘아니, 파그마보다 낫다고 말하기도 뭣하군.’
파그마는 비록 비리비리 했다지만 여러 개의 검무를 융합하여 큰 위력을 발휘하는 기염을 토하곤 했었다.
반면 그리드는 신체와 근력이 제법 탄탄한 반면 융합 검무를 쓰지 못하는 눈치였다.
힘이야 파그마를 앞선다고 해도 기술적인 측면까지 고려하면 종합적인 실력이 파그마보다 아래인 셈이다.
심기체조차 완성하지 못한 애송이의 치기가 가여운 나머지 실소를 터뜨린 앙트리노가 휙휙 손을 휘저었다.
“네 자격의 확인은 이미 끝났다. 너는 내 힘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런 나의 힘조차 만마전의 문을 열지 못한다. 너는 결코 만마전에 입장할 수 없다.”
“굳이 혀를 놀릴 필요가 있나? 길고 짧은 건 대봐야한다는 말도 몰라? 아, 길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다.
그리드의 도발적인 눈빛과 말투가 앙트리노의 흥미를 끌었다.
“겁이 없군. 설마 네놈.... 명색이 파그마의 후예라는 녀석이 나를 모르는 거냐?”
“파그마의 후예라고 해봤자 기술만 계승했거든. 파그마도 제대로 모르는 마당에 네가 파그마와 어떤 관계였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
“큭큭, 그래서 기고만장한 거였구나.”
어깨를 으쓱인 앙트리노가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드에게도 익숙한 서적이었다.
광물 사전.
대장장이로 전직한 이후 자연히 얻은 카테고리다.
플레이어는 그것을 타인에게 공개하거나 공유할 수 없지만 NPC는 다른 듯했다.
촤르륵.
앙트리노가 광물 사전을 활짝 펼쳤다. 그가 평생토록 축적해온 광물에 대한 지식은 그리드보다 무려 2배 이상 많았다.
전사인데 광물 서적을 얻은 것으로 모자라 이정도 지식의 축적량이라니....
‘광부나 대장장이가 세컨드 클래스인 건가?’
그리드는 세컨드 클래스가 플레이어 고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연하다.
파그마부터가 전설의 대장장이임과 동시에 바알의 계약자 아니었던가.
네임드 NPC 중에는 2개 이상의 직업군을 지닌 존재가 많을 거라는 게 그리드의 추측이었고 그건 사실이었다.
[새로운 광물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새로운 광물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새로운 광물 지식을....]
[새로운 광물....]
....
...
기연이라면 기연일까.
앙트리노의 광물 사전을 엿본 대가로 그리드는 전보다 2배에 이르는 컬렉션을 달성했다.
본래 절반 이상이 공백으로 남았던 서적의 빈 페이지가 거의 다 채워졌고 이제 빈 페이지는 채 10퍼센트가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앙트리노는 속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설의 대장장이인 너라면 광물에 대한 지식이 나보다 해박하겠지. 당연히 레지스톤도 알고 있을 테고.”
본인이 쌓아온 세월의 힘을 모르는 건가.
앙트리노에게 과대평가를 받은 그리드가 약간의 민망함을 느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금 전 새롭게 추가 된 광물 정보에서 레지스톤의 정보를 열람했다.
<레지스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돌입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은 손톱 크기의 레지스톤을 드는 게 한계입니다.
‘거지같은 광물일세.’
중량은 경도와 직결되기도 한다. 그만큼 밀집도가 높다는 뜻이니까.
손톱 크기가 최소 60~80킬로그램 이상이라면.... 레지스톤으로 어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아무리 망치로 후드려 패봤자 형태가 변하지 않겠지.
‘그나마 나정도 돼야 몇 달에 걸쳐서 이걸 제련할 수 있지 않을까?’
장인급 대장장이들은 몇 년, 아니 어쩌면 수십 년이 걸릴 테고.
잠시 상념에 빠진 그리드의 귓전에 앙트리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이지 목청 한 번 크다.
“만마전의 문이 바로 그 레지스톤으로 만들어졌다.”
“....”
“어때? 나조차도 열지 못한다는 이유가 이제야 실감이 되나?”
“흐음....”
확실히.
설령 문의 크기가 ‘드워프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에 그친다고 해도 수천 톤에 이를 테니 물리적인 힘으로 열어젖힌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월야철로 만든 라드볼프 공방의 문과는 다른 느낌의 시련.
긴장할 법도 하건만, 그리드의 표정은 태연했다.
“당신이 못 연다고 해서 내가 못 열라는 법은 없지.”
“끝까지 미친 헛소리군.”
질린다는 반응을 보인 앙트리노가 샬롯 왕에게 물었다.
“전하, 이자를 만마전으로 안내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갓 핸드로부터 여제의 영혼을 해방하기 위해선 그리드 본인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 중인 상황이다.
앙트리노가 기억하는 여제의 성격을 고려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주장이기도 했다.
샬롯 왕은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역시나.
“짐이 직접 행하면 간단할 일을 굳이 외부인에게 맡길 필요가 있겠소? 저자가 여제를 짐에게 넘기면 짐이 어련히 해결할 것을 도대체 무슨 고집인 줄 모르겠소.”
“망신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는 성격인 듯합니다.”
“흠....”
샬롯 왕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망신이라는 단어가 그를 유혹했다.
씨익, 이내 큰 미소를 그린 샬롯 왕이 소리쳤다.
“모든 백성을 만마전 앞으로 소환하라! 탈리마의 백성이라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어명을 받들어야할 것이다!”
“충!”
경례한 전사들이 왕궁을 떠나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샬롯 왕의 의도를 읽은 앙트리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사자머리 펠롯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왕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부모의 원수와 관련 된 자.
당연히 지옥으로 인도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복수에 온 백성을 이용하다니, 하나의 겨레를 이끄는 존재치고 다소 편협한 거 아닌가?
살아생전 여제께서 평가하셨듯이 샬롯은 그릇이 작다.
아직 100살이 채 안 된 그의 자식들만큼은 훌륭하게 성장해주길 바라야할 노릇이다.
물론 죽음을 초월해야만 왕의 자격을 얻을 테고, 11명의 왕자와 왕녀 중 죽음을 초월할 재목은 불과 두셋에 불과할 테지만 말이다.
“만마전으로 가자.”
샬롯 왕이 그리드를 인도하고 있었다.
***
‘과연.’
왕궁 깊숙이 자리 잡은 만마전의 입구는 그리드의 예상과 꼭 닮아있었다.
드워프 1명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크기였고, 그리드가 통과하려면 허리를 반쯤 접어야 가능해 보였다.
“자, 그럼.”
거대한 동공.
만마전의 입구가 있는 그곳에 가득 찬 인파를 쭉 둘러 본 샬롯 왕이 소리쳤다. 파그마의 후예가 망신당하는 꼴을 어서 빨리 지켜보고 싶은 그의 입장에선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우리 일족의 원수인 파그마의 후예가 만마전에 입장하겠다고 하니 우리는 이를 지켜보도록 한다.”
“우우우!”
곳곳에서 야유가 빗발쳤다.
그리드를 직접 만났던 드워프들을 제외하면 아무래도 상당수의 드워프들이 그리드를 의심하고 혐오하고 있었다.
철천지원수의 계승자이니 당연하다.
‘빌어먹을 파그마.’
존경하긴 한다만, 매번 일을 꼬이게 만드는 업보들은 원망스럽다.
불쾌한 야유에 쯧, 혀를 찬 그리드가 만마전의 출입문 위로 손을 얹어보았다.
엄청난 무게감이 느껴졌다.
죽을힘을 다해 밀어도 이 문은 꼼짝도 안 할 것이라는, 그런 확신이 단번에 생길 지경이었다.
“후우.”
그리드가 호흡을 고르자 샬롯 왕을 비롯한 드워프들이 히죽히죽 웃었다.
원수의 계승자가 만마전에 압도당하는 꼴을 보니 깨를 먹은 것처럼 고소했던 것이다.
“왕족의 혈통이 아니면 열 수 없는 문을 파그마의 후예 따위가 도전한다는 것도 웃기군.”
“파그마를 닮아서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거지. 퉤, 재수 없으려니.”
“어서.... 어서 놈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드워프들의 기대감이 한층 고조됐다.
그야말로 적지 한가운데 서게 된 그리드는 따가운 눈총 속에서 탐식의 룬을 개방하고 있었다.
‘탐식의 룬 개방.’
이런 상황에서 꺼낼 패는 당연히 하나다.
최근 새롭게 얻은 살레오스의 힘을 꺼내려던 그리드가 멈칫했다.
파닥파닥!
네 개의 갓 핸드가 그리드의 눈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손을 자꾸 휘젓는 꼴을 보아하니 만마전에 출입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눈치였다.
샬롯 왕이 격노했다.
“파렴치한 놈...! 짐의 엄마....마마를 이용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이더냐!!”
나이가 몇인데 자꾸 엄마, 엄마 거리는 거야?
아직 어린 로드보다 더한 마마보이다.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일부러 소리 내서 갓 핸드에게 명령했다.
“비켜있어.”
“.....”
연신 손을 휘젓던 갓 핸드가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잠자코 서있는가 싶더니 그리드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우로 물러났다.
그리드가 룬에서 능력을 꺼냈다.
‘패배를 모르는 힘.’
<패배를 모르는 힘>
잠재력을 넘어서는 힘을 얻습니다.
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합니다.
시전 후 다음 행동이 근력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단, 3위 이상의 대악마와 드래곤, 그리고 절대자와 신을 상대로는 이기지 못하고 비깁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12시간
스킬 자원 소모:없음
턱.
그리드의 커다란 손이 만마전의 출입문에 닿는다.
레지스톤의 무게감이 그리드의 손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드는 거대한 중력마저 느꼈다.
만마전을 밀치는 순간 세계로부터 거부당하는 기분이었다.
“하하핫! 저 녀석이 정말로 도전하는군!”
“우우! 우우우우!!”
드워프들의 비난과 야유가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
쿠궁. 쿠구구구구구궁!!
그리드가 만마전의 입구를 활짝 열어젖혔다.
“....!”
“....!”
“....!”
샬롯 왕, 괴력난신 앙트리노, 사자머리 펠롯을 포함한 모든 드워프들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당장 두 눈알들이 튀어나올 기세였다.
그들을 힐끗 돌아본 그리드가 표표히 웃었다.
“쉬운데?”
드워프들은 고작 이 정도도 못하느냐고 한 마디 덧붙여 주고 싶었지만, 드워프와의 화친을 위해선 적당히 선을 지켜야하는 그리드였다.
드워프 전체를 도발하는 일은 삼간 그리드가 샬롯 왕을 저격했다.
“여제의 혈통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고작 이 정도도 못하는 무능한 작자였나? 여제가 당신을 괜히 거부하는 게 아니었군.”
만마전이 탄생한 이래 외부인에게 모습을 공개한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다.
만마전은 오직 드워프 왕족의 권리였다.
한데 이 순간 그리드가 드워프 왕족을 부정해버린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드워프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특히 앙트리노는 입가에 큰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보다 찬탄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