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9권 - 03화
스르륵.
왼쪽 시야가 밑으로 내려가고,
스슥.
오른쪽 시야는 뒤로 물러난다.
전혀 의도치 않은 시각의 변질.
의문 속에서 힘겹게 뒤를 돌아본 살레오스는 자신이 등지고 선 세상이 반으로 갈라진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검....성!””
눈앞 인간의 정체를.
츠카카카카칵!!
미간을 중심으로 반으로 잘려나간 살레오스 육신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역한 냄새를 풍기는 새카만 장기들이 후두둑 쏟아지며 그의 죽음을 암시했다.
『이럴 수가....!』
『19위 대악마를 일격에....!!』
뮐러 이후 검성이라는 이름이 짊어진 무게는 역사의 무게와 같다.
Satisfy가 기록하는 인류의 대부분 역사는 검성(뮐러)이 수호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검성(뮐러)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고독히 싸웠던 파그마와 달리 사람들의 곁을 지키며, 사람들과 함께 싸웠었기에 수많은 역사에 새겨진 것이고 구전되어온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역시 검성!!
-갓라우젤!!
크라우젤이 뮐러의 명성을 이어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외천.
그리드 외엔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했던 인류의 정점은, 인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자격이 차고도 넘쳤다.
“지룡 승천.”
콰르르르르릉!!
그간 대체 얼마나 성장한 것인가.
세계를 베어버리는 <우주 검>을 아무런 전조 없이 발현하는 기적을 행사한 크라우젤은 살레오스를 절단시킨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음 검술을 연계시켰다.
지하로부터 솟구친 검기의 파동이 반으로 갈라져 기울고 있는 살레오스를 집어삼키자 살레오스는 그대로 잿더미가 될 것만 같아 보였다.
무려 19위의 대악마가 단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레이드당하기 직전인 것이다.
어쩌면 두 번 다시없을 역사적 순간을 세상사람 모두가 숨죽인 채 지켜보는 가운데.
촤르르르륵!!
쏟아지는 살레오스의 장기들로부터 수천, 수만 개의 혈관이 솟구쳐 나와 뒤얽히기 시작했다.
『....!』
-....!
마치 시간의 역행을 보는 듯하다.
혈관에 당겨진 살레오스의 장기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되찾았고 반으로 갈라졌던 살레오스의 육신은 다시 하나로 붙어버렸다.
그가 선 대지가 피로 흥건히 젖어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조금 전 반으로 갈라졌던 살레오스의 모습을 착각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짝, 짝, 짝.
육신을 복구한 살레오스의 첫 행위는 찬사였다.
짧게 박수 친 그가 히죽 웃었다. 즐거운 눈치였다.
““과연 검성이로군. 뮐러의 진전을 이은 것이겠지? 오래간만에 재밌는 싸움을 해보겠어.””
지옥을 떠도는 두 개의 절규가 있으니, 하나는 알렉스이며 둘은 뮐러다.
지옥을 다스리는 33인의 군주가 여태껏 느껴온 좌절과 공포는 오직 그 둘에 의해서만 발생했다.
번헨 열도를 지키며 군주들의 진입을 막았던 파그마?
놈이 불태웠던 마지막 불꽃은 결국 바알의 변덕으로 탄생한 작품일 뿐, 한 순간의 말썽거리에 불과했다.
반면 지옥을 침략해 군주들을 암습했던 알렉스와 간신히 인계에 강림한 군주들의 육신을 봉인한 뮐러의 집요함은 끊어내기 힘든 고통이었다.
‘‘결국 두 놈도 사라졌지만....’’
뮐러.
제9위의 군주였던 헬가오마저 베고, 봉했던 놈의 진전을 이은 눈앞의 인간을 내 손으로 해치우면 나는 헬가오를 초월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생각하며, 더 짙은 미소를 머금은 살레오스가 크라우젤에게 쇄도했다.
꽈장!!
그것이 무엇이든 압살해야 할 살레오스의 주먹이 크라우젤의 검에 가로막혔다.
끼릭!!
그것이 무엇이든 베어내야 할 크라우젤의 검이 살레오스의 ‘힘’을 베는데 그쳤다. 살레오스의 육신엔 닿지 못했다.
““뭐냐?””
힘 싸움에서 승부가 나질 않자 기술을 걸어 크라우젤을 수세에 몰아넣은 살레오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쉬운데? 뮐러의 검술이 고작 이 정도라고?””
“....뮐러.”
옆구리를 스친 일격에 내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경직 된 크라우젤.
감정의 표출을 절제해온 그의 두 눈동자에 드물게도 격정이 피어올랐다.
“뮐러의 검술을, 나는 모른다.”
처음 Satisfy를 접했던 그날.
차가운 검을 쥔 촉감에 매혹된 크라우젤의 눈앞에 펼쳐진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검사가 되겠노라 결심했고, 시작한 이상 끝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크라우젤이 걸어온 검의 길은 그 스스로 발견하고 개척한 것이지, 누군가가 이미 일궈놓은 길을 뒤쫓은 게 아니었다.
뮐러와 비교당하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내 이름은 크라우젤.”
쿠와아아앙!!
장렬한 은빛의 검기가 크라우젤을 에워쌌다.
검과 합일한 크라우젤의 생명력과 방어력이 그가 소유 중인 검들의 내구력, 공격력과 치환 됐고,
치링-! 치리리리링!!
그의 오른 손에 쥐어진 백호검은 <검을 찬미하는 시>의 영향을 받아 맑게 공명했다.
“뮐러의 후인이 아닌, 새로운 검성이다.”
콰창! 콰차창!!
[<+9알리오네의 검>이 파괴되었습니다.]
[<+3이무기의 엄니>가 파괴되었습니다.]
[<+8미혹의 이도류>가 파괴되었습니다.]
크라우젤의 인벤토리 속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검들이 순차적으로 소멸했다.
크라우젤이 살레오스의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크라우젤을 대신해서 피해를 입은 대가였다.
서걱!!
검을 찬미하는 시의 효과로 위력이 11배나 상승한 <단죄검>이 살레오스의 죄를 물었다. 대상이 악할수록 더 큰 피해를 입히는 단죄검의 위력은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푸욱!
살레오스의 상단을 찌르는 검광은 백색이며,
츠카칵!
하단을 베는 검광은 흑색이다.
단죄검에 이어지는 <백익검>과 <흑익검>이 연계에 성공했으니 남은 건 <쌍익검>의 발현.
콰르르르르릉!!
오직 크라우젤이기에 가능한 연계기의 완성이 살레오스의 몸을 넝마로 만들었다.
하지만 살레오스의 육신은 곧바로 수복됐고, 살레오스의 생명력 게이지는 여전히 90퍼센트 이상 차올라있었다.
반면 크라우젤은 40개의 여벌 무기 중 절반을 이미 소모한 상태였다.
값비싼 유니크, 레전드리급 무기들이 고작 20회 가량의 피해를 막아준 대가로 영구히 소멸한 것이다.
살레오스의 파괴력은 크라우젤을 초조하게 만드는 반면 크라우젤의 검술은 살레오스에게 무료함을 선사했다.
““네가 나약한 이유는.””
키이이이잉!!
드릴처럼 회전하는 새카만 마력이 살레오스의 양손에 깃들었다.
이제 크라우젤의 검이 베는 것은 살레오스의 ‘힘’이 아닌 저 마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살레오스의 힘은 온전히 남아 크라우젤을 검과 함께 통째로 박살낼 것이었다.
““네가 뮐러의 검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콰르르릉!!
크라우젤을 부정하는 살레오스의 공격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
“나는 그리드다. 세상에서 제일 끈질긴 놈이니까 잘 기억해두라고.”
그리드는 강요된 길을 걸어왔다.
의도치 않게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어쩔 수 없이 대장장이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리드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불안에 떨었고 때때로 후회에 휩싸였다.
하지만 끝내 종착지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이미 닦아놓은 길에서 내려 새로운 길에 올라섰다.
‘나’의 길.
바로 그리드의 길이었다.
한데 뮐러라고?
뮐러의 진전을 이은 것이냐는 13위 대악마 벨레드의 질문이 그리드의 자존심을 긁었다.
왜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뮐러라는 이름의 그늘에 자신이 가려지는 것인지, 그리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해.’
쏴아아아아....
빈 물약 병을 뒤로 던진 그리드가 아름다운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검 끝에 맺힌 은빛의 검기가 점차 푸르게 물들더니 꽃잎으로 분해돼 나부꼈다.
초연화(超聯花)의 묘리가 전장을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초연화가 유지되는 동안 이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드가 유일했다.
콰앙!!
대장장이의 분노와 신속한 몸놀림을 전개, 지면을 박차고 도약한 그리드가 속도를 높이며 전광에 휩싸였다.
벨레드가 푸른 검기의 꽃잎들을 경계해서 잠시 조심스러워진 동안 틈을 노리고 4융합 검무를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벨레드는 거침없이 행동했다.
푸른 검기의 꽃잎들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걸어 그리드를 맞이했다.
그리드야 계획을 바꾸면 그만이었다.
“화(花).”
화의 기본 성질은 대상에게 ‘표식’을 남기는 것이고, 이후 표식을 공격하는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초연화의 꽃잎에 노출 된 대가로 몸에 표식을 가득 새긴 벨레드를 향해서 표식 당 2개씩의 검기가 꽂혀 들어갔다.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을 동시에 입히는 검기들이었다.
벨레드의 취약점이 무엇인지 분석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드가 기대하는 그때.
휙.
자신에게 쇄도해오는 검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벨레드가 손을 슬쩍 휘저었다.
그러자.
파파파파팟!!
벨레드를 가격했어야할 검기들이 일제히 정지하더니 방향을 비틀었다.
벨레드의 권능은 ‘주인 없는 물체’를 자신의 ‘무기’로 삼는 것.
화의 검기가 그리드의 검 끝을 떠나 ‘투사체’라는 판정을 받게 된 시점부터 그것은 이미 그리드가 아닌 벨레드의 힘이었다.
콰콰콰콰콰콰쾅!!
“큭....!”
자신에게 역으로 되돌아온 화의 검기에 폭격당한 그리드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잃은 생명력은 207,090.
고작 3개의 검기를 허용한 대가가 이거다.
벨레드의 무기에 실린 공격력은 1개당 그리드에게 69,030의 데미지를 입힐 정도로 강력했다.
처음 벨레드의 주먹을 맞고 입었던 데미지도 정확히 69,030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미친, 고정 데미지라고?’
그것도 무려 7만에 가까운 고정 데미지라니.
여태껏 힘겹게 올려놓은 방어력과 생명력이 무의미해지는 상대다.
그리드가 절망하는 순간이었다.
파파파파팟!!
벨레드가 걷어찬 성벽의 잔해 수십 개가 또 다시 무기 판정을 받고 그리드에게 쇄도해왔다.
저 중 2개의 공격만 허용해도 바로 불사가 소모된다....
질색한 그리드가 순보의 사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청룡의 부츠는 아직도 <뇌신>의 효과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종횡무진>을 전개, 날카로운 바위 조각들을 피해내고 돌진한 그리드가 벨레드의 측면까지 도달했다.
나부끼는 흑발 사이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벨레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
“연살화극(極殺花落).”
벨레드의 몸에는 여전히 5개의 표식이 새겨진 상태였고,
콰르르르르르륵!!
모든 논타깃 스킬을 회피하고 대상에게 접근하는 종횡무진의 위력은 초월적이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무척 길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무적에 가까운 궁극기였다.
““잔재주를....””
연살화극을 피하지 못하고 허용한 벨레드가 처음으로 피를 흘렸다. 먼지 하나 묻지 않고 깨끗했던 놈의 백색 의복이 드디어 더러워졌다.
이를 간 벨레드가 힘껏 발을 굴렀다.
““뮐러의 진전을 이은 게 아니라면 꺼져라, 애송이!””
쩌정!!
지진이 발생했다. 산산이 조각나는 지면으로부터 솟구친 수백 개의 돌조각이 허공에 나부낌과 동시에 그리드를 덮쳤다.
벨레드는 이 수백 개의 무기가 감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눈앞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할 거란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본인이 말한 대로 끈질겼다.
갑자기 불꽃을 일으킨 놈은 수백 개의 무기를 일제히 불태워 잿더미로 소멸시켰다.
촤르르르르륵!!
무한히 펼쳐지는 검기의 행렬이 벨레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상상해본 바 없는 장관을 등지고 선 인간,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알았다, 네 약점.”
주변의 물체를 모조리 무기로 삼아서 공격하는 권능.
필시 위협적인 능력이다.
하늘에서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69,000이 넘는 고정 데미지가 무한정 폭격된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대장장이인 그리드는 알고 있다.
무기에서 중요한 건 공격력뿐만이 아니다.
제아무리 강력한 공격력을 품은 무기라 할지언정 내구력이 형편없으면 대상에게 닿기도 전에 소멸하는 법이다.
조금 전 화신의 폭풍에 사그라진 수백 개의 돌덩이들처럼 말이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잠재력을 개방, 무한의 검기를 등에 업고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의 검무를 펼쳤다.
그때였다.
파팟!
파파파파파파팟!!
무한의 검기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그리드를 조준했다.
“...엉?”
망했다.
깨닫는 그리드를,
투콰콰콰콰콰콰콰콰쾅!!
벨레드의 무기로 전락한 무한의 검기들이 폭격했다.
이후.
불사를 소모한 그리드는 온갖 생존기와 반격기를 남발해봤지만 채 3분 30초를 버티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그리드가 벨레드의 발을 묶은 시간, 총 5분 50초였다.
“....사기잖아!!”
부활 포인트에서 눈을 뜬 그리드의 욕설이 왕성에 울려 퍼졌다.
이런 빌어먹을, 설마 내 심상에 존재하는 검기마저 무기로 삼을 줄이야?
카운터를 만나도 제대로 만나버렸다.
꽈드득, 이를 간 그리드가 스틱세이를 소환했다.
“전하?”
“텔레포트!”
“....네.”
스팟!
***
『추,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지존 그리드가 광란의 왕 벨레드에게 채 6분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사하란 제국이 준비한 역소환 마법진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 것으로....』
13위 대악마를 플레이어 혼자서 레이드한다?
사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리드이기에 세상은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그리드가 설령 벨레드를 레이드하진 못하더라도 13분은 버텨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고,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이대로 헨루투 요새로 진격할 벨레드가 역소환 마법진을 붕괴시키고 아크 왕국을 멸망시키는 광경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공포에 잠식 된 세계가 침묵하는 순간.
스파앗!!
하늘에서 빛줄기가 떨어지며 조금 전 죽었던 그리드가 재등장했다.
스틱세이.
세계관 최강의 이동수단.... 아니, 현자를 거느린 템빨왕의 위엄이었다.
“이번엔 다를 거다.”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건가?””
벨레드의 화난 얼굴이 더욱 무섭게 일그러졌다.