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156화 (1,146/1,794)

템빨 59권 - 13화

“.....”

파브라늄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그리드는 파브라늄에게 감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단지 주인에게 복종할 뿐인 파브라늄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본능에 의거한 것. 일종의 시스템에 불과하므로 파브라늄을 기계쯤으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바뀌었다.

자신을 껴안는 드워프 왕을 밀쳐내고 중지를 세우는 갓 핸드의 행동에는 명확한 감정이 담겨있었으니까.

‘적을 향해서도 종종 손가락을 까닥이거나 엿을 날렸었지....’

그 도발적인 행동들이 우연 따위가 아닌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줄이야.

혀를 내두르는 그리드의 곁으로 다가온 갓 핸드가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았다.

평소와 달리 빠르게, 더 빠르게 회전하며 그리드의 정신을 사납게 만들었다.

마치 어서 이곳을 떠나자고 보채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 엄마.... 아니, 어마마마.”

갓 핸드에게 밀쳐지고 엉덩방아를 찧은 드워프 왕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넘어진 충격으로 머리에서 왕관을 떨구고 산발이 된 그는 작금의 상황을 믿기 싫은 눈치였다.

“소자를.... 소자를 잊으신 겁니까?”

드워프 왕의 질문이 허공에 흩어졌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갓 핸드는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분위기가 영 꺼림칙해서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그리드에게 드워프 왕이 눈을 부라렸다.

드워프와 교류하고 싶은 그리드의 입장에선 썩 달갑지 않은 적의가 느껴졌다.

“그대가 바로 소문의 그리드인가? 파그마의 후예이면서 대장장이 신의 인정을 받았다는?”

“맞소. 그리고 템빨국의 왕이기도 하지.”

같은 왕이니 예의를 갖추라는 뜻이 담긴 소개였다.

하지만 드워프 왕은 콧방귀 뀔 뿐이었다.

“그대의 신분 따위엔 관심 없다!”

샤를.

번쩍이는 황금색의 이름을 자랑하는 드워프 왕이 소리쳤다.

“당장 짐의 어머니를 내놓아라! 그래야만 그대는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파그마는 메리벨 여제를 시해한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영혼을 광물에 가둬버린 악마.

탈리마 최대의 원수였다.

샤를 입장에선 부모의 원수이기도 했다.

탈리마 외부의 드워프들은 신에게 인정받았다는 파그마의 후예의 실력을 존경하고 호감을 품을지 모르나 탈리마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염룡 트라우카보다 파그마의 후예를 더욱 증오할 정도였다.

쾅!

샤를의 외침이 곧 신호였다.

월부(鉞斧)를 무장한 드워프족 전사들이 대전의 문을 박차고 나타나 우르르 몰려왔다.

황금색 갑주를 무장한 그들의 행색은 여느 왕실 근위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했지만 도끼를 무기로 쓴다는 점이 특이했다. 검을 쓰는 보통의 왕실 근위대와 비교해서 격식은 다소 떨어지는 반면 훨씬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치렁치렁 늘어진 턱수염과 사나운 인상까지 보태면 산적 떼를 연상시켰다.

‘수준이 짐작이 안 되는군.’

드워프족 전사는 희귀하다.

무력보다 노동을 숭상하는 드워프족의 특성상 전사가 되는 드워프는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채 안 된다고 들었다. 하물며 외부 활동을 안 하고 오직 드워프 왕궁만을 수호했으므로 드워프 전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했다.

뭐, 어쨌든 크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

그리드에겐 싸울 생각 자체가 없었기에.

애초에 그리드는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킬 계획이었다.

드워프와 교류해서 여러 기술을 배우고 템빨국 대장장이들을 유학 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은 그리드의 입장에서 여제의 영혼에 집착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애초에 찝찝해서 못 써.’

그리드는 갓 핸드에 깃든 자아가 마법으로 창조된 시스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영혼이었다니.... 부담돼서라도 함께하고 싶지 않다. 갓 핸드에는 새로운 자아를 부여할 계획이다. 드워프에게 배우게 될 에고 제작법의 힘을 빌려서 말이다.

“돌려주지.”

순순히 대답한 그리드가 갓 핸드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명령을 받든 갓 핸드가 드워프 왕 샤를의 눈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샤를이 당황했다.

“어머니의 영혼을 돌려주겠다고?”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 내 목적은 탈리마와 화친을 맺는 거니 그 대가라고 해두지.”

“오오....!”

샤를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저주받은 광물에 영혼이 저당 잡힌 어머니께서 영겁토록 겪으셔야할 고통을 자신이 끊어줄 수 있게 됐단 사실에 감격했다.

두 팔을 뻗어 갓 핸드를 끌어안으려는 그에게,

딱!

갓 핸드가 딱밤을 날렸다.

과연 그리드의 스탯을 일부 계승하는 갓 핸드답게 힘이 얼마나 센지, 고작 딱밤 한 대 얻어맞은 대가로 샤를의 목이 뒤로 크게 꺾였다. 드워프의 목이 인간보다 2배 이상 두껍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

“....”

왕궁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샤를이었다.

이마를 붉게 물들인 그가 그리드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네놈! 나를 기만하다니!! 과연 파그마의 후예가 아니랄까봐 비열하기가 파그마와 맞먹는구나!!”

“.....”

그리드는 함부로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스스로를 변호해봤자 핑계밖에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뭣들 하느냐! 볼모로 삼은 여제의 혼으로 짐을 우롱하는 역적이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마음을 짓밟고, 조롱하는 파그마 같은 놈이다! 당장 저놈을 붙잡아 탈리마의 정의를 실천하라!!”

역시나 대화가 통할 상황이 아니다.

그리드가 샤를이었어도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문답무용이 최고다.

잠자코 당해줄 순 없는 노릇.

먼저 상대방을 제압한 후 대화를 주도해야한다.

판단한 그리드가 무기를 꺼냈다.

스르륵.

칼집에서 뽑혀 나온 열망의 무아검의 묵색 검신이 왕궁의 황금들로부터 반사되는 찬란한 빛들을 모조리 빨아들인다.

클래스는 전사지만 역시나 드워프.

타고난 안목으로 열망의 무아검의 가치를 알아 본 드워프 전사들이 흠칫 놀라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본분을 상기한 그들이 도끼를 치켜세우고 그리드에게 슬금슬금 접근했다.

그리드가 호흡을 골랐다.

‘되도록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해야할 텐데.’

그리드는 드워프와 적대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드워프 전사들을 제압하되 사상자를 발생시켜선 안 됐다.

‘우선 수준을 볼까.’

그리드가 선수를 쳤다.

1대 100의 싸움.

선공까지 빼앗기면 난처해진다.

채앵!

그리드의 기습적인 공격이 드워프 전사의 도끼에 가로막혔다. 달을 반으로 쪼개놓은 듯이 커다란 전사들의 도끼는 방어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훌륭한 반응.... 둔할 줄 알았는데 민첩성이 높군.’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전사의 실력에 내심 감탄한 그리드가 도끼에 튕겨 나오는 검을 회수하며 역수로 고쳐쥐었다.

그러자.

푹!

“윽!”

그리드의 뒤편으로 다가와 도끼를 휘두르던 전사가 허리에 칼침을 맞고 신음을 토했다.

[대상에게 13,3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방어력도 높고.’

열망의 무아검에 정확히 찔리고도 생명력 게이지에 별 미동이 없는 드워프 전사의 모습에 그리드는 놀라움을 느꼈다.

과연 탈리마.

드워프 전사들이 무장한 갑옷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최소 유니크 등급으로 보일 정도였고 그리드는 평타만으로 이들을 제압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파악했다. 본격적으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제(制).”

“....!”

그리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닫고 기껏 방진을 짜기 시작하던 드워프 전사들의 진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제의 영향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그들의 중앙으로 파고든 그리드가 검기의 파도를 일으켰다.

“파(派).”

콰르르르르릉!!

“으아아악!”

검기에 적중당한 드워프 전사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괴로운 듯 비명을 토하지만 그리드의 예상대로 중상자는 없었다.

‘엄청나군.’

비록 단일 검무라곤 하나, 지금의 그리드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는 왕실 근위대가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심지어 사하란 제국의 황실 근위대조차 파를 맞으면 피 정도는 토할 것이다.

한데 드워프 전사들은 파를 정통으로 맞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신체 자체가 단단한데다가 템빨까지 등에 업었으니 일반적인 수준을 초월하는 방어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콰앙!

‘공격력도....’

드워프들의 반격을 피한 그리드가 바닥 깊숙이 꽂히는 도끼들의 위용에 재차 감탄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공격을 한 번 허용하는 순간 찌릿한 정도의 고통은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리마.

도시 단위의 국가에 불과한 이곳이 대륙의 열강들 사이에서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훌륭한 저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비켜라, 비켜!!”

새로운 전사들이 출현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눈치였는데 그들 중에는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섞여 있었다.

앙트리노.

검은 수염을 꽈배기처럼 묶은 그는, 다른 전사들과 달리 적색의 갑옷을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더 찬란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이름이 황금빛으로 물들어있기 때문이었다.

“파그마의 후예라고? 어디 한 번 나비처럼 촐랑대 봐라!”

파그마의 검무를 잘 아는 눈치다.

검무의 특징을 비웃으며 덤벼오는 앙트리노의 기세가 흉흉했다.

자신의 머리통보다 큰 도끼를 무려 두 자루나 움켜쥔 녀석의 공격을 그리드가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쩌어어엉!!

“....!”

그리드의 동공이 떨렸다.

열망의 무아검을 거머쥐고 있는 그의 팔 근육이 요란한 경련을 일으켰다.

힘에서 밀린 것이다.

온전한 방어에 실패하고 조금의 생명력을 잃은 그리드의 팔이 찰나지간 마비됐다.

“호리호리했던 파그마 놈보단 쓸만하구나!”

이를 악 물고 제자리에 버티고 선 그리드의 모습에 앙트리노는 내심 감탄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용력을 위시한 전투에 너무나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다른 손에 쥐고 있는 도끼를 물 흐르듯이 휘둘러서 그리드의 마비 된 팔을 노렸다.

바로 그때.

콰앙!!

갓 핸드가 날아와 앙트리노의 도끼를 막아냈다.

하지만 갓 핸드 또한 앙트리노의 공격력을 감당 못하고 경직되고 말았다.

기회를 놓칠 앙트리노가 아니었다.

그대로 짧은 다리를 휘둘러 그리드의 복부를 걷어차더니 두 개의 도끼를 동시에 내리찍었다.

종횡무진으로 회피하려던 그리드가 멈칫했다.

“그만! 그만하시오!!”

사자머리 펠롯이 나선 까닭이었다.

전투 현장에 난입해 그리드를 보호하고 선 그가 앙트리노를 한 번 노려보더니 샬롯 왕에게 소리쳤다.

“귀빈께 더 이상의 무례를 범하지 마십시오! 그리드를 왕궁으로 안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저입니다! 그리드는 정말로 여제의 영혼을 해방시킬 생각이고요!”

“그런 놈이 여제를 시켜서 짐에게 딱밤을 날린단 말인가!!”

“그건 누가 봐도 여제의 의지.... 험험, 어쨌든 저를 봐서 한 번 믿어보십시오. 그리드에게 만마전의 출입을 허가해주소서!”

드워프 왕족이 작품과 교감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들이 만든 작품은 거의 대부분 에고를 지녔으며 에고의 종류는 인간의 성격만큼이나 다양했다.

때때로 악귀 같은 놈들도 탄생한다는 뜻이다.

만마전은 그런 실패작들을 봉인해놓은 장소였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여제의 혼을 해방시킬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

앙트리노가 콧방귀 뀌었다.

“설령 펠롯 공의 말씀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놈은 만마전에 입장할 수 없소. 잊었소? 만마전의 문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 나조차도 열 수 없는데 내 힘조차 감당 못하는 저놈이 무슨 수로 만마전에 입장한단 말이오?”

만마전에 입장하기 위해선 자격을 증명해야한다.

입장하려는 사람 본인이 스스로 문을 열어야만 했다.

드워프 왕족은 혈통이라는 힘으로 쉽게 문을 열었지만 외부인이 만마전의 문을 열기 위해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용력을 증명해야했다.

만마전에 봉인 된 악귀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자격을 묻는 과정인 셈이다.

“앙트리노 공의 말이 맞다. 저자는 만마전에 입장할 자격이 없으니 저자가 진정으로 여제의 해방을 원한다면 짐에게 여제를 넘겨야할 것이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확인해봐야 알지 않을까?”

잠자코 듣고 있던 그리드가 앞으로 나섰다.

갓 핸드가 샬롯 왕을 거부하고 있으니 그리드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본인이 직접 만마전의 문을 열어야했고 그의 룬엔 <괴완공 살레오스>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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