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06화
파그마의 후예, 지공, 덕공, 화공, 전설, 혈왕, 초월자, 그리고 영웅왕.
그리드가 이룬 모든 경지, 혹은 지위는 본래부터 존재했던 개념이다. 시스템의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사시의 마검사는 달랐다.
시스템이 그리드의 업적을 토대로 새롭게 탄생시킨 것으로 오직 그리드에 의한, 그리드를 위한 개념이었다.
반면.
[템빨왕 그리드가 일곱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템빨왕은 그리드 ‘스스로’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본인을 템빨왕이노라 칭했고, 이를 세계가 좌시하지 않았으니, 종국에 시스템은 그가 만든 개념을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드는 템빨왕이다.
템빨왕이 그리드였다.
[서사의 시작은, 좌절하는 인류를 향한 위로로부터 비롯됩니다.]
“당신들은 약하지 않아. 아직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 또한 약자였었기에 단언했다.]
꽈광!
꽈과과과과과과광!!
괴완공 살레오스에게 쏟아지는 무구의 비.
수십 종, 수천 자루의 무구가 매서운 기세를 담고 있어 이를 피하고, 막아내는 살레오스의 움직임이 바쁘다. 쉴 틈 없이 자리와 자세를 바꾸며 두 팔을 휘두르는 놈의 목적은 감히 자신을 덮치는 무구들을 때려 부수는 것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쩌저정-!!
무구의 수가 워낙 많았다.
‘지지 않는 힘’이 새겨진 두 주먹을 휘두른 살레오스가 두 자루의 무구를 때려 부술 때마다 수십 자루의 무구가 새로이 떨어져 살레오스를 베고, 때렸으니 살레오스만 손해였다.
‘‘제길.’’
소나기는 피해야 상책이다. 어차피 잠시 후면 그칠 세찬 비에 애써 맞설 필요는 없다.
상기한 살레오스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성벽을 찾아 그 뒤로 몸을 숨겼다.
무구의 비와 함께 하강 중인 그리드의 날카로운 시선이 놈을 쫓았다. 그리고 놈에게 조롱당하며 죽어가고 있던 릴차드 요새의 모든 플레이어들을 향해서 외쳤다.
“버텨. 발악하라고.”
[패배는 포기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도래하는 것.]
[위기는 극복해야하는 관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인류에게 상기시켰다.]
[괴완의 악마와 그의 시선이 드디어 마주치는 순간 인류는 떠올렸다.]
[최초의 악마와 조우했던 그날의 심정과, 다섯의 악마를 조우한 오늘 날의 심정을 비교해보았다.]
Satisfy의 근간은 이미 설정 된 세계관과 NPC이다.
하지만 Satisfy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주축은 플레이어였다.
여태까진 세계와, 혹은 NPC들과 호흡을 함께해온 그리드의 서사시가 플레이어와 함께 호흡하기 시작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뜻이다.
“아....”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아니면 Satisfy에서 직접 그리드의 서사시를 접한 20억 플레이어 전원이 지난날을 회상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대악마 레이드의 순간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가장 약했던 벨리알에게 그들은 전혀 대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 그들은 벨리알보다 훨씬 더 강한 대악마들과 맞서 싸웠다. 잠시나마 희망을 엿봤었다.
그래, 우리는 성장해왔다.
매번 좌절을 겪을지언정 끝끝내 버텨 강해졌다.
앞으로 더욱 더 강해질 것이다.
“절망할.... 이유가 없어.”
부러진 낫을 지팡이 삼은 나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참한 몰골로 쓰러진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도 이를 악 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드의 서사시가 그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초(超).”
콰쾅!!
쿠콰콰콰콰콰쾅!!
점차 지상과 가까워지고 있는 그리드의 검기 폭격이 릴차드 요새의 마지막 성벽을 무너뜨리자 그 뒤에 숨어있던 살레오스의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크라우젤과의 격전에서 제법 큰 체력을 소모한 놈의 얼굴엔 긴장이 역력했다.
투콰콰콰콰콰쾅!!
성벽에 가로막히는가 싶던 무구의 비가 놈을 다시금 덮쳤다.
빗줄기에 섞인 갓 핸드들이 은밀하게 움직여 놈의 사지를 구속하려고 시도했다.
그 탓에 행동에 제약이 생긴 살레오스의 몸에 상처가 아로새겨지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개당 1회에서 6회의 공격을 가하는 수천 개의 무구들과 갓 핸드의 조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비겁한 힘은 뭐냐....!””
종(種)마다 한계가 다른 법이다.
인류의 궁극이었다는 뮐러조차도 결국 ‘검술’이라는 하나의 힘에만 의지했었다.
한데 이건 뭐지?
수천 자루의 무구를 동시에 쏟아내는 힘이라니, 마치 신의 권능이 아닌가?
‘‘고작 인간이 무슨 수로....!’’
콰작!!
한 자루의 검이 살레오스의 심장을 강타했다. 하지만 살레오스의 단단한 피부를 꿰뚫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키더니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이어서 날아온 농기구는 그의 피부를 찢고, 살을 헤집어 고통을 안겼다. 심지어 다시 움직여 살레오스의 손길을 피하고 재차 공격했다.
수천 자루의 무기 전부가 위협은 아니었으나, 그중 몇 개는 반드시 살레오스에게 위협을 주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검성 뮐러의 <이기어검>보다 분명히 상위에 있는 힘이었다.
손조차 대지 않고 나를 수세에 몰아넣다니?
혼란과 증오가 서린 살레오스의 시선이 하늘 위 흑발의 인간에게 꽂혔다.
요새 곳곳에 널브러진 인간들이 놈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리드....!”
“그리드으!!”
‘‘인류의 시대는 쇠퇴했다고 들었는데?’’
포비아, 브라함, 파그마, 알렉스, 뮐러, 그리고 마드라.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는 새로운 전설들을 배출해왔고 그들 하나하나가 좌시하기 힘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인류는 쇠락했다.
고작 벨리알이 혼자서 인계에서 날뛰었다는 소식을 접했던 살레오스는 시시해서 웃음이 나왔을 정도였다.
한데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살레오스는 크라우젤과 그리드라는 이름의 막강한 전설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수백 년의 세월에 거쳐서 쇠락해온 인류가 고작 몇 년 만에 다시 좌시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그 원인을, 살레오스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싸워. 무기를 들어.”
[혼자의 한계를 알기에, 그는 인류를 응원했다.]
[자신이 내리는 무구의 비에 깃든 인류의 염원에 호응했다.]
[그의 존재가 인류에게 용기를 주었다.]
““영웅왕.... 그렇군. 네놈이야말로 뮐러의....””
단지 등장만으로 다 죽어가던 인간들의 투지를 일으키는 존재감.
그리드를 주시한 채 무구의 비들을 쳐내던 살레오스가 드디어 적자색 투기를 눈치 챘고,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검기를 날리던 그리드가 드디어 발동해준 순보에 몸을 맡기고 살레오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젠 플레이어들도 상당수 알고 있는 순보의 개념을 살레오스가 모를 리 만무했다.
‘‘초월의 격....’’
영웅 중의 영웅.
영웅왕은 즉 인류의 정점, 혹은 인류의 정점이 될 존재를 뜻한다.
뮐러의 뒤를 잇는 이놈이 초월자에 도달한 것은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랬군. 인간의 한계를 극복했기에 이런 불합리한 힘을....’’
콰드득!!
급소를 노려오는 희고 투명한 검을 막아내느라 행동을 소모한 상태의 살레오스였다.
그 탓에 그리드의 융합 검무를 회피하지 못하고 허용한 그가 격통 속에 이질감을 느꼈다.
‘‘이 검술은....?’’
마치 춤사위와도 같이 사뿐거리는 이 검술이 뮐러의 검술이었던가?
아니, 다른 누군가의 검술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륵!!
““....!?””
재차 날아오는 무구들의 동선이 겹치는 순간을 노려 여덟 개의 무구를 동시에 깨부숴버린 살레오스가 그대로 그리드를 공격하려다가 흠칫 놀랐다.
그리드로부터 솟구치는 뜨거운 불꽃의 폭풍으로부터 신(神)의 기운을 느낀 까닭이다.
‘‘주작의?’’
주작은 동쪽으로 쫓겨난 신들에게 패배해 봉인당한 거 아니었나?
한데 그놈의 기운이 어째서 이곳 서방에서 피어오른단 말인가?
심지어 인간으로부터!
““네놈, 정체가....””
이 불꽃의 영역 때문일까.
무구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드디어 한 숨 돌릴 수 있게 된 살레오스가 그리드와 대화를 시도했다.
무려 19위의 군주가 하찮은 인간에게 큰 흥미를 품은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고작’ 19위 따위의 대악마에겐 관심이 없었다.
“XX, 내가 너를 맡았어야 됐네.”
““....?””
“너, 벨레드하고 비교하면 허접하잖아.”
광란의 왕을 뿌리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무적처럼 느껴졌던 그 괴물을 상대로 간신히 13분을 버틴 후 스틱세이를 소환, 죽기 직전에 템빨국에 귀환했다가 다시 이곳에 떨어진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벨레드의 발을 묶는 역할은 제국에게 맡기는 편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촤르르르르륵!!
무한의 검기가 펼쳐졌다.
그리드의 발언에 귀를 의심하고 있던 살레오스의 입 끝이 치켜 올라갔다.
““과연, 네놈이 뮐러의 진전을 이었던 거구나.””
한 시대에 두 명의 검성이 탄생하다니, 참으로 흥미롭다.
그리고 그 둘 모두를 내가 꺾었을 때 얻게 될 명성과 높아질 격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살레오스의 양 주먹에 무조건 이기는 힘이 깃들었고,
“화회(花回).”
그리드는 침착하게 반격부터 시도했다.
스틱세이에게 이후 합류할 전선으로 어디가 좋을지 추천 받는 과정에서 괴완공의 권능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놈과 미련하게 힘을 겨룰 생각 따위, 그리드에겐 없었다.
쩌저저저저정!!
““....!””
무조건 이겨야할 힘이 무엇이든 반격하는 기술에 가로막혀 되돌아간다.
스스로의 주먹에 얻어맞고 휘청, 비틀거리는 살레오스에게 무한의 검기를 등에 업은 그리드의 궁극이 꽂혀 들어갔다.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
그리고 초연화에 이은 연살화극과 초연살극 등.
자원의 제약을 극복한 그리드가 계속해서 최강의 검무를 연계하자 그렇지 않아도 큰 체력을 소모하고 있던 살레오스가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다.
살레오스의 얼굴엔 혼란이 가득했다.
““파그마....? 뭐지, 네놈? 어째서 파그마의 검무를?””
뮐러의 진전을 이은 놈이 아니었던 것이냐, 그 지긋지긋한 질문을 무시한 그리드가 마나의 유지를 위해서 화신의 폭풍을 거뒀다.
다시금 펼쳐지는 푸른 하늘에 멈춰있던 무구의 비가 재차 살레오스를 공습했고,
츠칵-!
삼십만대군 잠행검.
신격에 잠재력 개방을 연계시킨 그리드는 보이지 않는 참격을 날렸다.
물수제비처럼 낮게 뜨다가 기습적으로 솟구친 검이 살레오스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동시에 살레오스의 약점을 노출시켰다.
자신이 언제 베였는지도 모른 채 의아해하는 살레오스의 시야에 허리를 크게 비트는 그리드의 모습이 투영됐다.
오싹!
살레오스가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였다.
영웅왕이자 초월자이며, 파그마와 뮐러의 진전을 이었고 신의 힘을 등에 업은 눈앞의 놈.
순수하게 느껴졌던 크라우젤과 상반되는 혼종 중의 혼종이 또 이상한 짓을 벌일 거란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십만대군 학살검.”
““....!!””
정말이지, 끔찍한 혼종이다.
설마 마드라의 검술까지 튀어나올 줄이야....
약점이 노출 된 상태에서 치명상을 입고 휘청거리는 살레오스.
“아.”
그를 마무리 지을 힘이, 그리드에겐 살짝 부족했다.
3초 동안 검기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삼십만대군 잠행검의 부작용이었다.
기왕이면 검기의 소모 없이 모든 검무를 쏟아 붓고 싶은 마음에 화신의 폭풍을 오래 유지했던 탓에 마나마저 부족했다.
그리드의 자원 계산 능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살레오스의 저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발생한 폐해였다.
그리드가 막 도착했을 무렵부터 살레오스는 40퍼센트에 가까운 생명력을 소모한 상태였고, 그리드는 자신의 모든 스킬을 쏟아 부우면 놈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살레오스는 삼십만대군 학살검까지 허용하고 생명력이 10퍼센트 미만까지 떨어진 순간부터 급격한 방어력 상승을 이루었다.
그리드가 마무리에 실패한 이유다.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노에는 대악마에게 다소 무력한 면모가 있다.
아쉬운 대로 템빨골과 랜디 등을 소환한 그리드가 빛의 정령의 섬화를 발동, 살레오스의 눈을 잠시 멀게 만든 뒤 템빨콘의 등에 올라탔다.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자원 회복에 집중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갓 핸드와 소환수만으로 19위 대악마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이었다.
그리드가 펼친 방진을 순식간에 돌파한 셀리오스가 템빨콘의 꼬랑지를 붙잡아 휘둘러 그리드와 템빨콘을 동시에 하늘 위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전신’에 힘을 모아 그리드를 뒤쫓아 솟구쳤다.
무조건 이기는 힘을 전신에 두른 그는 이제 무적의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크라우젤에게 베이기 전까진 말이다.
“두더지.... 승천.”
단 한 번.
검을 딱 한 번만 휘두를 수 있는 스태미나를 회복한 크라우젤이 <지룡 승천>과 비교하면 이제 너무 하찮은 기본 스킬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살레오스를 조준했고, 적중하는데 성공했다.
위력은 형편없어 살레오스에게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지만, 놈이 몸에 두른 힘은 검성의 권능에 베여서 사라지고 말았다.
쩌엉!
덕분에 그리드의 가슴을 후려치는 살레오스의 발차기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걱!
그리드가 반격으로 날린 평타가 살레오스의 목을 베었고,
쿵!
자신의 생명력이 크게 소모된 상태임을 자각하고 있던 살레오스는 위축돼서 지상에 착지했다.
그를 기다리는 건 나이트를 비롯한 수백 명의 플레이어였다.
어차피 그리드가 아니었으면 진즉 죽었을 그들 모두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궁극기를 전개했다.
모든 플레이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푹-!
푸푸푸푸푸푸푸푸푸푹!!
““큭....! 크아아아아악!!””
[그는, 인류의 등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