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11화
“파그마! 네놈에겐 정녕 염치라는 게 없구나!”
“제 발로 죽으려고 돌아온 거냐!!”
‘관심이 뜨겁네.’
드워프는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기로 유명하다. 별안간 나타난 미친놈이 발가벗고 똥을 싸도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을 족속이 바로 드워프라고 들었다.
한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던 것 같다.
파그마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몰려드는 인파를 보면 말이다.
“다들 비켜! 파그마 놈의 멱을 따는 건 내 몫이다!”
“무작정 죽이기보단 10년 정도만 살려놓고 고문하자고!”
“놈의 새끼발가락 위에 망치를 떨궈주겠어.”
“....”
새로운 드워프가 쉴 틈 없이 모여들었다. 안 그래도 작은 대장간에 발 디딜 틈조차 없어진지 오래다. 급기야 계산대에 등이 떠밀려 밀착 된 그리드가 차분히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탈출해야겠지?’
이들은 어째서 파그마에게 공분하는가....
이와 같은 의문을 품고 혼란을 느끼기엔 그리드의 경험이 너무나도 농후했다. 파그마가 정의를 위한답시고 실천한 행동 대부분이 타인을 배반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으니 원망을 사는 게 당연함을 알았다.
‘에휴.’
하지만 설마 대장장이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탈리마에서까지 사고를 쳤을 줄이야. 파그마와 밀뤠프(드워프 장인)의 인연을 빌미로 드워프들과 쉽게 교류할 계획이었는데 낭패다.
‘드워프들이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을 준 뒤에 천천히 접근해야겠다.’
한숨 쉰 그리드가 제(制)의 전개를 위해 칼을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어이, 너희들! 진정해라!”
가장 먼저 그리드의 정체를 알아보고 소리쳤던 대장간의 주인장 모랭이 드워프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매일 실패작만 만들다 보니 눈깔들이 썩은 거냐! 이놈의 생김새를 잘 봐라! 평범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매력적인 저 면상이 어딜 봐서 파그마냐!!”
“....!”
“확실히....!”
그리드와 바짝 붙어 선 채 콧김을 내뿜던 전열의 드워프들이 가장 먼저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들은 그리드의 얼굴을 빤히 관찰하면서 수군거렸다.
“아름답게 생겼던 파그마와 비교하면 외모가 빠지는군.”
“그치. 파그마가 쓰레기긴 했지만 생김새만큼은 대놓고 매력적이었으니까. 반면 이놈은 은근히 매력적이야.”
“골격도 훨씬 더 크구만. 눈빛은 독수리처럼 날카로워서 쥐 잡아먹게 생겼고.”
“.....”
그리드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하기 힘든 외모 평가가 썩 불쾌했다.
‘쥐 잡아먹게 생긴 건 또 뭔데?’
그래도 은근히나마 매력적이라고 평가해주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어디까지나 파그마와 비교했을 때의 평가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엄청난 고평가일 수도 있었다.
벽화와 과거 회상 장면 등에서 보았던 파그마는 크라우젤과 비견되는 미남자였으니까.
이제는 또 실실 웃기 시작하는 그리드의 양 뺨을 감싸 쥔 모랭이 그리드의 얼굴을 드워프들에게 잘 보이게끔 고정시켰다. 그리고 선포했다.
“애초에 내가 말했잖아! 이놈은 파그마가 아니라 파그마의 후예라고! 이 귓구멍 꽉 막힌 놈들아!!”
“파그마의 후예....!”
아득히 들려오는 파그마의 이름만 듣고 달려왔던 드워프들이 드디어 이성을 되찾았다. 이제 모든 드워프들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긴 파그마 그놈은 번헨 열도에서 죽었다고 했지.”
“그래, 파그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제아무리 악마 같은 놈이었다곤 해도 지옥을 기어 올라오진 못할 테니....”
하나 같이 실망한 표정을 지은 드워프들이 의기소침해졌다.
‘원망하는 동시에 그리워하기도 했었던 건가?’
생각하는 그리드였지만,
“빌어먹을.... 그놈의 멱은 내가 땄어야하는 건데.”
“혹시라도 편하게 죽었으면 어쩌지? 부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었어야하는데.”
곧 생각을 관뒀다.
재차 한숨 쉬는 그를 백여 명 아니, 꽉 찬 대장간에 들어오지 못하고 창가에 선 인원까지 포함한 수백 명의 드워프가 빤히 관찰했다.
그리드는 전설의 대장장이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감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그마의 후예답게 실력이 제법인가 봐? 내가 여태껏 본 검 중에서 열손가락에 꼽아도 좋을 명검을 들고 다니는 걸 보면.”
“견갑과 각반의 밸런스가 아주 좋아. 신의 기운이 2개씩이나 깃들어있는 건가? 저건 트라우카도 탐을 내겠는데?”
“파그마보다 실력이 위인 거 아니냐?”
“저 부츠를 낱낱이 해부하고 싶어.”
하악, 하악, 하악.
드워프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리드가 직접 만들고, 무장 중인 아이템들이 드워프들의 장인정신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그들은 여태껏 수많은 명작을 목격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의 작품 수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연하다.
그리드가 무장 중인 아이템에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도 있다.
그가 만든 작품들은 그 어떤 명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물론 모든 드워프가 감탄만하는 건 아니었다.
극히 소수의 드워프는 도리어 콧방귀를 뀌었다.
“죽어있는 물건들이다. 혼이 깃들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 파그마가 만들었던 쓰레기들을 꼭 빼닮았군.”
“과연 파그마의 후예 아니랄까봐 작품과의 교감을 이루지 못한 건가.”
꿈틀.
드워프들의 평가에 으쓱해졌던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장장이의 신에게 인정받은 실력으로, 목숨을 걸고 고생한 끝에 수집한 아이템들을 재료로,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어 탄생시킨 작품들이 부정당했으니 불쾌한 게 정상이었다.
혼, 그리고 교감.
저들이 논하는 개념이 바로 자신이 갈망해온 ‘에고’임을 눈치 챘음에도 그리드는 수그리지 않았다.
“파그마를 욕하는 건 상관없다만... 내 작품을 비하하는 건 흘려들을 수 없군.”
아쉬운 입장이라고 해서 긍지까지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
긍지를 버리는 순간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경험과 노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었다.
“당신들에게 타인의 작품을 평가할 자격이 있나?”
그리드가 싸늘하게 읊자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성숙해진 초월의 격이 공간을 지배했고 대장간 내부의 모든 드워프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몇 명의 드워프는 기세를 잃지 않았다.
그리드의 작품을 비하한 이들.
정확히는 ‘집념으로 죽음을 초월한 경험’이 있는 장인들이 바로 그랬다.
“그러는 너 또한 우리의 작품을 평가하지 않았나?”
반문하는 드워프 장인의 시선이 그리드가 쥐고 있는 건틀렛에 꽂혔다.
“가판대에 진열된 물건 중 그것을 선택하기까지 너 또한 우리의 작품을 모두 관찰하고, 평가했을 텐데? 작품이 평가 받는 것은 당연한 거다. 비난을 감당하기 싫다면 대장장이를 관둬야지.”
“적어도 나는 너희들처럼 양심 팔아먹고 장사하진 않아.”
“양심? 양심이라고?”
텅!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적발.
안 그래도 커다란 얼굴을 더욱 더 부각시키는 헤어스타일의 소유자 펠롯이 그리드와 언쟁을 벌이는 것으론 성이 차지 않았는지 망치를 꺼내 던졌다.
그리드는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펠롯의 투척술이 초보 수준에 불과했을 뿐더러 망치 끝에 살기조차 깃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던진 망치의 궤도는 그리드의 어깨를 살짝 스치게끔 설정된, 단순 위협용에 그쳤다.
‘겁주기 용도라기엔 너무 허접하지 않나?’
콧방귀 뀐 그리드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인벤토리로부터 솟구쳐 나온 갓 핸드가 그리드를 대신해서 펠롯의 망치를 막아냈다.
“저건....!”
두 눈을 부릅뜬 드워프들이 크게 술렁이자 그리드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 잘난 에고 아이템은 나한테도 있다고.’
지금의 갓 핸드는 파그마가 남긴 유산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던 파브라늄을 더욱 강화시켜서 만든 결과물이다.
그리드가 갓 핸드에 품은 자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었고, 그리드는 드워프들의 격한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드워프들의 격한 반응은 감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 이 육시랄 놈이....!!”
“네놈....! 우리를 우롱하고자 이곳을 찾아온 것이냐!!”
“사악한 것이 파그마를 쏙 빼닮았구나....!”
기껏 진정됐던 분위기가 다시금 가열되기 시작했다.
그리드를 노려보는 드워프들의 눈빛에 짙은 혐오와 원한이 깃들었다. 마치 그리드를 파그마라고 오해했을 때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어?’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드워프들의 격한 반응이 그에게 경종을 울린 것이다.
‘설마?’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리드의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피어올랐다.
파브라늄에 깃든 자아는 순수 브라함의 마법으로만 창조된 게 맞을까?
에트날 왕국 골렘 침공전 당시 등장했던 골렘들의 수준을 고려해보면 파브라늄에 깃든 자아가 유독 뛰어난 거 아닌가?
파그마는 어쩌다가 드워프들의 원한을 산거지?
그리고 파그마는 <자아 부여> 스킬을 어디에다가 활용했을까?
오싹!
그리드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거대한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그리드는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갓 핸드를 출현시킨 장본인 펠롯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쳐왔다.
“네놈! 파그마의 후예여! 밀뤠프가 남긴 재앙의 싹이여....! 여제(女帝)의 혼을 가둬놓은 흉물로 우리를 우롱하는 네놈 따위가 감히 우리 앞에서 양심을 논하느냔 말이다!!”
“....!!”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리드의 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제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갓 핸드를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파그마.... 파그마 이....”
브라함은 양반 가람에게 큰 격노를 드러냈었다.
네놈 양반들이 서대륙에 파그마를 풀어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했던 거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조금 심한 비약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말종....”
....이젠 심히 공감했다.
물론 파그마는 본인이 저지른 모든 죄를 인지하고 있었고 후회하였으며 최후의 순간에는 스스로 업보를 짊어지었다. 그가 세계를 구원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과연 영웅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사실은 브라함의 말대로 독은 아니었을까?
파그마라는 독이 서대륙에 풀리지만 않았어도 세계는 알아서 평온하지 않았을까?
“파그마의 후예! 죽어라!!”
“우리는 네놈을 저주한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한 드워프들이 급기야 죄다 망치를 꺼내들었다. 이 순간 그들의 손에 쥐어진 망치는 성스러운 도구가 아닌 흉기였다.
하지만 드워프는 전투민족이 아니다.
그들 중 전사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왕성을 지킨다고 들었다.
이 자리의 드워프는 모두 민간인이라는 뜻.
그들 수백 명이 모여 봤자 그리드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도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오히려 검을 내려놓았다.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뿐이었다.
“제가 죄송합니다!!”
털썩! 무릎 꿇은 그리드가 목청껏 소리치자 드워프들의 어안이 벙벙해졌고,
[새로운 전직 퀘스트 <파그마와 다른 길>이 개방됩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2개의 분기점이 존재하는 퀘스트입니다★]
[퀘스트 거절 시 전직 퀘스트 내용이 변경됩니다.]
그리드의 시야엔 알림창이 떠올라 있었다.
‘퀘스트를 수락한다.’
그리드는 당연히 파그마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여태까지도 그래왔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