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08화
성장형 히든 클래스 <사신>에게는 매우 특수한 파라미터가 존재한다.
소울 게이지.
사신으로 전직한 이후, 나이트는 대상의 영혼을 수치화하여 읽을 수 있게 됐다.
‘바로 저게 지존의 영혼인가.’
나이트의 눈에만 보이는 그리드의 소울 게이지는 무려 68이었다.
그리드의 영혼에 낙인을 새기고 갉아먹어 죽음으로 인도하기까지 장장 34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소울 게이지가 10을 간신히 넘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수치였다.
전투 지속력이 약한 사신의 입장에서 그리드와 싸워서 이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의 영혼이 지닌 무게는 정말로 각별했다.
‘그리드가 세계에 내린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거겠지.’
수많은 위업을 세워 자신의 존재감을 키웠기에 영혼의 부피가 커진 것일 터.
영원토록 윤회하는 영혼을 타고났기에 무한대의 소울 게이지를 지녔던 살레오스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경우다.
‘나로서는 평생이 지나도 대적할 수 없는 상대로군.’
뭐, 애초에 맞서 싸울 생각 자체가 없었다.
상왕 카르에게 고용됐을 당시 겪었던 풍파를 떠올린 나이트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화답하는 그리드와 그의 동료들.
저들에게 있어서 자신은 불청객일 뿐이다. 함께 기쁨을 나눌 자격 따위 없다.
-수고했다.
“....!”
갑자기 들려오는 귓속말에 놀란 나이트가 자리에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본 그가 그리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귀를 의심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모두에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이다.
“수고 많았다, 나이트.”
나이트 본인은 자각이 부족한 듯하지만, 그의 명성은 매우 높다.
수 년 전 러시아에서 열린 PvP 대회에서 알렉산더를 쓰러뜨린 시점부터 나이트를 모르는 플레이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템빨국의 정보기관은 나이트를 주목해왔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의 직업 퀘스트가 ‘수명이 다해가는 사람에게 고통 없는 안식을 내리는 것’이라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한때 상왕 키르의 호위역으로 고용되는 등, 사신 클래스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 활동을 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먹기 살기 위한 노력이 아니겠는가.
템빨국은 나이트에게 반감을 품기보다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해야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적대하기에는 위험한 상대이기도 했고, 워낙 많은 NPC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템빨국의 입장에선 ‘고통 없는 안식’을 내린다는 사신의 특성에 의존하고 싶은 경향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 죽어갔던 칸의 최후를, 그리드와 라우엘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하여.
“든든하던데? 다음에 만날 때도 아군이면 좋겠네.”
그리드는 나이트에게 눈도장을 찍어두었다.
그리드의 의도야 어찌됐든, 나이트에겐 큰 도움을 주는 행동이었다.
키르의 고용인으로써 템빨국을 잠시나마 적대했던 과거를 불안하게 여겨왔던 나이트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꾸벅, 나이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영광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본래 기사를 꿈꿨던 나이트는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 멸망하는 과정을 차례차례 목격해왔다. 그래서 결국 꿈을 접고 사신의 길을 받아들인 것이다.
상대를 증오하는 게 아닌 이상, 나이트는 상대방과의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 늘 혼자여야 했다.
자리를 떠나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리드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어느새 벌떼처럼 몰려와 있는 기자들을 한 번 쭉 둘러보더니 기사 소환으로 후로이를 불러들였다.
“가내 평안하십니까? 기자님들의 얼굴을 닮았을 아들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 싶다면 예의에 어긋나는 질문은 삼가주십시오.”
기자들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로이가 그리드의 대변인이자 템빨국 대변인의 자격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매우 못생긴 편에 속하는 일부 기자들이 괜한 자격지심에 울컥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후로이는 개의치 않았다.
***
전 세계의 각오와 달리 다소 싱겁게 끝난 전투였다.
무려 다섯 마리 대악마의 침공을 고작 2시간 만에 물리칠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그리드조차 예상 못했다.
도중에 죽어 41.2퍼센트의 경험치를 잃긴 했지만, 경험치야 언제라도 복구할 수 있는 것이고 템빨국엔 사상자가 없다는 점이 그리드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모두 황제폐하의 공덕입니다.”
하스파치 운하.
바사라를 찾아간 그리드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일말의 가식 없는, 진심어린 존경이 담긴 인사였다.
인류가 대악마들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고 쉽게 토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바사라의 철저한 준비 덕분이었으니까.
그녀는 입만 산 이상론자 따위가 아닌, 정말로 유능한 황제였다.
모두의 기대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의.
“황제폐하가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화에 떨고 있었겠죠.”
“부끄럽습니다. 제가 아닌 템빨왕 전하의 공덕인 걸요. 전하의 존재가 없었다면 제가 세운 모든 작전은 성립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드의 커다란 손을 작은 두 손으로 꼭 붙잡은 바사라가 흠칫, 몸을 떨면서 얼굴을 붉히더니 말했다.
“저는.... 우리 사하란 제국은 전하의 존재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답니다. 전하의 존재 자체가 인류의 축복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인류의 편에 서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번헨 열도에 있는 그리드의 석상에 참배행렬이 끊이지 않은 시점부터 그리드의 명성은 이미 보통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상태였다.
한데 이번 사건으로 인류의 등불로 거듭나고 말았으니 그리드의 명성은 거룩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거의 ‘신’에 다가서는 존재쯤으로 인식했다.
물론 바사라처럼 이성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지만.
“전하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네요. 이대로 제 막사로 가서 회포를 풀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단 둘이, 편하게요.”
“하하....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폐하께서는 어서 제국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살피셔야지요.”
부담스러운 바사라의 손길을 조심히 뿌리친 그리드가 힐끔 눈치를 살폈다.
아주 노골적으로 불만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지슈카와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먼 산을 바라보는 유라, 그리고 평소보다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메르세데스의 모습이 차례대로 보였다.
바사라에게 연정을 품기엔 시간도, 기회도 없었던 그리드의 입장에서 바사라의 은근한 구애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황제와의 연애, 그리고 결혼....
필시 엄청난 효과를 불러올 테지만, 그리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팔아가면서까지 간택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유라와 지슈카, 메르세데스가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상태였고 그리드는 그녀들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조차 벅찼다.
‘그래도 기쁘군....’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오직 혐오에 시달렸던 시절에는 세상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의 세상은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지키고 싶다.
재차 각오를 다진 그리드가 일행에게 눈짓했다.
“귀환하자.”
“응.”
“네.”
그리드와 십공신, 그리고 기사들이 모두 스틱세이의 곁으로 다가섰다.
여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고작 몇 시간 동안 10회에 가까운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하며 아크 왕국 곳곳을 누빈 스텍세이는 잔뜩 지쳐있었다. 진이 빠져 멍하니 있던 그가 한숨 쉬며 말했다.
“출발하지요.”
스파아아앗!!
그리드 일행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현장에는 아직도 제국과 연합국의 병력이 가득해 인파로 미어터졌지만 사람들은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그만큼 그리드의 존재감이 컸다.
***
“큭큭큭, 저의 등불이었던 전하께서 어느새 만인의 등불로 거듭나셨군요. 전하의 진가를 이제야 알아본 세상이 한심해 우스울 지경이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평범한 존재들의 한계인 걸요.”
그리드 일행을 마중 나온 라우엘이 한쪽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떠들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가라앉아 있어 말 못할 고충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역시 치질이 재발했구나?”
“...탈모는 겪었어도 치질을 겪은 적은 없다니까요?”
“치질은 현대인들이 가장 흔하게 겪는 질병 중 하나야.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매일 앉아 일을 하다보면 피똥도 쌀 수 있고 그런 거지 뭘.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며칠 전 실제로 만나 식사했던 라우엘의 지갑에서 언뜻 본 대장항문 외과 의사의 명함을 떠올린 그리드가 진심으로 염려하며 말하자 라우엘은 더 이상 부정하지 못했다. 루비의 시선을 의식하며 얼굴을 붉히는 그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깔깔 웃은 지슈카가 그리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질투해서 저러는 거잖아.”
“질투?”
“나만의 전하가 만인의 것이 돼버려서 키라이~ 뭐 이런 거 아닐까요?”
“....?”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 방향에 교황 데미안이 있었다.
활짝 웃은 데미안이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함께 모인 건 정말로 오래간만이네요.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데미안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데미안은 사실상 템빨단원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그는 교황이다. 레베카교를 이끄는 몸이었다.
큰 전투가 끝난 직후, 그가 있어야할 장소는 템빨국이 아닌 교황청이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교인들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다소 책망하는 시선을 보내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씁쓸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부상자가 너무 많았거든요.”
데미안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성내에 위치한 의무실이었다.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대부분 레베카 교인들이었다.
“이런....”
모두가 수월했던 것은 아니구나.
깨달은 그리드가 루비에게 눈짓하자 루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의무실로 달려갔다.
그리드는 데미안을 위로해주었다.
“고생 많았다....”
죽어가는 교인들을 보며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그리드는 데미안의 심성을 알기에 걱정했다. 데미안이 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걸 뻔히 보았다.
다행히 데미안의 마음은 안정 된 상태였다.
“그리드 님께서 짊어진 부담과 비교하면 작은 부담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약했을 뿐이죠.”
애써 밝게 웃어 보인 데미안이 그리드 일행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시 교인들을 살피러 가보겠습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교인들을 이끌고 라인하르트를 방문한 데미안의 목적은 교인들의 치료에 있었다.
라인하르트엔 훌륭한 설비를 갖춘 의료시설과 성녀 루비, 그리고 최대 규모의 레베카 신전이 있었으므로 교인들의 치료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도 교인들을 치료하느라 바빴던 데미안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하자 그리드가 그를 붙잡고 물었다.
“너는 몇 등 보상을 받았지?”
“2등 보상입니다.”
1등 보상은 유라의 몫이었다.
순순히 대답하는 데미안에게 그리드가 손을 내밀었다.
“보상 받은 거 나한테 줘.”
“....!?”
충격적인 요구.
솔직히 말해서 데미안은 날강도를 만난 심정이었다. 하지만 질문도, 거부도 하지 못하고 순순히 보상을 꺼내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그동안 그리드에게 입은 은혜가 워낙 많았으니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이었다.
<슈트리오의 손톱>과 <마신의 세포>가 바로 그가 얻은 보상이다.
“이외에도 칭호와 룬의 힘을 얻긴 했지만, 그건 이미 제게 귀속 된 거라서....”
설명하는 데미안을 그리드가 재촉했다.
“알았으니까 어서 가서 교인들을 치료해주도록 해.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하고.”
“네....”
“그리고 교황청으로 돌아가기 전에 대장간에 들려. 이걸로 아이템 만들어 놓을 테니까.”
“....!”
데미안이 울컥했다.
매번 자신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그리드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동한 것이다.
그는 알아야한다.
자신과 레베카교의 존재가 템빨국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그리드와 데미안의 우정은, 그리고 템빨국과 레베카교의 교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